by 도롱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는 25년간 제지회사에 몸담은 업계의 베테랑이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다. 집 대출금에 생활비까지, 따뜻한 가정을 지키려면 어떻게든 다시 재취업에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쟁자를 하나둘 살해하기 시작한다. ‘재취업을 위한 살해라니.’ 영화를 보던 나는 이 지점에서 막혀버렸다. 굳이 같은 제지회사에 다시 들어가야만 하나? 일자리를 위해 살인이라는 큰 위험을 감수한다고? 그의 살인 동기는 너무나 약해 보였다. 그 순간부터 만수의 상황에 몰입할 수 없었고, 이야기의 다음, 그다음으로도 빠져들지 못했다. 게다가 영화관 리클라이너 좌석은 너무나 푹신했다.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더니,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유명한 고추잠자리 장면이나 무도회 시퀀스도 다 놓쳤다. 하지만 나는 변명거리가 있었다. “만수의 살인 동기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어쩔수가없다>가 개봉한 지 일주일 동안, 이 영화는 나에게 ‘재미없는, 이해 안 되는 영화’였다. 별점 테러가 이어지는 평들을 보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극작에서 사건을 시작하는 가장 기초는 바로 ‘인물의 강력한 동기’다. 그로 인해 모든 인물과 사건이 맞물려 돌아간다. 박찬욱 감독이 그 기본을 놓쳤을까? <올드보이>의 이우진은 친누나에 대한 복수로, 오대수는 자신을 15년 동안 가둔 이우진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으로 움직인다.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의 인물 동기가 ‘사랑’이라는 것 또한 너무도 명확했다. 그런데 만수는 달랐다. 그에게는 살인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히 대체가능한 플랜 B가 많았다. 굳이 살인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는 살인을 저질러야 했을까?
어쩌면 그 ‘굳이’에 이 영화의 진짜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다시 본 만수의 세계는 달랐다. 그에게는 분명 살인을 대체할 플랜 B가 넘쳐났고, 그 자신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인을 택했다. 바로 그 지점이 포인트였다. 만수는 굳이 살인을 저질러야만 했다. 그에게 ‘직업’이란 사회 속 자아 실현의 무대이자, 가정에서는 가장으로 인정받는 위신의 갑옷이었다. 그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 그는 자신이 손수 일궈온 집도, 가족도 다 잃고 ‘나’라는 존재도 세상에서 지워지고 살아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두려움은 살인의 그것보다도 더 컸다.
나 역시 그렇다. 비록 가정은 없지만, 직업을 하루아침에 잃는다면 평화로운 일상이 송두리째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이 먼저 찾아올 것이다. 당장 다음 달 월세는 어떻게 내지, 부모님께는 뭐라고 설명하지, 매일 먹는 밥값은 어떻게 하지? 이런 현실적인 걱정들이 꼬리를 문다. 무엇보다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는 자기소개를 못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떤 존재로 세상에 남게 될까. 무쓸모의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난다. “알바라도 하면 되지”라는 말은 이제 마흔을 앞둔 내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역시 박찬욱이었다. 그는 영화를 보는 방법 자체를 비틀어버렸다.
‘주인공의 동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라, ‘동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이유를 곱씹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수에게는 누구보다 강력한 살해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단순한 재취업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결국,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살인이 아니라 그를 무쓸모의 살인 범죄자로 만든 세상의 변화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또다시 감상을 수정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