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키드>_해피 엔딩의 빈자리

by 미니

by 퀴어씨네클럽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 벅찬 널뛰기식 전개에 더해 다소 요란스러운 이미지와 노래의 향연에 조금은 지쳤을 때, <위키드: 포 굿>의 마지막 엔딩 장면만큼은 내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장미 핀 드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어깨를 맞댄 ‘엘파바’와 ‘글린다’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둘의 관계가 우정 그 이상의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극장을 나오던 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왜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위키드>의 배경이 되는 오즈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엉망진창인 곳이다. 오즈를 다스리는 마법사는 체제 수호를 위해 서쪽 마녀라는 외부의 적을 상정해놓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전형적인 파시스트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안에서 동물은 억압받고 차별받으며 언론은 철저히 통제된다. 미국의 역사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는 오즈는 트럼프가 재집권한 지금의 미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단순히 미국에 한정할 필요 없이 전 세계와도 연결된다.

위키드5.jpeg 영화 <위키드>에서


그러나 대개 모든 동화가 그러하듯 <위키드> 또한 권선징악의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악한 지도자는 새로운 여성 지도자 글린다로 교체되고 그렇게 ‘happily ever after’의 세계로 마무리되지만, 여기서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만큼은 하나의 불가능으로 존재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퀴어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다분하지만, 해피 엔딩 속에서 이 둘의 관계만큼은 미결로 남겨둔다. 이는 달리 말하면 퀴어적 사랑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서쪽 마녀는 공식적으로 죽은 것이기에 엘파바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엘파바는 결국 오즈의 평화를 위해, 또한 권력을 이양받은 글린다가 자신의 힘으로 제대로 오즈를 고쳐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오즈와 글린다를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대의를 위해 인류의 근원적 가치인 ‘사랑’은 끝내 포기된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엘파바가 혼자 떠나지 않고 헤테로 백인 남성 ‘피예로’의 손을 잡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바깥으로 퇴장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에서 퀴어한 사랑은 설 자리가 없다.

위키드6.jpeg 영화 <위키드>에서


영화는 오즈가 품고 있던 모든 악과 부조리는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관객에게 안겨주지만, 퀴어적 사랑이 존재할 여지는 남겨두지 않는다. 그것이 이 스토리가 지닌 한계이자 늘 동성애는 ‘나중에’ 다뤄야 할 것으로 취급되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어 더욱 가슴이 아리다.

<위키드>의 엔딩을 곱씹으며 난 다시 한번 알랭 기로디 감독의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를 떠올린다. 퀴어성이 그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미세리코르디아> 속 세상에 엘파바와 글린다가 존재했다면 어떠했을까. 주류 서사에서 더 이상 퀴어한 사랑이 금기시되거나, 특별하거나, 또는 존재조차 할 수 없어 관객이 마지못해 상상해야 되는 것이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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