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도롱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또 다른 레이브 파티를 찾으러 사막으로 향하는 히피 무리, 그리고 집 나간 딸을 찾기 위해 이 무리에 합류한 노인 루이스와 그의 아들 에스테반. 목적지가 같은 이들은 함께 이동한다. 영화는 사막을 가로지르고, 계곡을 건너는 이들의 지루한 여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러다 부지불식간의 공포가 이들에게 들이닥친다. 그 공포는 이들이 붙들고 있던 여정의 목적과 의미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사막의 모래알처럼 흩뿌려 놓는다. 영화를 보고 나는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이 몸과 마음이 얼얼했다. 오프닝에서부터 울리는 테크노 우퍼 사운드는 나를 쥐락펴락했고, 영화의 후반부 연이어 터지는 사건들은 정신을 빼놓게 했다. 공포영화를 보듯 눈과 귀를 틀어막은 채 버티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하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이 영화가 휩쓸고 간 잔상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잔상.
영화가 끝난 뒤 지인들과 간단히 감상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 분이 말했다. “넷플릭스였으면 이 영화는 보다가 껐을 거다.” 맞다.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 필람해야 하는 영화다. 사막 한가운데서 열리는 레이브 파티, 그 안에서 울리는 우퍼 사운드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야 비로소 ‘영화적 체험’으로 완성된다. 후반부에선 사막 한가운데 버려져 삶과 죽음의 외줄타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은 공포감을 심어준다. 이전 <누벨바그> 편에서 극장 산업의 침체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 주제에 가장 시큰둥했었다. 영화는 늘 위기였고, 비디오 시장이 등장했을 때도 다들 위기라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지 않았나, 안일한 생각이 강했다. 연출의 꿈이 있으면서도, 그 극장의 위기는 피부로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시라트>는 그 생각을 바꾸게 했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만’ 완성되는 영화인데, 이 극장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이 소중한 영화적 체험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는 게 될 것이다.
영화적 체험은 언제나처럼 극장에서만 가능하기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두 번째 잔상.
영화가 끝난 뒤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질문이 남았다. 왜 루이스가 지나간 지뢰는 터지지 않았는가. 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가. 시나리오를 쓰는 나에게 이 질문들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영화 속 죽음은 언제나 서사 속에서 납득 할 만한 상황들을 부여받기에. 그래서일까. 나는 늘 죽음 앞에서 이유를 찾으려 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상식선에서 이해되는 죽음이어야 발 붙이고 서있는 이 세계가 그나마 살만한 곳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죽음이 정말 그런가.
모든 죽음이 이해가 되는, 곧 서사가 있는 죽음이라면 세계 곳곳의 전쟁 희생자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을까. 살아 마땅했던 그들은 아무런 선택지도 없이 죽음으로 휩쓸려 갔다. 인간은 언제든 불쑥 들이닥칠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들인데 나는 영화를 보며 속으로 오만하게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는 죽어서는 안 되고, 누구는 끝까지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이 영화는 죽음의 서사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무력한 죽음들 앞에 붙일 모든 설명들을 오히려 무력하게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잔상들을 정리해 나가는 지금, 그 죽음들은 절대 이해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