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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May 20. 2021

취향 | 부서진 조각이 무기가 될 때

수정의 취향


✨무소속 2년

✨교대역

✨취향





칠교라는 놀이가 있다. 정사각형 평면을 일곱 조각 내어 다양한 모양으로 조합하는 방식이다. 조각은 각기 다른 크기의 삼각형 6개, 평행사변형 1개로 구성돼있다. 가짓수가 적고 룰이 단순함에도 만들 수 있는 모양이 1만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칠교를 삶으로 비유해 얼개가 되는 큰 조각들로 삶을 구성하고 작은 조각들로 취향을 다듬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취향은 자잘하되 뾰족한 모양일 거다. 관심 가서 호감이 되고, 홀려서 몰입하는 무언가니까 말이다. 아무리 자잘하더라도 차곡차곡 붙여나가다 보면 어떤 형태가 그려지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주 또렷하게.


알다시피 취향이 곧 나는 아니다. 허나 취향이 선택 기준이 되어서 내 삶을 구성하는 건 분명하다. 어린 시절 인형이나 스티커 옷 입히기를 좋아하던 수정이 자라서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며 나아간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는 모양으로 살아가고 싶은
박수정입니다.





덕질하는 게 있나요

요즘 주로 애니에 푹 빠져 있어요. <귀멸의 칼날>과 <하이큐!!>라는 작품인데요. 한동안 거의 관심 없던 분야에 이렇게 빠질 수 있다니 얼떨떨하고 기뻐요. 좋아해서 마음이 들뜨는 게 오랜만이거든요!


덕질할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에요?

열정적이다, 끝장 본다, 생기 있다.


수정님은 취향과 덕질을 어떻게 구분하세요?

답변하려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두 단어가 비슷하게 여겨지더라고요. 그래서 단어의 뜻을 찾았더니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쏠리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고 설명돼있어요. 취향이 더 넓은 범위이고 그 안에 제가 덕질하는 것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해요. 즉 취향 안에 속한 덕질 대상들 각각이 제 취향을 가리키는 거죠. 뭔가를 볼 때 제가 떠오른다면 그게 제 취향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해요.


오감 중 어떤 감각을 중시하는 편이에요?

시각이요! 아무래도 보는 눈이 중요한 직군으로 취업을 희망하고 있어서 시각을 중요시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직군이에요?

과거에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텍스타일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계속 패션디자인이 하고 싶은 거예요. 졸업 후 재봉학원에서 의류기사, 양장기능사 자격증 같은 걸 따려고 했어요. 텍스타일 전공 졸업자라 기사 시험을 치를 조건이 되더라고요. 패션전공은 아니어도 자격증이 있으면 옷을 만드는 곳에서 일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학원을 몇 개월 다녀봤더니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작업하는 과정이 모두 수치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정말 꼼꼼해야 하고 조금만 오차가 생겨도 핏이 달라지거든요.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부분이 커서 재미를 못 느꼈어요. 디자인,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것만 보고 패션디자인은 이럴 거라고 상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닌 거죠. 직접 해보고 나서야 내가 꿈꾸던 것과 현장은 다른 걸 알게 됐어요.


시간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학교에 다시 가고 싶어요. 디자인 분야뿐만 아니라 미술, 예술을 폭넓게 배워보고 싶어서요.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맛집이나 멋있는 가게를 알아가는 것도 즐겁겠네요. 새로운 환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걸 더 깊게 알아가 보고 싶어요.

‘인생 한 번뿐인데 돈을 모아서 1년 정도 해외에 살다 올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대학생 때 어떤 기회로든 2달씩은 일본, 중국 등 해외에 있어 봤어요. 머문 지 한 달쯤 지나면 향수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고 싶기도 했지만, 계속 새로운 걸 만나는 그 상황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래서 1년 정도는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젠가는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다시 돈으로 돌아가죠. 돈을 벌어야겠다(웃음).


13살 무렵의 내가 재밌어하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학교에서 화재 예방 포스터 대회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다 집에 가도 혼자 남아서 포스터를 완성했던 기억이 나요. 아, 그리고 만화를 즐겨봤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만화를 계속 좋아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던 것 같아요. 지금 다시 좋아하게 되었네요(웃음). 뭐든 보고 관찰하고 그리는 그 시간을 좋아했어요.


영향을 많이 받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가 있나요?

저는 창작할 때 뭘 보기보다 사소한 걸 보고 그리는 편이에요. 제가 처음 배운 미술이 정물이에요. 그전에는 아동 미술 하다가 수채화를 정물로 배웠어요.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꾸준히 하다 보니까 정물 소묘가 정말이지 좋더라고요. 사물을 관찰해서 디테일한 특징들, 예를 들어 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부분들에 집중해서 하나를 그려내는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어렸을 때는 딱지나 스티커를 모으셨다고요아바타 스티커라면 옷 입히는 건가요?

어릴 때 신체 모양 스티커 위에 옷 모양 스티커를 붙여서 꾸미고 노는 게 유행했잖아요. 그걸 그렇게 모았어요. 엄마 스카프 같은 거로 옷 칭칭 감아서 인형 놀이도 지독하게 했는데… 그런 걸 좋아했어요, 옷 입히기.


단순히 스티커를 모으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옷과 관련이 있네요비슷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렇게 되네요! 아래위로 5~6살은 같이 학교 다녔던 세대니까 비슷하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나가 초등학교 1학년이라면 누군가는 고학년이긴 해도, 보고 듣는 것들은 똑같으니 같은 걸 공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그리고 생년 앞자리가 9로 시작하면 비슷한 감성이지 않을까 해요.


중고등 학생 때는 가수에 빠지셨다고요

제일 처음에 좋아한 그룹은 FT아일랜드였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 데뷔했는데, 잘생긴 멤버로 구성된 밴드라고 해서 유명했죠. 그때는 막연히 좋아한다는 마음이라 본격 덕질은 중학교 가서 시작했고, 저는 빅뱅을 좋아했어요. 특히 지드래곤이 옷도 잘 입고 화려하잖아요? 제가 옷, 패션을 좋아했기 때문에 정말 멋있어 보였죠. 돈을 모아 차 대절 신청해서 처음 간 게 빅뱅 콘서트였어요. 학생 때였는데 친구들이랑 새벽에 갔다가 새벽에 왔죠. 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어머니가 보내주시긴 했어도 속으로 무진장 걱정하셨을 거예요.


다음은요?

한창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할 때거든요. 박유천을 좋아했어요. 친구가 드라마가 너무 재밌다고, 제발 한 번만 보라고 추천해서 보기 시작했죠. 드라마 덕분에 이 사람이 누군지, 어떤 그룹인지 알아가다 보니 JYJ, 동방신기에게 다다랐어요. 이게 참, 사람 일이 어찌 될지 몰라요(웃음).

그러다가 고3 때 엑소를 좋아하기 시작했죠. 엑소 데뷔할 때는 100일 티저가 있었잖아요. 친한 친구들이 손꼽아 데뷔를 기다리던 그룹이었어요. 그때도 친구가 저더러 너무나 좋다고 같이 하자며 각 멤버들을 설명해줬죠. 재밌는 건 제가 제일 늦게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제일 오래 엑소를 좋아했어요.


친구의 영향으로 영업 당하고 꽤 오래 좋아하신 편이네요

저는 좋아하면 깊게 파고 오래 가는 편이에요. 입덕이 2013년부터니까 올해로 9년 맞죠? 엑소는 8~9년 정도 쭉 좋아하고 있어요.


친구들과 덕질 얘기하면서 화력이 불타오르잖아요하나둘 탈덕하는 걸 보면 나도 이제 접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것도 같은데.

저는 뭘 좋아하면 장작, 땔감만 있으면 뭐든 태운다고, 다 연소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태우는 것밖에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누가 뭔 말을 해도 내가 좋으면 그만이죠. 제 마음이 다 해야 끝이 나요.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즐거움은 혼자 하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밖에 없어요. 끊임없이 좋아하는 것에 관해 얘기할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너무 좋죠. 사실 같이 덕질할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오래 좋아했던 것 같아요. 나랑 같이 움직일, 실행력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던 거죠. 그 친구들과 밤샘하고, 티켓 없이 시상식 간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중 한 친구와 애니를 같이 파요. 뭘 좋아하면 서로 “너만큼 좋아하는 것에 열정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서 네가 제일 최고다”라고 할 만큼 에너지가 어마어마해요. 아무리 친하더라도 취향은 다 달라서 덕질을 같이 하기 힘든데 이 친구와는 다시 덕질에 접점이 생겨서 신기해요. 종종 친구들이랑 어떻게 같은 그룹을 좋아했지, 이렇게 성향이 다른데? 라는 이야기를 해요. 엑소가 참 대단했죠.


저는 덕질 친구를 주로 온라인에서 사귀는 편이라수정님의 실제 친구가 덕친인 게 신기해요.

항상 신기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린 거라. 덕친이 곧 실친이니까 아쉬운 점은, 이제 각자 다른 판으로 떠나거나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아서 온라인상의 친구가 별로 없어요. 트위터에서 친구를 사귀고 친하게 지내는 분들을 보면 저도 트친을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해요.

저희는 이미 만났잖아요. 생각해보면 직접 만난 건 거의 처음이에요. 언젠가 트친을 콘서트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잠깐 인사하고 헤어진 정도였거든요. 너무 외로워서 계정을 만든 거예요. 좋아하는 얘기를 같이할 사람을 찾고 싶어서. 저는 직접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트친을 직접 만난다는 데 제약이 있어요. 제가 서울 아닌 지역에 사는 점, 덕질하는 그룹이 비활동기인 점 등…. 만나면 어색하겠다는 점보다는 제가 다가가는 속도가 빠를까 봐,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하곤 해요. 그간은 친구들과 이야기해왔으니까 초면인 사람과 선을 어디까지 지켜서 대화해야 할까 하는 부분이 고민돼요.





수정님 덕질 역사에서 최장기간 좋아한 가수이기도 하고희로애락을 다 경험한 대상이기도 해서 엑소가 각별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사실 엑소는 덕질 대상 그 이상의 의미였어요. 제20대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고 어떤 경험들은 엑소를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있어서 참 즐거웠던 시간이자 감사한 시간이에요. 언제 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싶고요. 같이 좋아했던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 참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제는 감정이고 뭐고 다 사라졌어요. 물론 노래 나오면 듣고 응원하려 하지만, 너를 믿는다기보다 ‘네가 지금 하는 것만 응원한다’는 마음이죠. 내가 믿는 사람은 기획사가 만들어낸 허구이고, 개인은 아예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돌 덕질이 사실 이상한 사랑이잖아요. 팬이 돈을 내면서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게 때로 기이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아이돌 산업은 노력한다고 사랑받거나 성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봐요. 이미 시스템이 만들어져있고 소위 착즙적이라 부르는 팬들의 굉장한 사랑을 갈아 넣어서 어떤 성과를 만드는 형태죠. 스트리밍, 1위 투표, 공개방송 응원이나 콘서트처럼 기본적인 데서부터요. 프로듀싱은 소속사에서, 플레이는 아이돌이 하더라도 아이돌의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주는 건 팬이에요.


요즘 팬덤은 과거와 비교해 소비자 마인드가 훨씬 강해요아이돌은 직업이고팬서비스가 비즈니스인 걸 알죠그러면서도 긴밀히 연결된 감각을 원해요.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와 관련된 것을 모으면서 너와 한 발 더 가까워진다는 감각을 느끼는 거 아닐까요? 남보다는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랑을 쏟고 돈을 쓰는 거지, 남보다 먼 사이라고 인지하면서 어떻게 그런 애정과 시간, 돈을 쓸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마저도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의미가 없어졌어요(웃음). 팬들이 만들어준 브랜드 가치 부분을 제하고 아이돌 본인이 개인, 그룹의 성취로만 본다는 걸 여러 사건으로 깨달았어요. 정말 나 혼자였구나, 내가 좋아서 한 거였구나, 정작 그를 위해 했던 일들이 그에게는 쌓아온 커리어 중 하나에 불과했구나.


수정님이 착즙형 사랑이라고 표현하셔서 동감했어요

이젠 좋아하던 노래도 못 들어요. 무대를 보면서 추억팔이도 못 하고요. ‘몇 년 전 나는 왜 이것들을 보면서 행복했을까, 지금 내 행복은 어디로 갔을까, 영상은 똑같은데.’


예전에는 그럴 때 망한 덕질이라며 자책하기 일쑤였는데이제는 망한 덕질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과거에 쓰던 계정을 봤더니 마지막 트윗이 2018년도더라고요. 글이 너무 행복해서 우는 거 있잖아요? 그 앓이들이 여기 다 남아있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좋아했구나, 어떻게 사진 한 장에 사람이 이렇게 행복해할 수 있지? 싶었어요. 아우, 내가 이만큼 사랑했네.

제가 좋아한 구 오빠들은 이제 소환할 수 없어요. 진짜 나 똥손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애들마다 지뢰라고, 추억거리도 되지 못할 사람을 내가 좋아했다는 게 너무…. 이제는 실존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좋아해도 위험 요소나 큰 변수가 없는 거로요.


좋아한 마음은 잘못이 없어요같은 방향으로 걷는 줄 알았더니 각자 딴맘인 줄 알아서 이제 같이 갈 수 없을 뿐.

그렇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난 최선을 다해 좋아했고 그게 행복했는데, 걔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잖아요. 좋아하는 내 마음은 죄가 없죠. 저는 엑소를 좋아하면서 멤버마다 좋아하는 감정이 다를 수 있고, 동시에 좋아할 수 있단 걸 알았어요. 여러 멤버를 각자 다른 포인트로 두루 좋아하되 그 애정이 똑같지는 않다는 걸요. 한 그룹을 좋아한다는 건 개인 팬이 아닌 이상 동시에 여러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점점 건강하게 덕질하는 방법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되죠

그런 거예요, 그 돈 모아서 유럽 여행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하나하나 겹쳐서 쌓아놓은 것이 여행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사소한 행복을 선택할 것 같은 거죠. 뭉쳐놓으면 큰 뭔가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조차 뭔가 해봤을 때 내 생각보다 크게 기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최근에 제가 제일 크게 플렉스 한 게 아이패드니까 이것과 비교해보면, 140만 원짜리 기계를 사도 행복하지 않다는 데서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때 알았죠. 난 1만 원 쓰고 행복한 삶이 소중한 거구나. 요즘도 친구들과 굿즈를 사느라 5만 원을 쓰고 나서 100만 원짜리 산 것처럼 행복한 거예요. 굿즈를 쳐다보고 있으면 계속 웃음이 나오잖아요. 그걸 왜 굳이 다른 것과 바꿔야 하는 건지. 그게 더 의미가 크다면, 그게 더 큰 기쁨이라면 그 방향이 맞는 건데. 허황한 거라도 작은 것을 삼으로써 내 일상에 버팀이 되고 기쁨이 된다면 가치 있는 일 아닌가요?     


자기만의 논리를 가지고 내가 제대로 설 만큼의 건강함만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는 듯해요누굴 해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잖아요.

아이패드를 사고 나서 느낀 게 진짜 많아요. 거의 몇 년을 살지 말지 고민했단 말이에요. 필요하긴 한데 100만 원 이상 되는 돈을 한 번에 쓴다는 게, 설령 돈이 있더라도 제겐 큰 부분이었어요. 그 돈으로 여행을 간다면 몇 박 며칠을 머물 수 있는데 기기 하나를 사기 위해 두어 달 모아둔 돈을 쏟는다…. 그러면 그만한 행복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사고 나니 그저 산 거, 물건을 얻었다, 거기서 끝이더라고요. 나는 돈 벌어서 이런 거나 사는구나, 산 데서 끝이구나 했죠.


그런 기분이 든 건 왜일까요?

쓸모와는 조금 다른 만족감을 기대했던 것 같아요. 물론 아이패드를 쓸 때마다 잘 샀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큰 행복감이 느껴지진 않아서요. 오히려 차가 더 좋았어요. 차는 산 게 아니라 거저 생겼는데도 그 기쁨이 더 컸어요. 남들 보기에는 별로인 것도 내겐 큰 행복일 수 있구나. 남들에게 괜찮은 거라도 나한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구나. 그런 걸 알아가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아는 일이 중요하겠다나는 휘둘려서 살면 분명 후회할 사람이다 싶었죠.





사진 찍는 것과 여행하는 걸 좋아하시죠사진은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예요

사진은 기록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기록된다는 게 좋아요. 특별한 것도,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데 기록하고 싶은 것도 찍어요. 길을 걷다가 계절이 바뀐 모습이 보여서 찍었는데, 시간이 흐른 뒤 같은 장소를 지나가면서 또 찍는 거죠. SNS에 업로드 하다가 우연히 떠올라서 겹쳐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같은 장소에 서 있는데 배경도 감정도 다르다니. 그래서 누군가의 눈에는 아주 예쁜 사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왜 찍었는지 알잖아요. 찍을 때의 감정도 피어오르고, 글과는 다른 면으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매개라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다만 잘 찍는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잘 찍는다는 건 어떤 거예요

자연스러움이요! 진짜 나답게 나오고 내가 본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친구들의 모습도 그렇고, 사물이나 풍경도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사진을 좋아해요. 상대가 예쁜 사진을 원하면 예쁘게 찍어주려 노력하는데 내가 보는 시각 그대로 나왔을 때 제일 좋죠. 그래서 누가 제 사진을 찍어줬을 때 저답게 나오면 정말 좋아요. 내 얼굴과 표정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조금 손대는 정도로 보정하는데도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 아쉬워요. 차라리 그대로 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의 얼굴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이제 다시는 나에게서 찾을 수 없는 얼굴이잖아요. 가끔은 너무 못생기게 나와서 올리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도(웃음) 나중에 보면 재밌어요.


요즘은 핸드폰특히 앱으로 사진을 찍곤 하니까 과거와 현재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기 어려워요(웃음).

어릴 때 앱을 너무 많이 써서 지금 보면 ‘누구야?’ 싶어요(웃음). 그래도 보정 어플 덕분에 시도해본 일화도 있어요. 금발이었을 때 앱으로 보정하다가 핑크랑 오렌지 투톤이 맘에 들어서 염색해봤어요. 친구가 저를 보고 말하길 멀리서 형광색 사람이 걸어오더라고, 염색했다는 얘기는 들었음에도 너무 형광이라서 이대로 뒤돌아서 갈까 고민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 친구는 자기 생에 그런 색으로 염색한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며 놀랐어요.

염색하고서 성격도 살짝 바뀐 듯해요. 색이 워낙 튀니까 사람들이 줄곧 쳐다봤어요. 개중에는 낄낄거리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그렇지만 상관하지 않았어요. 그 말과 태도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한 거잖아요. 저는 떳떳했어요.


염색으로 인해 좀 더 외향 인간이 됐나요?

희한해요. 헤어스타일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옷 입는 것부터 태도도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격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머리를 한 번 바꿔보길 추천해요. 긴 머리를 짧게 잘라보거나 안 해본 색으로 탈‧염색해본다거나. 그거 하나만 바꿔도 내 모습이 아예 다르게 보여요.

저는 머리에 미련이 없어요. 목적만 있을 뿐이죠. 염색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기르겠다, 파마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기르겠다 하는 거지, 긴 머리가 잘 어울려서 기른다는 건 없었어요. 가끔 단발하면 죽을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나 돈을 들여서 항상 같은 스타일로 유지하는 사람들 있죠? 순수하게 궁금해요. 변화가 확 느껴지지 않으면 돈 들인 가치가 없지 않나? 왜 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들이지?

두루두루 스타일링 해보면서 이젠 예전보다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한번은 신나게 볶아보고 싶어서 기르고 있는 상태인데요. 그다음에는 다시 짧게 자를지도 모르죠. 거의 미는 수준인 숏 컷이나 투블럭 컷에 파마한 스타일도 좋을 것 같아요.


헤어스타일 얘기를 들으면서 수정님은 몸 전체를 도화지처럼 쓰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가장 잘 보이는 도화지.

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 시기가 있는 듯해요. 한창 염색할 때 정말 재밌었어요. 머리를 그만큼 길러본 것도, 긴 머리를 금발로 탈색한 것도 처음이니까 다들 아깝다고 했죠. 그 머리를 왜 탈색했느냐고요. 하고 싶어서 했고 제 눈에 그 모습이 예뻤어요. 대신 두피는 희생했지만요. 하기 전에는 언뜻 큰일 같아 보이지만 해보면 큰일이 아니거든요해보지 않은 것들을 깨어가는 묘한 쾌감이 있어요.


조금 전에 그러셨잖아요하고 싶어서 한 거라고뭔가 선택할 때 수정님은 내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한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스스로는 재고 따진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할 때 하고 싶은 것만 콕 집어했던 것 같아요. 마무리는 안 될지 몰라도,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내가 이걸 하고 싶어, 해야 해, 할 거야, 가야 해, 하는 거예요. 뭔가 시도할 때 주저함은 없어요.

다만 가끔 버거울 때 스트레스 조절이 안 되곤 해요.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고민되긴 한데 그런 걸 따지기엔 나에게 오는 기회들이 그리 많지 않잖아요. 일단은 해보고 적당히 하는 거, 내가 크게 만족하지 않아도 마무리까지 할 수 있는 그 정도로만 나를 써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에 20대를 씨뿌리는 시기로 비유하며 그래서 청춘이라는 말에는 봄이 들어있다고 설명한 대목이 있어요결과물을 바라고 하기보다는 이것저것 해보면서 나를 알아가는 중요한 시기라는 걸 알자 저는 다음 지점으로 넘어올 수 있었어요수정님 얘기를 들으니 그 말이 떠올랐어요.

이렇게 하고 싶은 걸 하면 좋은 점은 원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원이 남으면 계속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안 했으니까 치워’가 안 돼요. 그런 부분을 안 만들기 위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은 하는 편이에요. 

이런 제 모습이 좋은데, 꾹 참고 하나를 꾸준히 해서 조금 빨리 결과를 얻는 걸 보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지금 직장 생활 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래요. 얘길 해보면 친구들은 오히려 너무 일찍 그 단계에 도달해버려서 이걸 계속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게 고민이더라고요. 취업 하나만을 위해 달려와 막상 해보니까 업무는 끝없고, 눈뜨면 회사 가고, 때 되면 월급 받는 일의 연속이라면서요. 한 친구는 벌써 후임도 있는데 너무 피곤하다고 해요. 그렇게 바라던 결과를 얻었는데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게 뭔가 싶더라고요. 저야 친구가 얼마나 힘들게 취직했는지 알고, 정작 제가 그런 걸 바라는 상황이라, 만약 내가 이룬다면 매일매일 기쁠 것 같은데 현실은 다르구나 싶죠.


아이패드와 비슷하지 않을까요그걸 해냈다고 해서 마냥 기쁜 게 아니라그걸 통해서 내가 무언갈 하기에 기쁜 거잖아요저기까지가 골이라고 여기면 이뤘을 때 오히려 허무해지는 것 같아요

친구는 취업을 고려해서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했어요. 국어와 영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요즘은 글을 써보고 싶다고, 요즘에는 클래스가 많으니 하나 들어보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볼 때 글과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거든요. 딱 문과 감성! 그래서 그걸 어떻게 참고 전공했느냐고 물었더니 해야 하니까 했다고 답하더라고요. 그때 ‘네가 나보다 어른 같다, 나는 맘대로 해왔는데 너는 참아야 할 때 잘 참아서 나보다 더 큰 어른이 됐구나’ 했어요.





지금 무소속으로 지내고 계시잖아요.

제가 원한 무소속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해보려는 상태예요. 마침 최근에 제안을 받아 로고 작업을 했어요. 지인의 카페 로고 디자인을 해주고, 이런 걸 하고 있다고 SNS에 올렸더니 아예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단가부터 시작해 돈은 어떻게 받고 어떻게 조율할 것이며 레퍼런스 작업 등은 어떻게 할 건지 막막해 스트레스가 컸어요. 만약 실수로 제가 어떤 디자인과 유사하게 만들었을 때 이 부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까지 고민해봐야 했거든요. 일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 부분을 미리 알고 대처할 텐데 ‘이런 것도 생각 안 해두고 있는데, 무조건 창작물만 만들어서 돈을 받고 팔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조금 겁이 나요. 궁금한 걸 물어볼 곳이 없어서요.


그런 풀이 간절한 거네요지금 당장은.

그런 것 같아요. 그게 뭐든, 내가 모르는 뭔가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회사에 들어가면 돈 벌면서 제가 모르는 부분들을 배울 수 있을 테니 취업을 희망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잘하고 싶은데 뭘 잘할 수 있을까, 난 어디에 쓰임이 있을까. 뭔가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어디 가서 일해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내가 가진 능력을 골고루 사용하고, 쓸모 있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이어져요. 누가 딱 여기 지원하라고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원하는 보수와 제가 원하는 작업물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알려주면 정말 좋겠어요(웃음).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에요. 동시에 1인분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일인지 알게 해준 시간이죠.


이 시간이 본인을 알아가거나 취향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걸림돌이 되나요?

저는 무지하게 도움 된다고 생각해요. 하루가 저에 의해서제가 하고 싶은 대로제가 만드는 모양대로 흘러가는 거잖아요.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을 때 그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새로운 걸 알고 싶을 때도 바로 할 수 있어요. 나를 넓혀가는 데 무소속이 소속일 때보다 훨씬 더 넓어진다고 느껴요. 왜냐면 어딘가에 소속돼있으면 사실 하루 반나절 이상을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신경 쓸 수밖에 없잖아요. 퇴근 후의 삶은 나를 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회복 시간으로 써야 할 것 같아서요.

무소속인데 안정적인 수익이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죠. 일단 나만 책임지면 되니 긴장감, 부담감이 없어요.


돈이 제일 걸림돌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알바하고 있는 곳이 손님들 방역 체크를 해주면 되는 거라 비교적 자유로워요. 소위 숨 쉬면서 돈 번다고 하잖아요. 그런 기회를 덕질하는 데 써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생활에 기초가 되는 정도의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소속 상태가 좋아요.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나가면 나쁘지 않다’ 지금이 딱 그런 상태예요. 생활할 돈은 마련하고 있고 이 시간을 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조금씩 나를 바꿔 갈 수 있겠다 싶거든요. 그러니 의지가 중요하죠. 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1달 뒤, 1년 뒤가 바뀌니까요. 알면서도 매번 똑같아요. 가끔 드라마 <SKY 캐슬>의 김주영 같은 사람이 제 매니저라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내 인생을 설계해줬으면 좋겠다 싶어요. 그 계획표대로만 움직이면 되니까.


그러면 너무 억압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최종적으로 내가 목표한 걸 설계해주는 거니까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원한 거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로 강압적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고요(웃음).






✨수정님을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feb1_suj/



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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