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나는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너무 오바하나? 싶을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적당히’ 하는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거 같아 오바하고 싶은 ‘욕망’이 피어오를때면 꾹꾹 눌러댄다. 오바하지 말라고.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때까지 꾹꾹 눌러둔 욕망 깊숙히 더 무거운 욕망이 있는데 모르고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아니, 것보다
나도 저들처럼 간절한 욕망이 있는걸까?
그게 불결하고 추악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 제레미는 고향 친구인 뱅상의 아버지를 사랑했다. 어느 날,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아오게 된다. 뱅상은 어릴 때 부터 제레미에게 질투감을 포함한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제레미의 등장으로 인해 가족의 균열을 감지하고 그를 증오하게 된다. 이로인해 제레미는 뱅상과 산 속에서 몸싸움을 하다 감정히 격해져 그를 살해하고, 완전범죄를 위해 시체를 산 속에 묻는다. 감정적 욕망이 야기한 행위. 범죄는 산 속에 묻히게 되고 제레미는 자신의 죄가 밝혀질까 두려워 뱅상이 묻혀진 곳을 몇 번이고 찾아가 은폐하려 한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제레미는 죄의식에 몸부림치고, 결국 산에 올라가 자살을 고민한다. 이를 지켜 본 마을의 노신부는 제레미를 회유하기 위해 그가 느끼는 죄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장면에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제레미는 뱅상을 죽인 것이 괴로운 걸까, 아니면 욕망을 계속해서 감춰야 하는 것이 괴로운 걸까? 둘 중에 무엇이 더 제레미를 후회하게 만드는 것일까. 알랭 기로디 감독은 이 영화에서 ‘죄’라는 것을 누가 정의할 수 있냐고 묻는 듯하다. 법을 지켜야 하는 경찰들이 무단침입을 하고, 신의 교리를 수호하는 노신부는 당당하게 죄를 저지른다. 종교, 법, 도덕 사람들이 만든 이성적 가치들은 영화 안에서 우습게 보여지기도 한다.
노신부는 자신이 그간 지켜온 모든 이성적 가치를 한 번에 내려놓고 욕망을 실현한다. 오랫동안 감춰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한다고? 싶을정도로 그가 취하는 행동들이 숭고해보이기까지 한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생각처럼, 나도 마음 속 깊숙히 덮어둔 욕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 또한 물불가리지 않고 모든 걸 바칠 수 있을까? 그것이 만약 ‘사랑’이라면 이 모든게 가능한걸까. 내 안에 무거운 욕망이 있다면, 살아오면서 이성적 가치가 한 삽, 두 삽 덮히다 보니 조용히 묻혀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퀴어임을 정체화하는 것에 시간이 오래걸리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이로 인한 것일지도. 아직까지도 사회적 시선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고백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니까.
미세리코르디아, 이 단어의 뜻은 ‘관용’이다. 제레미처럼 살인은 저지르지 않더라도, 내 마음 속 깊숙히 욕망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저지르게 된다면 나는 용서받을 수 있게 될까? 그 사유가 ‘사랑’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될까? 영화를 보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긴 한다. 알랭 기로디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관객인 내 몫이겠지만, 이번만큼은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졌다.
알랭 선생님, 그래서 저는 어디까지 ‘적당히’ 해야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