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여성 보디빌더의 우락부락한 몸, 자신만만하게 취하는 포즈, 80년대 분위기. 어느 날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본 영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첫 인상은 이것이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여성 보디빌더와 사랑하는 이야기라니.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가 나오기를 꽤 기다렸던 것 같다. 기대가 큰 탓이였을까, 오락성이 짙은 영화라고 느껴져서 아쉬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보니 다른 것이 보였다. 이 영화는 그저 한 편의 동화일 뿐이라는 것.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랑 동화 말이다. 성에 갇힌 공주가 왕자님을 만나 둘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을 물리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는 그것이 사랑의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 해야하는 사랑은, 나를 구해줄 왕자님을 만나서 영원히 사랑하는 것. 뭐 그런 것.
영화, 인터넷소설, 드라마 등 미디어 매체를 접하면서 내게 이성적 사랑의 정의는 더욱 구체화됐다. 고등학교에 가면 풋풋한 첫사랑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3년 내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학교를 가서도 왕자님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다 대학교 3학년 때 드디어 왕자님인가? 싶은 사람이 나타났다. 1년 반 나름 진득하게 연애했지만 당연히 현실은 꿈꿔왔던 아름답고 예쁜 사랑 이야기는 아니였다. 그때 남자친구는 정말 왕자님처럼 날 충분히 보호해주고 사랑해줬다. 하지만 나는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지 잘 몰랐다. 그에게 바라는 것만 많았고, 힘들 때 힘이되어주는 방법을 몰랐다. 내 첫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깨닫게 됐다. 어렸을 때 나름대로 꿈꿨던 사랑 이야기가 아니였기 때문에 그 사랑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많은 이가 꿈꾸는 사랑 동화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 주인공이 ‘여성’과 ‘여성’일 뿐. 하지만 이 사랑에는 왜 이렇게 많은 설득과 설명이 필요한걸까. 왜 여성의 사랑을 납득시키기 위해 몸을 거대하게 키우고, 폭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걸까. 결국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걸까.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내가 꿈꿨던 사랑 역시 ‘남성’에게 보호받고 구원받는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에. 보편성에서 어긋나 ‘괴물’이 되는 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라고 생각하면 ‘루’는 가족으로 인해 마을(성)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공주다. 어느 날, 허름한 행세를 한 왕자 ‘재키’가 나타나 ‘루’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모두 물리치고 둘은 영원히 사랑한다. 이 간단한 이야기에서 빌런인 ‘루’의 아빠는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를 비춘다. 그가 키우는 사슴벌레처럼, 여성은 언제든지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빌런을 물리치기 위해, ‘재키’는 결국 거대한 몸집을 가진 괴물이 된다. 여성의 사랑은 ‘괴물이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장애가 없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직도 그렇다.
물론 퀴어에 대한 시선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퀴어의 동화같은 사랑 이야기, 밝고 유쾌한 이야기는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서 괴물이 된 두 여성처럼, 아직까지도 불편한 시선이 여전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에도 영화 후반부, 빌런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도망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가 만든 세계에서 두 사람은 괴물이 아닌 신이 된다. 어찌보면 이 장면은 슬픈 사실에 대한 감독의 머쓱한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감독인 로즈 글래스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마지막 장면으로 나름대로 해석한 사랑의 정의를 전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되는 것들은 뭐든지 해치우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이 안온한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 엉뚱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루’가 시체에서 꺼낸 담배를 피는 모습 아래로 그렇게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자막이 들어가는 것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