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도롱
영화 <부고니아>는 여러 키워드로 읽히는 작품이다. 회사 CEO를 외계인이라 믿는 한 청년이 그녀를 납치하는 이야기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판치는 시대에 시의성을 가진다. 군집 생활을 하는 꿀벌의 멸종과 그 원인으로서의 인간 이야기는 기후 관련 영화로 읽히고, 빈부격차와 양비론의 문제까지 연결되며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그런데 그 어떤 키워드도 영화 속에서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음모론이라면 주인공의 주장이 거짓이어야 하지 않나? 이 영화에서는 그녀가 실제로 외계인이다. 그렇다면 “말도 안 되는 음모론도 사실일 수 있다”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 탓으로 보이는 꿀벌 멸종과 계급 갈등의 서사는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감독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영화엔 납득하기 어려운 죽음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모두 세 사람이 죽는데(경찰 포함 네 사람), 자살이 있고 타살이 있으며, 자살인지 타살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죽음이 있다. 이 세 죽음은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나는 공통된 단어 하나로 이들을 묶어 읽었다. ‘명분’.
첫 번째 죽음은 주인공 테리의 사촌 ‘돈’의 죽음이다. ‘돈’은 화학적 거세, 납치의 정당화 등으로 테리에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당하는 인물이다. 미셸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그는, 미셸이 자신을 안드로메다로 함께 가자고 유혹하자 망설이다 받아들이는데. 그러면서 “사촌 형 테리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머리에다 총으로 쏴버린다. 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미셸과의 안드로메다행은 ‘돈’에게 죽음과 같은 걸까?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죽음에 어떤 외부의 정당성, 즉 명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돈’은 죽음을 통해서 안드로메다로 향할 수 있고, 그곳은 곧 돈에게 ‘이상향’이라는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미셸이 준 ‘안드로메다행’ 서사는 그에게 죽음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두 번째 죽음은 테리의 어머니다. 돈의 죽음 직후, 테리는 미셸과의 설전 중 “차에 어머니 치료제가 있고, 그것은 위장용 부동액 용기에 들어 있다”는 미셸의 말을 듣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인데 테리는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매달려, 미셸이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병원으로 달려가 그 치료제를 망설임 없이 어머니에게 주입하는데, 그것은 역시나 부동액이었다. 부동액을 주입받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의 이 바보 같은 행동 역시 ‘명분’의 논리로 읽힌다. 테리는 ‘어머니의 죽음’을 정당화할 외부의 이유를 찾고 있었고, “미셸의 거짓말 때문이었다”는 설명은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면죄부인 것이다.
세 번째 죽음은 테리 자신의 죽음이다. 그는 미셸의 “안드로메다로 가는 길이 사무실에 있다”는 말을 믿고 그녀와 함께 사무실로 향한다. 드디어 안드로메다로 향하나 싶은 그때 폭발물이 터지며 테리는 댕강 머리가 날아가며 죽는다. 온도 변화에 따른 폭발이라고 하지만 그 대사에 뒤따른 설명이 없어 단순한 실수라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이 만약 고의라면, 이 역시 명분 때문이라면. 이 모든 게 테리가 자신의 죽음을 정당화하려 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외부에서 온 명분에 의해 행동하고, 그 명분 때문에 살거나 죽는다. 스스로의 명분은 자존과 가치를 높이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그 명분을 끌어들일 때 인간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된다. 그 어리석음은 개인적 차원의 비극일 뿐 아니라, 집단적·역사적 차원의 폭력과 전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이 어이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결과가 허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그렇게 명분을 찾아 나선다.
영화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내 안의 명분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이미 만들어졌지만, 나는 끊임없이 외부의 명분들을 끌어들여 그럴싸한 나의 모습들을 만들려 든다. 하지만 “그만둬야 한다”는 외부의 이유들, 혹은 “그만둘 수 없다”는 외부의 이유들 그런 명분들에 붙들려 우왕좌왕하는 나를 발견한다. 누군가는 명분을 쌓으려는 나를 보며 바보 같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부고니아>를 지켜보는 관객처럼, 그리고 그 관객 중 내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