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행과 나날>_여행 < 나날

by 미니

by 퀴어씨네클럽

빌딩으로 꽉 들어차 삭막해 보이는 회색빛 도심에 자리한 작은 집. 그 안에 ‘이’라는 이름의 시나리오 작가가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이가 조심스럽게 써내려가는 문장은 이내 한편의 영화가 되어 영화 속에서 극중극 형태로 펼쳐진다. 한여름 해변을 배경으로 처음 만난 남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끝나고 다시 영화는 이의 현재로 돌아오는데 관객과의 대화 현장에서 “영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는 관객의 말이 이의 폐부를 찌른다. 문득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느낀 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하얗게 눈 덮인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과 나날3.jpeg 영화 <여행과나날>에서


나도 눈 덮인 겨울의 이미지로 상상되는 추운 나라로 훌쩍 떠나버린 적이 있었다. 바로 핀란드였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당시 뒤늦게 학점 관리를 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알바를 두어개씩 하며 연애까지 하고 있었고 진로도 고민해야 했었다. 한창 N포 세대와 헬조선 담론이 활발하던 시기에 나는 문득 내게 주어진 온갖 명제들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주변의 온갖 말에 지쳐 도망치고 싶었던 이와 같이 나도 어떻게든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싶어 그렇게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갔다.


영화에서 이는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덕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산속 깊은 곳 아저씨 혼자 운영하는 한 여관까지 다다르게 된다. 무언가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설정이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아저씨가 만들어주는 밥을 먹고, 조용히 눈을 구경하고, 아저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한밤중에 난데없이 잉어 서리를 하러 나가고 그곳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리지만 이내 다시 찾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관 밖을 나서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정말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여행이지만,


이는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다”라고 말한다.
여행과 나날4.jpeg 영화 <여행과나날>에서

내 핀란드 생활도 어찌보면 이의 여행과 다를 바 없었다. 교환학생이 어땠냐고 물어보는 이들에게 나는 늘 “요양하고 왔다”고 말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낯선 타국 땅에서 영화같은 일이라곤 전혀 벌어지지 않았지만 매일 아침 미세먼지 수치를 체크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감사했고, 오후 2시까지만 주어지는 겨울 햇빛의 소중함을 느꼈고, 요리의 재미를 발견하였으며, 노동하지 않고 학교만 다녀도 삶에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잠깐 쉬어갈 수 있었던 그 시기 덕에 난 말 그대로 살 수 있었다. 온갖 말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기는 앞으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동력이었다.


마치 이의 겨울 여행이 작가로서 앞으로의 나날들에
중요한 밑천이 됐을 것처럼 말이다.


나는 여행을 즐기지는 않는 사람이다. 여행 가서 많은 것을 보고 겪고 와야 한다는 강박 때문도 있지만 여행은 언제나 돌아가야 할 현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속 이의 한겨울밤의 꿈 같았던 여행을 보고 핀란드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듯, 어쩌면 여행이란 ‘영화 같은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나의 나날들을 위해 떠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 영화적이다. 이(또는 감독 본인)가 써내려갈 다음 영화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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