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행과 나날>_혼자 하는 여행

by 도롱

by 퀴어씨네클럽

영화를 보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누군가와의 동행이 아닌, 오롯이 혼자 떠나는 여행 말이다.


주인공 ‘리’는 최근 자신이 각본을 쓴 영화의 GV를 하던 중, 스스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자책에 빠진다. 그리고 설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갑작스러운 여행이었기에 숙소를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밤이 되고, 무작정 여관의 문을 두드리던 그녀는 ‘벤조’라는 이름의 아저씨가 운영하는 여관에 머물게 된다.


줄거리는 별게없다. 앞에 나열한 내용이 전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가 여행한 느낌이 들었다. 몰아치는 찬바람과, 추운 설국을 보며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고생일까’ 생각하다가, 따뜻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 장면에서는 ‘따숩겠다’, ‘맛있겠다’는 감각이 먼저 떠올랐다. 별것 없는 여행 속 소소한 일상들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나의 ‘별것 없던’ 여행이 떠올랐다.


여행과 나날1.jpeg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3년 전, 나라의 리더를 뽑는 투표 날이었다. 두 후보를 두고 어느 때보다 박빙의 여론조사가 쏟아졌다. 하루하루 결과를 지켜보며, 내가 지지하지 않는 그 사람만은, 손바닥에 ‘王’자를 새기며 혐오스러운 야망을 드러내던 저 인간만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수많은 비리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던 저자만은 아니길,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개표를 지켜봤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그는 1%도 채 되지 않는 차이로 당선됐고, 그 이후로 나라는 멈춰선 것처럼 느껴졌다.


선거 다음 날의 공기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출근길 지하철의 공기는 바닥으로 착 가라앉았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지워져 있었고, 그 낙담과 무력의 공기는 숨을 막히게 했다. 결국 출근하자마자 반차를 쓰고, 그날 곧장 여행을 떠났다. 가까운 속초였다.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아주 늦은 첫 끼로 들기름 막국수를 먹고, 벤치에 앉아 밤바다를 몇 시간이고 멍하니 바라봤다.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와 와인 두 병을 마시고 잠들었다. 다음 날에는 낮 바다를 또 몇 시간 바라보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과 나날2.jpeg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그 이후에도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혼자 떠났던 그 봄날의 속초 여행은 유독 잊히지 않는다. 1박이라는 짧은 일정, 그만큼 별일 없던 시간, 혼자라서 느껴졌던 외로움까지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만큼 속 시끄러운 세상과 단절되어, 백색의 파도 소리와 내 속의 이야기만을 집중해서 들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여행은 특별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일정 조율과 비용, 그만큼의 품이 드는 만큼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낭비라고 여겼다. 그래서 늘 누군가와의 동행이 필요했다. 적어도 재미와 안전만큼은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여행은 혼자일 때, 더 낯선 세계에 부딪히며 우연에, 우연에, 또 다른 우연들에 특별한 일상들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


주인공 리가 벤조와의 작은 여행을 마친 뒤 내뱉는 대사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서 즐거웠을까. 처음에는 그 즐거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다고 느꼈다가, 조금 알 것도 같아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또 한 번 여행을 떠나야겠다. 오롯이 혼자서. 새해도 되었겠다, 그렇게 버킷리스트에 조용히 하나를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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