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미니
정성일 평론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문장을 좋아한다. 이 말은 곧, 지금 이 세상은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절망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내게 있어 영화란 꿈이자 판타지다. 남루한 지금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또 하나의 꿈을 꾸기 위해 나는 그렇게 자주 영화관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영화 같은 삶을 살게 된 여자가 한 명 있다. 낡은 헬스장에서 일하며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는 루. 갱단의 두목으로 마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루의 아버지 랭스턴을 비롯해 그녀의 주변에는 폭력적인 남성들뿐이고 작은 마을이다보니 레즈비언인 그녀의 취향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마을을 벗어날 법도 하지만 남편에게 맞고 사는 언니 때문에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비루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삶에 어느 날 재키가 나타난다. 마르고 병약한 루와 달리 엄청난 육체미를 자랑하는 재키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루는 아버지와 마을을 벗어난다.
적당한 집, 적당한 직업에 안주하며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는 루의 모습은 어딘가 날 보는 것 같았다. 마이크로한 우울증을 달고 살며 삶에 대한 의지도 크지 않은데 다가 성소수자이기까지 하다. 살다보면 불현듯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곤 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정말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들을 시작하는 순간 우울이 더 깊어짐을 알기에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고, 도피성으로 영화라는 매체에 더욱 빠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랭스턴에게 쫓기며 벼랑 끝에 몰리는데 이윽고 재키의 몸이 말 그대로 헐크와 같이 거대해지며 손쉽게 그를 제압한 후 둘만의 세계로 나아간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말 그대로 판타지적인 장면이지만 영화는 두 사람을 옥죄는 현실의 족쇄들을 초반부터 성실히 보여준 덕분에 이 황당한 장면이 오히려
더 큰 해방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더해 두 사람을 단순히 낭만적인 엔딩에 가두지 않고, 여전히 그들 앞엔 또 하나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에필로그를 보여주며 짙은 여운까지 남긴다.
그러나 크게 대책 없어 보이는 현실에 다시 진입한다 할지라도 루를 비참한 현실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뗄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 재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치워야 할 시체가 수천 구일지라도 그녀가 인생에서 재키를 만난 건 분명 루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자 영화 같은 일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영화 같았던 시기 또한 내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해주었고, 내 정체성을 확고히 해준 ‘그 사람’을 만났을 때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넌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해.”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비수와도 같은 말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던 건 나는 내 혼자 힘으로는 영화 같은 삶을 만들어갈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나를 다음 판타지로 물들여줄 사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기꺼이 당신을 위한 시체처리반이 되어줄테니 나를 위해 괴물이 되어줄 사람 어디 없나요?’ 희망 없는 외침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내 세상도 영화가 될 것이라는 마음 하나로 오늘도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