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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May 17. 2021

삶 | 받은 햇살을 푸른 가지로 돌려주는 일

선아의 삶


✨무소속 3개월

✨문래역

✨삶





연필을 쥐고 글 써본 때를 더듬어본다. 연필은 다른 필기구보다 느리며 불편하고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사용할수록 심이 무뎌져 적당한 때에 다듬어야 하고, 육각 몸체를 손에 익숙하게끔 만들려면 시간도 필요하다. 너무 힘을 주면 심이 뚝 부러져버리고 힘을 주지 않으면 연필을 놓치거나 글씨가 옅어진다. 연필을 쥐고 쓰는 것이 중요할 뿐 어떤 종이에 쓸 건지는 이미 정해진 경우가 많다.


선아는 종이 위에 연필심을 세우고 있던 시간이 긴 사람이다. 선뜻 무언가를 쓰기보다는 연필을 쥔 채 어떤 종이가 적당한지 고민해왔다. 한 음절씩 적어야 하는 국어 노트, 4선이 그려진 영어 노트, 5선에 맞춰 넣어야 하는 음악 노트 등은 맘에 드는 자리가 없거나 부족했다. 때론 선 하나만 있는 노트를 택하기도 하고 모눈으로 이뤄진 노트를 고르기도 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선아는 하나를 택했다. 어떤 선도, 칸도, 경계도 없는 무지 노트를.


백지는 틀에 맞지 않는 생각과 정체성을 털어놓기 제격이었다. 그 안에서 선아는 글을 쓸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고, 혼자 즐기기도 친구를 불러 같이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더는 연필을 들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누구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을 써 내려가자, 금세 다음 장으로 넘길 만큼 꽉 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맘에 드는 공간에서 또박또박 자신을 적어가는 선아를 만났다.






계속 넓어지고 깊어지며 선명해지는 
홍선아입니다.




지금의 나를 키워드 3개로 표현해볼까요?

선선, 경계, 확장이요.


제가 느끼기에 선아님의 키워드는 추상적인 단어들이에요. 세 가지를 꼽아주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저 자신에 대해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게 버릇이에요. 글에서도 명확하게 표현하기보다 추상적으로 얘기하기를 택하죠. 이제는 고치려는 부분이에요. 변명해보자면 그렇고요(웃음).

‘선선’은 제 필명이에요. 올해 <분노의 글쓰기 클럽>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글을 쓰면서 내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걸 들은 동무분이 ‘선명해지는 선아, 선선’이라고 해주셨고 마음에 쏙 들어서 필명으로 삼았어요. 당장 재밌어하는 게 글쓰기라 이 키워드를 고른 것 같아요.


‘선선하다’의 어근인 줄 알았어요. 줄임말이군요.

선선이라는 필명으로는 제가 가진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어요. 어쩌면 영영 숨길 수도 있을 부분들이요. 사회에서 소위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분에 대해서만 공개하고 그 외에는 숨기고 또 숨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저는 숨기고 싶지 않아요. 사회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기준이 있다면, 그전까지 저는 항상 그 경계에 서 있었어요. 그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을뿐더러, 맞추려 하는 만큼 저 자신은 흐려지고 있었고요.

필명을 쓰고, 글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때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 글을 통해 저와 닮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었고요. 그게 또 새로운 용기로 이어졌죠. 저로 온전히 존재하며 이야기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계속 이렇게 선명해지고 싶어요. 누군가로부터 내가 발견되고 또 내가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이 좋으니까요.


숨길수록 내가 흐려진다고 표현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나를 오롯이 드러내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춰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러지 못하잖아요.

안전한 커뮤니티 안에서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런 압박감을 덜고 더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뭉뚱그려 써놓는 글 있잖아요? 모든 맥락을 알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밖에 못 썼어요(웃음). 저는 경계에 서 있으니 한가지 관점으로만 생각할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도 언제든지 틀린 것이 될 수 있다고 여기죠. 그러다 보니 글로 저를 드러내는 건 더더욱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용기가 생겼어요. 언제라도 퇴고를 통해 고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제가 인식하는 세계를 계속해서 확장하려는 욕구가 자연히 늘어났어요. 확장이라는 키워드는 이런 의미예요.




글쓰기에 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안전한 공간에서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했다고요.

사실 오래전부터 큰 두려움이 있어요. 남에게 망신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죠. 친하게 지내던 애들에게 돌연 왕따당한 적이 있거든요. 여러 번,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 앞에서 비난받았고,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놀랍게도 저 또한 학교 폭력 당한 경험이 있어요.

어쩌면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버릇일 수도 있겠어요. 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친구들에게 내가 이런 트라우마가 있어서 강박적인 행동을 해, 이런 나를 이해해줘, 하고 설명했거든요. 그 버릇이 대학생 때까지 이어졌는데요. 뜻밖에도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더라고요(웃음)?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저를 아끼고 좋아해 줬어요. 덕분에 이어폰으로 소리를 막지 않으면 밖에 다니지 못하는 건 많이 나아졌죠. 물론 아직도 ‘언제고 비난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있기는 하지만요.

저는 숨기보다는 성장하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서, 안정적으로 지내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험이 여전히 필요해요. 저는 <빌라선샤인>과 거기서 파생된 소셜클럽들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있어요.


대학 때 만난 친구들 얘기도 해주셨는데요. 그들에게서 어떤 게 좋았어요?

대학 친구들은 치어리딩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이때 같이 뛰었던 친구들이 제게 ‘파이팅 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죠. 모두 지칠 즈음 다 죽어가면서도 혼자 악쓰며 파이팅을 외치면 친구들도 곳곳에서 같이 파이팅을 외쳤어요. 서로 으쌰으쌰 하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죠.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제가 파이팅 넘치는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을 응원해주고 싶고, 같이 잘해보자고 말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제겐 큰 전환점이 된 경험이었어요. 과거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하게 됐고요. ‘네가 그 전에 어떤 학교생활을 했든 상관없어. 지금 우리는 너무 잘하고 있고 좋은 동료이자 팀이야’라는 태도로 저를 대해줬으니까요. 가끔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 치어를 할 건지’ 친구들과 얘기해요. 신체적으로 너무 고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감정 소모하는 일이 늘어나서 힘들었지만, 저는 다시 할 거라고 해요. 너희를 만나야 하니까 또 할 거라고. 그 관계가 있기에 뭘 해도 길 잃어버린 듯한,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예전보다 적게 드는 것 같아요.


들어보니 치어리딩 동아리에서 겪은 일 자체가 찐하게 덕질하는 것과도 맞닿아있는 듯해요. 제게 덕질이 딱 그런 루트거든요. 깊게 빠지고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내가 이렇게까지 헌신하나? 싶을 정도까지 가보고, 어쩌면 정이 떨어질 때도 있고 너무 힘들고…. 비단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런 부분이 삶에 꼭 있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맞아요! 마침 그해 저희가 치어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어요. “11년 만에 1등이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다들 즐거워했죠. 그런 부분 때문에 애정이 더 생겼던 듯해요. 심지어 단체복까지 맞춰 입고 다니고 그랬거든요(웃음). 1등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뭉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목표는 1등이었을지언정 어쨌든 열심히 해온 시간이 있잖아요. 으쌰으쌰 한 덕에 좋은 성과를 냈으니까 감격한 거겠죠.

그래서 좋은 경험이었다고 여겨요. 지금 제 말투나 제스처도 대학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예요. 대학 생활 이전까지는 다양한 지역 말투를 들을 일이 적었는데, 지금은 완전 짬뽕이 됐어요. 서울말도 어디 말도 아닌 말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하는데(웃음) 저는 지금 제 말투와 제스처가 정말 좋아요. 친구들과 여전히 함께 있는 것 같거든요. 같은 곳에 있지 않아도 말이에요.





운영하시는 유튜브에 휴학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영상이 있더라고요. 이전부터 인지하고 계셨나 봐요. 내게 상담이 필요하고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걸. 그런데 가장 내밀한 영역에 있는 가족들이 그걸 해주지 못했다고요.

인간관계에 대한 트라우마로 불편함을 겪으니 상담을 받고 싶었죠. 학교 상담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서 정신과에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부모님께서 병원은 절대 안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학교 도서관에서 정신분석 관련 도서를 죄다 찾아 읽었어요(웃음).


전문가를 못 만나니까 책으로라도 알고 싶었던 거네요.

청소년 시기였으니까, 부모가 반대하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하지? 하는 부분을 책으로 가늠하는 수밖에 없었던 듯해요.

성인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정신과에 갔어요. 첫 진료 받던 날 기억이 또렷해요. 진단서에 적힌 질병 코드를 봤을 때 ‘아, 그게 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동안은 여러 상황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자신을 탓하기만 했거든요. 비로소 병과 나를 분리할 수 있었죠. 아파서 그렇다면 치료를 하면 되겠다고요.


얘기를 들어보니 유튜브 닉네임인 호수와 글쓰기 닉네임인 선선은 아주 다른 느낌이에요.

이것도 추상적인 저의 방식인데(웃음), 고등학교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에 ‘호’가 들어가요. 썩 마음에 들어서 ‘호’ 들어간 다른 별명을 고민해보다가 호수를 떠올렸어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서요. 거울이 명확하게 비춰주는 느낌이라면 호수에 비치는 모습은 흐린 듯 맑은 듯 계속 변화하죠. 수면에 비치는 모습이 다 다르잖아요.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들을 보니 저는 한 가지 닉네임, 계정을 꾸준히 쓰지 못하는 습관이 있네요. 주기적으로 계정을 갈아요.


이유가 있어요?

매 순간 시행착오를 겪는 자신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에요. 유튜브를 운영할 때는 영상 말미에 ‘당신의 눈에 비친 호수’라는 문장을 넣었어요. 지금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보고 있으니 알아서 생각하세요, 난 계속 바뀌니까 이런 느낌이었죠(웃음).


양가감정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알아봐 줬으면 좋겠으면서도 상대는 나를 영영 모를 거라는 마음.

저를 드러내고 싶지만 비난받는 건 무서우니까요. 오해하지 마, 나 또 변할 거야. 혹시 틀리면 고치고 나아갈 테니까 너무 가혹하게 하지 말아주라 하는 태도가 있는 듯해요.





음, 그런데 주기적으로 계정을 가는 게 나쁜 걸까요?

미란님은 어떤 편이세요?


저는 삭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모조리 삭제했었어요, 펑! 저부터 안 보는 거죠. 부끄럽다고 여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아깝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제가 어떻게 지나왔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온라인을 어릴 때부터 접한 세대는 과거의 기록을 흑역사라고 많이들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지우기 굉장히 쉬워진 시대고요. 동시에 갈무리를 제대로 못 하므로 그렇게 되는 면도 있지 않나 싶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거든요. 아주 드물게 그때 기록이 남았다면 지금 들춰봤을 때 어떤 마음일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다 지웠으면서도 미처 못 지워서, 지우는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남은 경우도 있어요. 블로그에 썼던 글들은 하나하나 지우기 너무 귀찮더라고요. 비공개로 쌓아두고만 있었는데 요사이 가끔 들춰보거든요.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워요. 과거의 제가 낯선 사람 같아서요. 요즘에는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내 기록을 남겨야겠다!


엄청난 변화 아니에요?

엄청난 변화죠. 그렇지만 아주 느리게 오는 변화예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요. 미란님도 어느 순간의 저를 보고 계신 거예요. 평소 저는 미래지향적으로 생활해요. 현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앞으로 뭐할지 더 골몰하죠. 가끔은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요. 지금의 저를 잘 모르니까 제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는데도 명확히 알지 못해요.

스트레스도 그래요. 그동안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곤 했어요. 스트레스의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새로운 자극으로 잊으려고 한 거죠. 올해 초에 식도염이나 위염으로 문제가 드러났어요. 겉으로만 보면 전보다 상태가 안정된 것 같지만 사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이때 알게 됐어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혹시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잘 살펴야겠더라고요. 그게 현재의 저를 기록해둬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이어졌어요.


그럼 일기의 방향은 무언가를 했던 것보다는 감정의 흐름인가요?

‘나 지금 이렇네’처럼 현재 상태를 기록하는 거요. 종종 주변에서 “선아는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취향도 확고하고 되게 멋진 것 같다, 자신을 잘 아는 것 같다”라고 말해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좋아하는 건 항상 바뀌잖아요. ‘그렇다면 진짜 나는 누구지?’ 싶더라고요. 고민 끝에 ‘진짜 나’는 그걸 말하는 시점의 ‘현재 나’라고 결론 내렸어요. 이제는 일기로 현재의 나를 파악하고 싶어요. 나는 누구인지, 무얼 하는 사람이며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동안 글 쓰는 '모닝 페이지'를 시도해봤어요. 사실상 일기예요. 오늘 뭐 할지 쓰는 것도 있고, 어제 뭘 했는데 좋았던 부분, 지금 신나는 감정 등의 내용이거든요(웃음). 제 감정이나 생각의 흐름을 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하루하루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다른 일에 신경 쏟느라 기록에 소홀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도전해보려고요.





우리의 방향을 결정 짓는 데는 내 의지도 있겠지만 순간순간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람들이 보는 나에 대한 것이 크다는 걸 많이 느껴요. 특히나 저는 그게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여기는 편이라 매번 정말 놀랍다고 생각해요.

뿅! 하는 순간들이 있는 듯해요. 그런 경험 덕분에 새로운 자극에 나를 더 노출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죠.

뉴먼 보름님이 진행하신 <직무탐색 워크숍>을 들었을 때였어요. 일할 때 추구하는 키워드를 알아보는 시간이었죠. 제 키워드는 목표 달성, 책임, 영향력 등이었는데요, 그걸 보고 보름님께서 “여기 참석한 사람 중에 누군가 나중에 대표가 된다면 그건 선아님일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때도 뿅! 가서 ‘나 대표가 될 상이구나(박수)’ 했죠.

실제로도 제가 원하는 역할이 앞장서서 뭔가 하는 사람이거든요. 영향을 미치는 사람, 매니징하는 사람이요. 보름님께서 마침 그걸 알아보시고 제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언어로 정리해서 말씀해주시니 확 꽂혔어요. 그런 뿅! 하는 순간들이 저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제게 부스터가 되어준달까?


친구분들이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알 것 같아요(웃음). 얘기 나누면서 선아님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으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원하는 게 뭔지,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환경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발을 빨리 들여놓잖아요.

저는 사람에 영향을 크게 받아요. 대학 친구들이 그랬고, 가족이 그랬고,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어주는 주변 동료들, 빌라선샤인 뉴먼들이 그렇죠. 멋진 사람을 발견하면 어떻게든 접점을 찾아서 다가가는 편이기도 하고요. 사실 글쓰기에 관심 가지게 된 것도 팀선샤인 지혜님 덕분이었어요.

빌라선샤인 시즌5 때 지혜님이 진행하신 <소셜클럽 기획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리소스를 잘 분배해서 체계적으로 커뮤니티를 기획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나도 저분처럼 잘하고 싶다, 진짜 멋있다, 이렇게 생각했죠. 마침 시즌6에 지혜님이 <주말 400자 글쓰기> 번개를 여시더라고요. 지혜님과 접점을 하나 더 늘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던 거예요. ‘공개적으로 글 쓰는 건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안전한 곳이니까 괜찮을 거야. 무엇보다 지혜님이 여시는 번개잖아!’ 하면서요(웃음).

4~5주쯤 진행했을 때였나, 뉴먼 지수님께 DM을 받았어요. 제 글을 좋아하신다고요! 다음에는 또 어떤 글이 올라올지 기대된다고요. 놀라웠어요, 저와 직접적으로 접점이 있던 분이 아니었거든요. 그동안은 제가 쓴 글을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 훨씬 커서 밖에 내놓질 못하고, 그나마 있는 것도 걸핏하면 삭제해버렸는데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좋아하는 책 《말하기를 말하기》의 한 대목 “기억해 넌 말하는 사람이 될 거야” 같은 순간이었어요. “기억해 넌 글 쓰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말을 들은 듯했죠. 나 글 써야 하나 봐! 왠지 나중에 글 쓸 것 같아. 자연스럽게 글쓰기라는 새로운 목표, 지향이 생긴 거죠.

뉴먼 세희님도 그래요. 커뮤니티에 올리신 자기소개와 포트폴리오를 봤는데 너무나 멋진 사람인 거죠. 저분 멋있다, 나도 저렇게 글 잘 쓰는 사람이 돼보고 싶다, 했는데 어느 날 세희님이 글쓰기 워크숍을 연다고 하시더라고요. 곧장 연락드려서 신청하겠다고 했죠. 접점을 만들어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해보니까 상상 이상으로 훨씬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가 쓴 글에 촘촘하고 따뜻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저를 지지해주는 글쓰기 동료들을 만나게 된 기회였어요. 그렇게 용기 낸 게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아요. 지혜님으로 비롯된 글쓰기가 세희님으로 이어지고, 지금은 <와우! 글쓰기 교실>까지 온 거예요.


뉴먼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듬뿍 받으셨네요.

네, 제겐 아주 소중한 경험이에요. 제 글을 내보였을 때 피드백해주는 일도 그래요. 이야기나 글 관련해 세세한 피드백을 받기도 하고, ‘수채화 같다’, ‘이 그림이 생각났어요’ 같은 피드백도 해주셔서 감동하는 일이 많았죠. 저는 제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못 하거든요. 이번에 <계간 홀로 8주년호>에 기고한 글을 친구에게 보여줬을 때 ‘파랑새 같은 글’이라는 평을 들었어요. 저 사람의 눈에 비친 내 글은 저렇게 예쁜 단어로 표현되는구나 싶어서 묘한 기분이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글을 쓰는 동기 부여가 돼요.

또 제가 닮고 싶은 레퍼런스는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이에요. 김하나 작가님은 말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계시고 책도 쓰셨잖아요. 저도 언젠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또 황선우 작가님이 러닝 하시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 러닝을 시작했거든요. 앞으로도 두 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마치 참고점처럼요.


언젠가 두 분을 추천하신 이유도 이렇게 알게 되네요. 선아님에게 더 각별한 이유!

두 분에게서 제가 닮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말은 하지 않으려 주의한다는 점이에요. 경험해본 것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옛날에는 그게 두려워서 공개적인 글쓰기나 말하기를 꺼렸지만 이제 글로도, 말하기로도 시작해버렸죠.

지금까지 해본 결과, 저는 앞으로 더 크게,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제 정체성을 바탕으로요. 결국은 대표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인정하기 민망하지만요. 그러니 공부밖에 답이 없어요. 제 목소리가 그만큼 힘이 생기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목소리여야 한다고 보니까요. 옛날에는 호수에 저를 투영했다면, 지금은 강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강물은 계속 흘러가잖아요? 어제의 한강과 오늘의 한강은 다르단 말이죠. 그처럼 계속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면 좋겠어요. 흘러가는 걸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사람. 누군가를 배제하는 말이 아니라 포용하는 말을 하고,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지는 사람이길 바라요.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가진 역량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고 데이터를 쌓으며 더 큰 그림을 구상하는 시간이에요.


저는 무소속 시간이 걸림돌이나 단절된 것만은 아니겠다고 확신해요. 어떤 사람과 지내느냐가 중요할 텐데요.

그렇죠. 저도 무소속이 고립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무소속으로 지내기 때문에 소셜클럽 7~8개를 하고 지낼 수 있죠(웃음). 엄청 즐겁고, 바빠요.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병행하면서 이직 준비를 하는 데에 부담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즐거움에 혼란스러워질 때도 있었어요. 이 고민을 한 뉴먼분께 털어놨더니 ‘선아님은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계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정확히 맞추신 거죠. 멋진 레퍼런스가 되어주는 수많은 여성과 도모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재미있어서, 나는 이걸 안하고는 못 배긴다! 지금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계속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저는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있어요. 제가 가진 영향력으로 타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직장에서든, 직장 외에서든 그 일을 누구보다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어요. ‘파이팅 걸’이라는 별명과도 이어지는 지점이죠.

지금 상태에 부담감을 제하면 꽤 만족스러워요.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식을 실험하는 시간이라고 여기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어요. 물론 일해야죠. 일 경험이 더 쌓인다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질 거로 예상해요. 그래서 꾸준히 이직 준비, 구직 활동을 하고 있고요.


거창하게 뭔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게 의미 있고, 누군가에게 미약하나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나기를 선호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이 있죠, 내가 뭘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내가 어떤 사람을 질투하는지 보라는 말이요. 저는 저보다 말에 힘이 센 사람을 질투해요(웃음). 그게 질투가 나고 참 부럽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저를 부정했어요. 부끄러웠거든요. 내가 뭐라고, 인플루언서도 아닌데. 그럼 뭐 인플루언서라도 하겠다는 거야? 하면서. 이제는 왜 안돼? 하지만요.

유튜브를 하면서 제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때 보람을 느낀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걸로 돈 버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게 마케터였어요. 마케팅해야겠다, 사람들에게 영향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다짐했어요. 그때가 대학 4학년, 대학원에 갈 준비를 하며 실험실 인턴 생활을 할 때였는데, 되려 대학원을 안 가기로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일도 선아님에게 분기점이 되는 거군요.

그때 제가 하던 실험은 전체 과정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일이었어요. 각 파이프라인에는 식물에서 특정 성분을 발견하고, 체내에 흡수가 되는지, 인체에 유용한지 등을 확인하고 공정을 거쳐서 상용화하는 과정이 포함돼있었어요. 하나하나 무척 중요한 일이죠.

원래 꿈은 제가 연구한 성분이 상용화되어서 그 상품들이 소비자에게 도움 되는 거였어요. 하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유용성과 안정성을 검증해야 하고, 그러려면 아직은 동물 실험을 거쳐야 하더라고요. 과연 이게 의미 있나? 내가 떳떳할 수 있나? 나는 단순히 자기만족만 원하는 게 아닌데, 어딘가에 더 기여하고 싶은데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제가 그 실험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도 파이프라인에 속해있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아무리 재미있는 연구를 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 정도로 연구자로서의 재능이 대단하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그즈음 선배들에게 대학원 가면 그쪽 일밖에 못 한다는 경고를 듣기도 했어요. 제 기준에서는 그게 제약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도 저는 유튜브를 포함해 틈틈이 다른 활동들을 병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실험실에는 퓨움 배출 후드(Fume hood)라고 독한 화학 약품이 공기 중에 퍼지지 않게끔 빨아들이는 기계가 있었어요. 주방용 후드처럼 그 모터 소리가 어마어마한데, 나중에는 그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빨리 뛰고 힘들어졌어요. ‘이 일이 나와 안 맞네, 안 되겠다’를 그때 알았죠. 그래서 대학원 진학 생각을 정리했어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여기는 게 있나요?

지나온 모든 것이요. 10대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너희는 대기만성이야”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때는 내 새끼니까 좋은 말하는 거지, 하며 괜히 거부감이 들었어요. 당장 눈앞이 캄캄하니까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저는 정말 대기만성이더라고요? 남들보다 느렸지만, 시간과 데이터가 쌓이며 착실하게 꾸준히 성장해서 지금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대학 때 한 강의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요. “여러분, 대기만성을 믿으세요? 저는 믿습니다.” 종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것을 ‘믿는다’고 말씀하신 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말을 곱씹을수록 그래, 안 될 것도 없겠다 싶어졌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기로 했어요. 저는 대기만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선아님을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soosunnaa/



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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