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대학교에 진학하고 루틴화된 일상이 지루해질때쯤,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한창 인기있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여자 혼자 유럽여행 후기’라는 글이 종종 올라왔는데, 글을 읽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으로 나 혼자 떠나본 해외여행은 색다른 경험의 연속이었고 이후로 낯선 곳을 체험해볼 수 있는 여행의 매력에 빠져 시간과 경비만 생기면 훌쩍 떠나곤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경직된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고, 여행은 뭔가 대단한 것처럼 여겨져 우선순위에서 점점 벗어났다. 그러던 어느날, 코로나로 인해 당시 일하고 있던 회사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엎어질 위기에 놓였고, 동시에 나는 해고 위기에 놓이게 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막막한 상황에 날 가장 즐겁게 했던 여행이 떠올랐다. 영화 <여행의 나날>의 ‘이’처럼 그때의 나도 연차를 내고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내게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충청도 부여로.
버스를 타고 부여라는 고장에 홀로 도착했을 때, 왜인지 이전에 느꼈던 여행의 설렘은 사라지고 막막하기만 했다. 길을 걷다 가게 유리창에 비춰진 내 얼굴은 그리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내려왔으니 미션을 수행하듯 가기로 했던 카페, 음식집, 관광지를 천천히 다니기 시작했다. 여행지를 거닐면서도 머리 속은 여전히 회사 일로 가득했고 가족 또는 연인끼리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부여까지 와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행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절망감이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여행이 내게 특별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영화 <여행과 나날>에는 시나리오작가 주인공 ‘이’가 상상하며 쓴 한여름의 여행과 시나리오 작가 ‘이’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실제로 떠난 겨울 여행이 차례로 이어진다. 하지만 두 여행 모두 ‘여행’이라는 말에서 기대되는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정처없이 길을 거닐다,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일화를 그린다. 그러므로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떠난 ‘이’의 여행과 그가 상상한 여름 여행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두 여행에서, 일상을 살아가다 새로운 인연과 예기치 못한 일을 맞닥뜨리고 그것에서 얻은 영감으로 남은 일상을 살아나가는 공통점이 보인다.
영화를 보며 내가 그때 떠났던 부여 여행이 떠올랐던 건, 나도 여행이라는 말에 갇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떠났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난 건 아니지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엿들었던 중년 여성분들의 대화, 독립서점에 들러 잠깐 읽어보았던 책, 돌아다니다가 이름모를 문화회관 옥상에서 본 현대무용 공연,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버스 창밖으로 봤던 여름의 해질녘에서만큼은 분명 그 순간에 잠시 머물러있었다. 그 순간들에서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가 ‘여행’을 떠났기에 특별해졌던 것들이 하나 둘 기억나게 된 것이다. 영화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바가 그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내가 늘 마주하는 일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극장을 나섰다.
내가 떠난 여행지의 모든 것들이 특별하다면, 여행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 모든 것이 일상이다. 반대로 내 일상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면 내게 앞으로 남은 나날들은 조금 더 특별해지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요즘은 어디론가 떠나는 것에 ‘여행’이라는 큰 무게를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홀로든, 누군가와 함께든 일상처럼 받아들이며 떠나는 여행.
이제 나는 언제든지 훌쩍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