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리’의 외롭고 쓸쓸한 말로. 리가 결국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스스로의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약과 알코올을 찾고, 결국 주변 사람들도 떠나가게 만드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을 멀리하고 싶다. 그래서일까, 왜인지 이번에는 ‘영화’로 보기보다는 두 주인공 ‘리’와 어떻게든 그런 그를 사랑해보려는 ‘유진’이 처한 상황에 몰입하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독특한 연출로 그들의 사랑과 ‘리’의 생을 아련하고 가련하게 포장하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서 불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다.
리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됐다고 말하는 시절을 종종 떠올리고, 유진 역시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퀴어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부정한다. 아편 중독으로 미국에서 추방되어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50년대 퀴어의 삶. 하루하루 버티는 것 조차 괴로워 퀴어라는 정체성만이라도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사마저도 자기 연민 속에 허우적대는 인물로만 그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괜히 불편해졌다. 물론 추상적이고 기이한 연출로 자기 연민, 자기 부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 종국에 가서는 어떻게 되는 지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리’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시대적 감수성이 작용되어 ‘퀴어’라는 정체성에 동정심으로 쉽사리 빠질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아편,술,사랑,욕구가 아니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구원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노력했다면, 나에게는 ‘리’의 고통이 조금 더 수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리처럼 나도 분명 방황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뚜렷하지 않은 나 자신을 탓하기도 했고, 가끔은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 같아(일부 맞지만) 분노하기도 했다. 방황이 지속됨에 따라 우울감은 종종 찾아왔고, 사는 게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살면 방황이 끝날 줄 알았지만, 항상 이면에 큰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를 들어다보고,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에 따른 외로움은 계속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나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퀴어임을 자각하게 된 지는 사실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때, 그 감각을 무시했다. 부정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 건 두렵고 지치는 일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자각하기’를 조금씩 미뤘던 것 같다. 인복이 좋아서인지, 다행히도 퀴어 친구들이 주변에 생기면서 용기가 생겨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성 지향성을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퀴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로, 정말 신기할 정도로 지금까지 해왔던 방황이 어느정도 마무리 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외로움도 사그라들었다. 퀴어임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 속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감각만 남아있다.
리는 눈 감는 날까지 유진이 자신의 몸을 감쌌던 그 순간을 마음에 품는다. 유진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순간에 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사랑해야했을 지도 모르겠다. 술과 마약에 기대지 않았다면,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해줄 상대를 찾는게 아니라 내면을 좀 더 바라봤다면, 유진과의 사랑을 과거 아름다웠던 시절로 품으며 편안히 눈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퀴어>의 주인공 ‘리’에게 연민은 줄 순 없지만 안타까움을 보내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눈 감으며 삶을 마무리하길 온 마음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