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미니
<왕과 사는 남자>의 기록적인 흥행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류승완의 <휴민트>와 함께 설 명절 영화로 개봉했을 때 난 당연히 <휴민트>의 우세를 점쳤다. 영화적 완성도나 재미로 따졌을 때도 여전히 <휴민트>가 우위에 있다고 보지만, 어찌됐든 관객의 선택은 남북한 첩보물보다는 비운의 왕을 소재로 한 휴머니즘 팩션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여러모로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또 하나의 천만 영화였던 <광해, 왕이 된 남자> 또한 광해군을 소재로 한 팩션 사극이었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다”고 외치던 가짜 광해, 즉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왕의 모습에 화답했던 관객에게서 당시 국민들이 어떠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는지와 연결짓는 건 어렵지 않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삶의 의지조차 없던 한 나약한 왕이 백성들과의 교류를 통해 비로소 각성에 이르는 모습이 수많은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우리가 여전히 민중과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12.3 내란을 지나면서 어리석은 지도자가 국가를 얼마나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지 우린 또 한번 여실히 경험했다. 이제는 사어(死語)가 된 줄로만 알았던 ‘계엄’이란 단어는 국민적 역린을 건드렸고,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이 남긴 트라우마와 상처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오랜 시간 정치적 스트레스에 시달린 수많은 사람들이 성군의 이미지를 다시금 스크린으로 소환한 <왕과 사는 남자>를 선택한 건 어찌보면 예정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자
유일하게 눈물이 났던 장면이 있다.
바로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글을 가르쳐주면서 행복한 시간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던 몽타주 시퀀스였다.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각자의 노고를 치하하던 모습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권세로서만 존재하는 왕이 아닌 진정으로 백성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과 소통할 줄 아는 왕으로 거듭난다.
다만 그 장면에서 나는 일종의 불가능성 또한 엿보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속 성군을 현실에서도 희망했지만 이듬해 우린 다음 대통령으로 독재자의 딸을 맞이했었던 것처럼, 지금껏 소통을 외쳤던 수많은 대통령들 역시 실패로 남았다. 내 이름을 호명해줄 지도자를 삶에서 맞이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 행복한 장면에서 흘러내렸던 눈물은 예정된 단종의 비극적 결말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형태의 지도자가 끝내 이 세상에 오지 않을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다시금 자각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