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환상적인 군무와 오색찬란한 색들. 신나고 웅장한 멜로디 속 심금을 울리는 대사들. 뮤지컬 영화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을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뮤지컬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언젠가 봉준호 감독이 한 토크쇼에서 뮤지컬 영화에 대해 말한 것처럼, 진지한 대화를 하다 갑자기 노래부르는 그 순간을 나도 왜인지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내 일상에서는 후후후순위가 됐던 것 같다. 더군다나 취향상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노래와 춤으로 만들어내는 환상의 나라는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도 아니고, 그리 기대고 싶은 세계도 아니다. 솔직히 삶은 슬픈 순간이 더 많은데, 춤과 노래가 해답이 되어주진 않으니까.
<위키드>는 ‘오즈’라는 나라의 두 마녀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다. 엘파바와 글린다. 둘은 과연 친구였을까 싶다. 일단 첫만남부터 둘은 서로 달라 부딪힌다. 초록색 피부, 검은색 옷을 입고 난데없는 묘기로 결국 사고를 치는 엘파바. 아름다운 금발머리에 공주풍 옷을 입고 밝고 상냥한 글린다. 타고 태어난 모습 때문에 엘파바는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글린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이렇게 다른 둘은 서로를 이용하기도, 미워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알아보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하지만 함께 성장하면서 맞닥뜨리는 역경에 각자가 꿈꾸는 미래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각자의 길을 존중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2부 위키드 포 굿의 클라이막스 가사처럼
“나는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라고 노래하면서.
두 마녀를 보며 나도 사랑했던 친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많이 달랐지만 친구는 나의 스승이었다. 살다 마주하는 고통을 함께 나누며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이해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랬고, 나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친구와 늘 서로의 곁에 있는 멋진 미래를 상상했다. 오색찬란하고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미래. 혹시 우리에게 끝이 있더라도, 엘파바와 글린다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우리를 갈라놓게 만들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우리의 환상이 깨진 건 아주 찰나같은 순간이었다. 앞으로의 나날들을 응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우린 끝이 났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까, 사랑을 하든, 우정을 하든 언제든지 원치않게 끝은 있을 것이라고 믿어버린게. 생의 희노애락을 춤추며 노래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게.
시간이 흘러 내게 뮤지컬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 심지어 노래방에서 대부분의 노래를 뮤지컬 넘버만 부를 정도로, 번 돈을 뮤지컬에 다 가져다 바칠 정도로 시간만 나면 뮤지컬을 보는 친구가 신기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길래 뮤지컬을 보는걸까 싶어 거금을 내고 보러가게 됐다. 역시나 화려한 무대와 조명, 신나는 음악으로 정신을 쏙 빼놓게 하면서도 응? 갑자기 여기서 사랑고백을 한다고? 다소 황당한 장면이 나오면 내가 지불한 금액을 떠올리며 그래… 그래도 난 종합예술을 보고 있다며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때 쯤,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다시 이때부터였을까, 이 환상의 나라에 기대봐도 될까,
마음에 작은 파동이 일어난 건. 그리고 이 환상의 나라로 안내한 건
다시 또, 친구였던 것도.
사실 내게 이런 파동이 생긴 이후에 영화 <위키드>를 보게됐다. 이제와서 이 뮤지컬 영화가 감동스러웠던 건, 글린다와 엘파바가 손을 맞잡고 머나먼 미래를 바라보는 모습, 함께 노래하는 모습에서 과거 사랑했던 친구와 나의 찬란했던 시절을 봤기 때문이다. 그 시간동안 실제로 우리에게 춤과 노래는 없었겠지만, 우리가 함께 보내온 시절 어떤 찰나같은 순간에는 분명 아름다웠을테니까. 우리가 함께 웃으며 떠들었던 그 순간에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 날을 엘파바와 글린다가 대신 노래해주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친구를 마음 속에 행복했던 시절로 간직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기대어 잠시 환상의 나라로 떠나봐도 될 것 같았다.
<위키드>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이 찾아왔다. 연말을 맞이하며 과거 소중한 친구로 인해 달라진 ‘나’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길거리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반짝반짝, 몽글몽글 내게는 판타지처럼 굳이 아름다웠던 이 날이 올해는 왜인지 기대된다. 그래서 올해는 뮤지컬 뮤덕 친구와 함께 ‘킹키부츠’를 보면서 연말의 판타지에 마음껏 기대보기로 했다. 현실은 지속겠지만, 노래를 부르며 또 내년을 맞이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