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2025년 2월 7일 오후 4시 5분, 조카가 태어났다. 예정된 시간에 태어난 지라 언니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 사실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보자기에 싸인 조그마한 조카를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생명이 이렇게 소중할 수 있구나. 정말 좋은 것만, 예쁜 것만 봤으면 좋겠다. 조카의 탄생은 그렇게 내 존재의 소중함도 일깨워줬다. 나도 그렇게 태어났을 것이며, 그때도, 지금도, 나는 가족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일테니까.
조카의 탄생에서 내 존재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은 것은 꽤나 새로운 감각이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종종 ‘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인데 이러한 인식이 한 개인을 짓이겨버릴 때가 있다. 나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과연 쓸만한 인간일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현대사회는 ‘그럴듯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쉽게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보니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할 때가 쉽게 찾아오는 것이다.
영화 <미키17>의 ‘미키’는 절친 티모와 함께 차렸던 마카롱 가게가 망해버려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된다.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을 받아들인 미키는 이 행성을 떠나기로 한다. 떠나는 길목에서, 자신의 죽음으로써 다수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에 구슬려 기꺼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직업 ‘스펜더블’이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죽었어야 할 미키17은 외계생물체인 ‘크리퍼’들로 인해 생존하게 되고, 이를 죽음으로 인식한 인간프린터기는 미키18을 복제한다. 그렇게 ‘나’와 ‘복제된 나’. 미키17, 미키18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멀티플’ 상태를 통해 일어난 존재의 인식은 나아가 ‘어느 누구도 한 생명의 생을 삭제시킬 수 없다’는 결론으로 확장시킨다.
미키는 ‘마셜’이 통치하는 얼음행성 개척단에게 외계생물체와 같이 여겨진다. 죽어도, 죽어도 또 살아나는 돌연변이. 인간은 돌연변이를 정상범주에 들어가는 ‘다수’를 위해 이용한다. 영화를 보면서 이 몰지각한 행위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자는 이유로, 소수를 갈취하고 잔인하게 인권을 유린한다. 이에 영화는 실험삼아 우주선 밖으로 내던져진 ‘미키’를 ‘크리퍼’와 연대하게 함으로써 외계생물체와 ‘공생’하는 법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선’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변인 것이다.
복제인간이 되는 것을 선택한 미키가 여러 죽음을 경험하면서 이건 벌 받는 거라고 얘기했을 때, 이용 당하는 생명들의 눈을 떠올렸다. 소, 돼지처럼 도축당하는 동물들, 아동 노동 착취 등. 불행한 삶이 이어질 때, 미키처럼 속으로 이렇게 태어났으니 난 이렇게 이용당하는게 맞아, 라고 스스로도 자신의 삶을 규정지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내’가 소중하듯이,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 역시 모두 소중하다. 영화의 마지막, 미키가 자신의 프린터기를 폭파시키기 전에 복제된 마셜 부부를 상상했던 것처럼,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사이에 ‘악’도 복제되며 되풀이된다.
무엇이 옳은가? 새로운 모습으로 ‘복제될’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린 어떤 방향성을 선택하고 살아야 할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생명을 존중하고 대화를 통해 소수와 함께 공생해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하는 것. 일단 그것은 인식하며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새로 태어난 조카를 만나고 이 영화를 보니, 적어도 이 영화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지에 대한 답이 조금은 되어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