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_미리의 표정

by 미니

by 퀴어씨네클럽
초등학생 때 내 꿈은 재미없게도 회사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항상 ‘중산층’이라는 괄호가 붙어있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의 꿈이 어째서 저 모양이었을까 싶은데 이는 우리 가정의 변화로부터 기인한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중산층이었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부동산 사기를 거치며 가정경제가 무너졌고 우리 집은 서민층으로 전락했다. ‘전락’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정도냐고 할 수 있지만, 어린 나이에 중산층을 꿈으로 삼았을 정도면 당시의 경험이 나에게 꽤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미리1.jpeg 영화 <어쩔수가없다> 에서


나의 이런 경험은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가 느낀 고통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25년을 제지 전문가로 일하며 내 집과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한 만수는 돌연 해고를 당하고 만다. 재취업에 실패하고 체납 경고장이 날아오는 상황 속에서 만수의 아내 미리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면 적당히 근교 전셋집으로 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 받아들인다. 반면 자신이 지금껏 이뤄온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만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만수와 달리 현 상황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미리는 내 엄마와 닮아있고,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숏이 있다면 바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 짓는 미리의 마지막 표정이다. 내게 그 표정은 추억이 깃든 이 집을 지키고, 과거의 여유 있던 삶과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면 사실을 묻어두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순응으로 읽혔다. 하지만 중산층 정상 가정으로의 회복, 그건 달리 말하면 가부장제로의 회귀이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순응이기도 하다.


미리2.jpeg 영화 <어쩔수가없다> 에서

여기에 더해 미리의 표정에서 난 일종의 체념과 타협의 정서가 읽혔다. 타인의 시체 위에 자리한 그 가정은 과연 썩지 않고 가지를 뻗을 수 있을까? 만수의 일자리는 언젠가 누군가(AI)로 대체될 것이 뻔하고, 아들이 의붓자녀임을 언젠가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처럼 만수네 가정의 흑막이 드러나는 순간 또한 언젠가 다가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어둡더라도 지금 당장의 행복은 어찌어찌 지켜낼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하고 체념하는 것. 그렇게 미리는 늘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자신의 원래 당찬 모습과는 달리 만수의 살인 행각의 조력자가 되어버리면서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신 또한 잃고 만다.


최근에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라는 영화를 보았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 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혁명의 불씨를 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20대 무렵에 이 영화를 봤다면 혁명 뽕에 차올라서 가슴이 뜨거워졌을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좌파이고 해방을 꿈꾸지만, 내 안의 혁명의 불씨가 사라진 것을 느끼면서 어쩐지


미리의 마지막 표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민중의 힘으로 박근혜를 탄핵한 후 세상이 바뀔 거라고 굳게 믿었던 내 꿈이 순진했음을 깨달은 이후, 또 한번의 탄핵 국면을 지나왔지만 내겐 그때와 같이 더 이상 세상이 바뀔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 병든 세상을 고치려면 혁명적 대안이 필요한데 나도 결국은 미리처럼 체념하고 순응한 채 ‘어쩔 수가 없다’고 받아들이며 그저 파국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만 같달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어쩔수가없다>는 미리의 표정과 함께, 무너져가는 지구를 연상케 하는 벌목당하는 나무, 장송곡과도 같았던 첼로 연주와 함께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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