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퀴어>_(퀴어의) 죽음

by 미니

by 퀴어씨네클럽

<퀴어>는 당황스러운 영화였다. 3막의 전개를 비롯한 영화의 전반적인 만듦새는 차치하더라도, 퀴어 당사자로서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난감했다. 필연적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영화를 곱씹으며 어딘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퀴어>는 다분히 나의 정체성에 꽤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분한 리는 다부진 체격에 멋진 스타일로 무장한 매력적인 중년 게이지만, 한없이 주접스러운 인물이다. 길거리에서 유진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그의 모습에서부터 조금 피식했는데—물론 그 장면 자체는 정말 아름답지만—극장에서 리의 또 다른 자아가 곁에 앉은 유진을 어루만지려는 장면에선 웃음이 터져나

오고야 말았다. 이건 어린 남자를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는 중년 게이의 우스꽝스러운 로맨스를 그리려는 영화인가?

퀴어4.jpeg 영화 <퀴어>에서

영화에서 리는 끊임없이 남들이 퀴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퀴어라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존재”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정신적으로는 남들과 다를 바 없고, 단지 자신의 몸이 동성의 육체를 갈망할 뿐이라는 한없이 모순된 말이다. 나는 리가 유진의 육체에 집착한 것도 사실이긴 하

지만, 유진을 진정으로 사랑했음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리는 온몸으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단 한 번도 유진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리는 지독하게도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을 달고 산다. 퀴어로서 결코 맨정신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 늘 무언가에 취해있어야만 하는 한 불쌍한 인간의 삶을 따

라가다 보면, 그의 마지막은 더욱 비참하게 다가온다.


리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며 나 또한 중년의 내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딘가 다르다고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도 ‘일반’으로 패싱되길 원했던 사람으로서, 청소년기부터 대학시절에 이르기까지의 내모습을 돌아보면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뿐이다. 왜 나 자신으로 살 수 없었을까. 그

래서인지 리의 죽음에 더해, 영화에서 갑자기 사라진 유진의 행방을 상상하면 비참함은 더욱 커진다. 리를 떠난 유진은 자신을 퀴어로서 정체화했을까.


아니면 리처럼 비참한 말년을 맞았을까.


이 질문은 결국 후세대 퀴어인 나의 중년은 어떠할 것인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퀴어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기부정과 자기혐오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리의 꿈 속에서 자기 꼬리를 물고 눈물을 흘리던 뱀처럼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기묘한, 괴상한’이라는 뜻으로 동성애자들에게 부여되었던 ‘퀴어’라는 멸칭을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를 자랑스럽게 표현하는 단어로 전유하기까지 오랜 세월과 많은 선배(?)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 덕분에 이제 나도 더 이상 ‘일반’으로 보이길 오히려 거부한다. 여기에 더해 가끔은 퀴어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도 느낀다. 하지만 과연 늙어서도, 그리고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퀴어로 태어나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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