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미니
의무경찰로 군복무를 하던 시절, 서울 도심에서 열리는 여러 집회·시위에 동원되곤했다. 우선 매일같이 이렇게 많은 집회가 열린다는 사실에 놀랐고 세상은 책이나 기사 속에 나온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불합리하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수많은 집회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건 노동자 집회였는데 이들 집회에서 꼭 흘러나오던 ‘철의 노동자’라는 노래 속 가사 한 구절이 여전히 내겐 응어리처럼 남아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과연 인간답게 산다는 건 뭘까?
<미키 17>의 주인공인 미키는 목숨을 잃더라도 새롭게 신체가 재프린트되는 신기술이 장착된 인간이다. 인류가 새롭게 당도한 행성 니플헤임에서 그는 각종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데 목숨이 쉽게 쓰고 버려지는 미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망한 김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용균의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산업재해로 인한 연평균 사망자 수는 약 850명이라고 한다. 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비참한 현실에 난 늘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누군가가 죽어나가도 현실은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더 그랬
다.
처음 봉준호 감독이 <미키 7>이라는 원작 소설을 <미키 17>으로 각색해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나는 일종의 죽음의 스펙터클을 기대했다. 사망할 미키의 숫자를 7에서 17로 늘린 것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드디어 할리우드 거대 자본을 손아귀에 쥔 봉 감독이 미키를 한 명씩 한 명씩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제거해나가는 악취미를 발휘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영화에서 미키의 죽음은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죽음들은 그저 생략하고 넘어가기까지 한다.
심지어 우주선의 대원들조차도 미키 1의 탄생 때와는 다르게 어느새부턴가 미키의 죽음을 가볍게 취급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미키가 프린트되는 것에 무감각해진다. 마치 2025년 오늘, 어느 공장에서 어떤 노동자 하나가 떨어져 죽고, 끼어 죽고, 갈려 죽는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대체할 이들이 있으니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듯 미키의 죽음 또한 니플헤임 사람들의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들기 시작한다. 2058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어떤 죽음은 가볍게 다뤄지는 현실.
영화는 그 지독한 현실에 발딛고 있다.
영화 속 마샬처럼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우주 개척에 열을 올리며 미지의 땅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고, 누군가는 원주민이 정착해있는 곳을 탐내며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감히 말하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제때 살고, 제때 죽고, 제때 먹고, 제때 사랑하며, 인간의 분수에 맞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자 가장 품위 있는 삶 아닐까. <미키 17>은 SF의 외피를 두른 채 먼 미래의 가상 세계를 내세우고 있지만 관객에게 인간성의 회복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반SF적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