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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물박사 김민지 Sep 15. 2022

시인이고요, 에이전시인입니다

S#2 부러지고 부러뜨리고

비딩에 내던져진 내 기획안은 짝짓기를 앞두고 목을 내던져 싸우는 수컷 기린같다.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여러 에어전시가 넥킹이라도 하듯 제안 격투를 벌이는 비딩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당첨되었다. 싸움에서 이긴 에이전시인만이 돈이 되는 프로젝트 씨앗을 받기에. 그동안의 노력이 성과 없이 끝나는 악몽에 시달려도 달려야 한다.


에이전시인으로 산다는 건 좋은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을 바라기 전에 기브앤테이크가 확실한 클라이언트를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이치와도 부합하는 밥벌이의 섭리다.


여러 직장을 다니는 동안 참 다양한 직장어에 물들었다. 직장인의 회화. 그 용례를 알면 그 생태계가 보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획 중인데 미팅 때 어떻게든 부러뜨릴 생각이에요."


"지난 기획이 잘 부러지지 않아서 수정 중입니다."


부러지고 부러뜨리고. 그렇다. 내가 느끼는 일의 압박감에 비해 회사가 평가하는 업무의 중요도는 꽤 낮을지도 모른다. 비딩이 아니더라도 이곳의 일 대부분이 그런 편이다. 말하자면 집안일인데 남의 집에서 맡긴 집안일이다. 그래서 잘해야 본전일 때가 많고, 못하면 사단이 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상대가 일이랍시고 어떤 빅엿을 주더라도 네 손 안에 쥐고 깔끔하게 부러뜨려 단면에 구멍이 몇 개인지도 세어보라고 지시받은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운에 따라 주어지는 그 구멍이 마치 숨구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엿치기에 참패하더라도 개운치 않은 감정이 축적된다.


이 회사는 프로젝트당 맨먼스를 책정한다. 그래서 회사 입장에서 내가 하는 일의 기여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선 충분히 합리적인 인력 운용 효과를 바랄 수 있겠지만, 일하는 사람의 자잘한 고충들은 기여도에 영향을 주지 않아서 헛도는 나사를 쥐고 퇴사를 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지난 주 연휴가 오기 전 나는 작은 나사들이 헛도는 일들을 막기 위해 이곳에서 일한 분에게 몇 가지 팁을 전수받았다. 업무 관련 내용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메일 알람과 업무용 메신저로 쓰고 있는 잔디 알람을 휴대폰에서도 활성화시키고 집에 돌아와 입술을 악물고 잤다.


내가 늦으면 줄줄이 늦게 퇴근한다는 말이 저주처럼 새겨져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늦게 퇴근할 텐데 늦게 출근하자 싶어 늘어진 테이프처럼 일어나 감은 머리를 말릴 때마다 머릿속 생각이 툭툭 끊겨 읽히는 아침을 복구하고 싶었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파악하려고 했다. 모두가 웃기지도 않고 우스워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환경 속에 억지로 나를 맞추고 지냈다. 이만한 일로 퇴사를 꿈꾸기엔 아직 이렇다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건 회사 입장을 떠나 내 입장에서도 그렇다.


나는 여기에서 내가 무언가를 부러뜨리거나 무언가가 부러지는 걸 보고 싶진 않다. 명료한 지점은 지향하겠지만 내가 쥔 작은 나사들을 힘있게 밀어넣을 수 있는 작은 드라이버를 생활에서 챙겨오는 걸 보고 싶다. 앞으로의 커리어는 작은 홈에 집중하는 일들에 달렸다. 굽은 허리와 목, 말린 어깨를 한 번씩 펴주며 숨을 깊게 쉬는 것만으로도 성가신 일들에 곁을 내줄 수 있다. 나의 자세와 호흡을 내가 한 번씩 다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나는 내가 팔로업합니다
추신, 안녕하세요. 만물박사 김민지입니다. 추석 잘 쇠셨나요. 한동안 좋아하는 음악도 못 듣고 지냈는데 추석을 맞아 집으로 내려가던 기차에서 듣게 된 곡을 레터 끝에 두고 가요. 살아생전 텃세를 부릴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이동수가 많은 인생이라 이 곡의 가사가 더 와닿더라고요. 뮤비와 함께 보시면 더 좋을 거예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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