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쎄 May 24. 2021

일 | 굳센 마음으로 불안을 견디며

보경의 일


✨무소속 7개월

✨화곡역

✨일





“모든 삼각형에는 이름이 있다는 거 아세요? 세 변의 길이가 같으면 정삼각형, 세 변의 길이가 다르면 부등변 삼각형, 두 변의 길이가 같으면 이등변 삼각형, 예각이 있으면 예각 삼각형, 둔각이 있으면 둔각 삼각형, 직각이 있으면 직각 삼각형….


어떤 학자가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삼각형 작도법을 연구했는데 그 평범한 삼각형마저도 평범한 삼각형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평범한 삼각형이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평범하다는 특징이 생겨버린 거죠. 웃기죠?


생각보다 평범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요. 저는 평범하고 아무 특징도 없이 살고 싶은데 삶이 그렇게 만들어 주지를 않네요(웃음).”






평범하고 무던하게 살고 싶은
김보경입니다.





일하는 나를 키워드로 표현해볼까요?

‘요령’이요. 사회생활 한지 햇수로 8년 차가 되다 보니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빨리 끝내는 법을 터득하게 됐어요. 저는 단축키를 많이 쓰거든요. 새로운 프로그램을 사용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이 기능을 쓸 수 있을까 그런 편법을 꼭 고민해요. 스킬 부분에서는 그런데 감각적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7년 넘게 디자이너로 일하며 여러 디자인을 접했지만 제가 디자인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바로 직전 회사의 팀장님이 “보경님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에 비해 너무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배웠던 것들, 어디서 본 것들을 요령 있게 짜깁기는 할 수 있어도 요령만으로 완성도를 높이기는 좀 어렵거든요.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그 이상 지속하기 어렵겠다고 최근에 자주 생각했어요.


그 요령을 다른 말로 바꾸면 노하우일 것 같거든요그간 일해온 시간과 데이터가 쌓여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아간 거잖아요

그런 설명을 들으니 좋은 의미네요(웃음).


그 부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부딪치고 깨지면서 터득한 부분인걸요풍부한 경험이라고 느껴져요.

너무 힘들었지만 재밌긴 일하긴 했어요. 직전 회사에서 소속 팀이 연차나 나이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분위기여서 단합이나 분위기만큼은 정말 좋았거든요. 후배나 연차가 낮은 사람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기 꺼리는 사람도 많은데 그 팀에서는 그런 게 없었어요. 모르는 건 편하게 물어보고 알아갔죠. 또 이전 회사에서는 써보지 않았던 툴을 배워가며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동료들이 지금도 하는 말이 ‘이 회사에서 여러분 만나서 정말 도움 많이 됐다. 능력이 업그레이드됐다’거든요. 정말 그래요.


지금은 어떤 분야에서 어떤 업무를 하고 있나요이 일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일하지 않고 다른 직종을 선택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어요. 군무원이요. 군부대 내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디자인과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일이라 공부하자고 마음먹기까지 오래 고민했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아무래도 연봉협상이겠네요. 

입사 1년 무렵 대표와 의견이 맞지 않아서 연봉협상에 실패했어요. 연봉이 조금도 오르지 않았죠. 거의 한 달을 질질 끌었던 연봉협상에 실패하고 나니 너무 화나서 고민만 하던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떻게든 내 노고를 깎아내려서 연봉을 안 올려주려는 사기업에 질렸거든요. 게다가 디자이너가 수명이 긴 직업이 아니고, 디자인만 하고 싶은데 자꾸 주변에서 ‘디자인만 해서는 오래 못한다, 마케팅을 겸해야 한다, 기획을 겸해야 한다’ 같은 소릴 하는 것도 싫었어요. 상대적으로 공무원은 호봉이 정해져 있으니까 연봉협상에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게 장점으로 다가왔어요. 내가 원한다면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점도 공부를 시작하게 된 큰 이유에요. 처음엔 직장 생활과 병행하면서 공부하다가 시험을 약 7개월 앞두고 퇴사해서 지금은 전업 수험생이 됐어요.


학생 때를 벗어나면 오랜 시간 각 잡고 공부할 일이 크게 없잖아요해보니 어떠세요?

사실 저는 공부를 처음 해봐요(웃음). 학생 때도 안 해본 터라 처음에는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지금도 8시간 일하니 집에서 공부하는 것도 할 만하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해보니 정~말 어렵더라고요. 따져보면 회사에서는 8시간 내내 일만 하지 않잖아요. 쉬는 시간도 있고 이동하는 동선도 있는데, 공부는 8시간 내리 앉아있어야 하고 그렇게 한다 해도 결과물이 오롯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10~12시간은 앉아있어야 8시간 공부한 셈이죠. 게다가 온종일 대화도 없이 혼자 견뎌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적응하기까지 너무 힘들었어요. 하루에 공부할 일정 시간을 지키지 못한 부분에서도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는데 지금은 뭐, 그냥 10시간 채우면 채우는 거고, 못 채우면 못 채우는 거고(웃음). 점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행이에요완급조절을 하면서 임하시니.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못 지키는 데서 스트레스받으니까요. 





내가 보는 나의 강점과 약점을 알려주실래요일과 접목하면 어떻게 드러나나요?

앞서 요령 부려서 일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오히려 FM 적인 면이 강해요. 규칙에 불만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지키려 해요. 그게 책임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단 제가 하게 된 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 선에서 끝내려고 하는 편이에요. 약속한 기한도 어기는 편이 아니고요. 돈 받고 일하는 건데 대충하면 안 되잖아요. 돈 받은 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스스로 알고 있던 것보다 멘탈이 더 약해요. 자주 우울하고 그게 오래 가죠. 그런 날에 일하면 다음 날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하기도 했어요. 한숨 나오는데 어쩌겠어요. 어제의 제가 벌여놓은 일은 오늘의 제가 책임져야죠.


여러 회사를 거쳐오며 다양한 디자인 업무를 경험하셨잖아요

연차가 높아지면 그만한 직급을 달죠. 제 친구들만 해도 시니어급이 된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어떤 업무든 얕게 할 줄 안다는 생각 때문인지, 팀장이 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자리에 앉을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곤 했어요. 팀장이 된다는 건 내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팀 전체를 스케줄링하고, 업무 성과나 방향을 핸들링하는 관리 감독이 가능해야 하는데 저는 그게 부담스럽고 힘들어요. 딱 제 일만 하는 스타일이에요. 일인자보다는 어시스트에 알맞다고 생각해요. 저보다 잘할 사람을 보필하고 도왔을 때 잘된 모습을 보면 보람이 커요. 

한 번은 연차가 비슷한 동료와 제가 팀장 후보에 올랐어요. 몇 개월씩 팀장 역할을 맡아보고 적임자를 결정하자고 해서 동료가 먼저 팀장이 됐죠. 곁에서 보니까 그 직무를 너무나 잘해요. 제 입장에도 이 동료와 같이 일하는 게 편하고요. 이후에 제 차례가 돌아왔을 때 팀장을 맡지 않겠다고 하고서 동료를 추천했던 일이 있어요.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사원으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웃음). 디자인 업무에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팀장이 된다면 일하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에 진로를 바꾸게 됐어요. 물론 가장 큰 부분은 디자인을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회사에서 상사나 대표의 인정은 대개 고만고만하죠동료와 함께 성장한다는 점일의 고충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잘 일 했다는 느낌에 주효한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직급이 올라가는 데서 보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연봉이 원하는 만큼 올랐다면 달랐겠죠. 경력 대부분을 개인이 곧 팀인 에이전시에서 일 해와서인지, 인하우스에서 일하며 팀을 경험한 게 좋게 남아있어요. 인하우스는 여러 면에서 고충이 많고 업무, 특히 잡무가 많은데요. 같이 일한 동료가 힘이 돼서 일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는 팀이 바뀌면서 제게 기대하는 역할이 팀장이나 아트디렉터로 확장되기에 이르렀고 부담이 커졌지만요. 

아마 디자이너들이 그런 얘기 정말 많이 들을 거예요. ‘디자인만 해서는 오래 못 간다.’ 그러니 마케팅이든 기획이든 겸해서 하라는 압박을 받곤 하죠. 저 역시도 바뀐 팀에서 디자인 업무가 점점 줄어드니까 다른 업무를 해보자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디자인 일이 없다면 제가 이 회사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역할이 뭔지도 모르겠고. 

실제로 디자인만으로 마흔 넘도록 일하는 여성을 주변에서 거의 못 봤어요. 마케팅이나 기획하라는 얘기를 듣기 싫은 것보다도 롤모델이 없는 게 힘들었어요. 자기 회사를 차리거나, 마케팅과 디자인을 겸하거나, 기획과 디자인을 겸하는 식으로 같이 하더라고요. 마흔이 되어도 이 일을 할 수 있나? 그때도 내가 이 회사에 있을 수 있나? 저는 자기 회사를 차린 데서 이미 디자인만 하는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그때 내가 이 판에서 오래 일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어떻게든 안정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일하며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영향이 있나요?

사실 남들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타입이 아니에요. 크게 눈여겨보지도 않으니 좋다, 나쁘다 할 일도 별로 없어요.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생각했던 건 있어요. ‘내가 누군가의 사수, 선배, 팀장이 되었을 때 많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워낙 작은 회사들을 전전하다 보니 사수가 없고 저 혼자 디자이너인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물어가며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스스로 찾아보고 터득해야 했죠. 그래서 사수가 없을 때, 또는 사수가 배울 것 하나 없이 엉망인 사람일 때의 막막한 기분을 잘 알아요. 그때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필요할 때 가르쳐주고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이 내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정이요. 이게 가장 중요해요. 더 어릴 땐 돈을 많이 버는 것, 일로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다 중요했지만, 지금은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디자인, 물론 너무 재미있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지만, 워낙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다 보니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물을 내기가 어렵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대표가 ‘난 그거 싫어 마음에 안 들어’ 해버리면 그냥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되죠. 재미도 없고, 재미가 없으니 성취감도 없고. 더군다나 디자이너 급여가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라 이직을 위해 공부하면서도 돈이나 성취감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저 고용불안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는 것그거면 돼요행복은 일 외의 것에서 찾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공부를 택하신 데에 내가 일한 만큼의 성과즉 호봉연봉이 정해져 있다는 게 컸다고요.

맞아요, 호봉은 정확해요. 행정 공무원이 어떤 일을 하는지 해보지 않고서야 잘 모르지만, 디자인처럼 주관적인 일은 아니겠거니 예상해봐요. 디자인보다 답이 있는 일이지 않을까. 사기업에서는 내가 이 회사에 얼마나 기여하고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결과를 냈는지 적극적으로 어필해도 연봉협상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죠. 반면 공무원은 호봉이 규칙적으로 꾸준히 오르니까 보다 인정받는 데로 가고 싶었어요.


왜 많은 공무원 중에 군무원인가요?

과목이 적어요. 9급 행정 직렬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공무원은 5과목을 봐요, 국어, 한국사, 영어, 선택과목 2개. 이건 직렬마다 달라서 법원직과 행정직이 각각 다르죠. 그에 비해 군무원은 3과목만 봐요. 한국사와 영어가 빠지고 대체 시험을 보는 식이에요. 저는 영어를 정말 못해요. 그런데 공무원 영어가 악명 높다 보니 이것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대요. 저는 애초에 영어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3과목이니까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 단기합격자가 많다는 정보를 접하고서 나도 해보자며 들어섰죠.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까 과목이 적다고 쉽기는커녕 그만큼 더 어렵게 내더라고요(웃음). 국가직, 지방직 공무원은 시험 치른 후에 시험지를 가져갈 수 있게 하는데, 군무원은 시험지를 가지고 나갈 수 없어서 비공개예요. 공개 시험, 비공개 시험의 차이가 확연하더라고요. 확실히 군무원은 비공개 시험이라 그런지 난이도가 좀 제멋대로예요(웃음). 게다가 단기합격자는 행정직이 아닌 기술직 같은 일반 행정 아닌 직렬이 많더라고요. 제 예상과 다른 걸 공부하며 느끼고 있어요. 저처럼 과목 수가 적고 단기합격자가 많다는 말만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보이면 극구 말려요. 

개인적으로 경찰, 군대 등 안보에 관심이 있었고 제복을 좋아해요(웃음). 제가 입는 건 아니라도 조직에 속하면 제복을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한 번은 사주를 봤는데 총, 칼을 쓰는 직업, 직군에서 일하는 게 좋다고 해요. 직접 총, 칼을 다루지 않고 설령 펜을 쓰더라도 그 환경에 있는 게 중요하다고요. 제가 이 분야에 관심 가지는 것과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니까 더 마음이 갔죠.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확신이 없잖아요결과로 나왔을 때조차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나 원치 않았던 경우가 많으니까요사주에서 조금이나마 힌트를 얻고 싶은 마음이겠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 선택에 확신이 없어서 사주나 테스트를 보며 제 마음대로 해석하곤 해요(웃음). 그 결과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정답도 아니지만, 힌트를 얻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은 게 크기 때문에.


보경님께 불안안정이 중요한 키워드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언제 불안을 느끼시나요?

늘 불안해요(웃음). 미래를 볼 수도, 알 수도 없잖아요? 지금 택한 공부도 합격을 떠나 ‘이게 맞나?’ 하고 스스로 종종 물어요. 디자인 업계에서 자주 이직하고 한곳에 오래 다닌 이력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드니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으니까요. 한 번은 엄마가 그랬어요. “합격한 뒤라고 해서 그곳은 안 힘들 것 같으냐, 거기도 사람들 일하는 데고 똑같이 힘들다, 그때 가서도 관둔다고 할 거냐”고요. 어렵게 시험 봐서 들어간 건데 단번에 관두겠느냐고 대꾸하긴 해도 확신하진 못하겠어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볼 테지만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힘들겠다고 예상해요. 일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이 부분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저는 이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크게 다가오는 듯해요. 

제가 한 발 내디뎠을 때 발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경제적인 요인도 무시 못 하죠. 만약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1년 정도 공부에만 매진해도 생활에 무리 없는 상황이라면 불안감은 지금보다 덜할 거예요. 제가 마지노선으로 정해둔 기간 이후에는 가용할 수 있는 돈이 남지 않는 점이 크게 다가와서 스트레스받곤 해요. 어쩔 수 없죠, 이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다음 날 갑자기 돈이 생기는 게 아니니까(웃음). 코로나 상황의 여파도 있어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엄마가 말한 적 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이라는 걸 아니까 제 몫의 불안 외에도 떠안는 불안이 있죠. 





그 불안을 어떻게 안고 가시나요?

그저 불안해해요(웃음). 그러면서 계속 불안을 봐요. (그럼 힘들지 않아요?) 안 보면 더 불안해져요. 그런 거 있죠, 제가 벌레를 정말 싫어하고 무서워하는데 이 벌레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더 싫어서 계속 보는 식이에요. 적어도 어디 있고 어디 숨었는지 알아야 나중에 벌레 잡아줄 사람이 나타났을 때 얘기할 수 있잖아요. 불안도 마찬가지예요.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을 계속 응시해요. 돈이 없어서 불안하다면 남아있는 잔고를 수시로 확인해요.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지 계속 계산하고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계획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적어도 남은 잔고 만큼은 제가 통제할 수 있어요.


살면서 사소한 통제감이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계획을 짜면 마음이 조금 안정돼요. 당장 할 수 있는 만큼 통제했다는 걸 아니까요.


코로나19로 인해 독서실에서 공부하시던 것도 집안으로 옮기셨다고요.

원래는 아파트 독서실에서 공부할 생각이었거든요. 저렴한 데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라 맘에 들었어요. 그마저도 작년 연말부터는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이용할 수 없게 됐어요. 그 외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방에 작은 책상을 장만했죠. 집안에 공부 환경이 조성된 셈이에요. 공간이 독서실이건 집이건 혼자 공부한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FM 스타일이라고 하셨어요. FM이라는 건 원칙을 가지고 일의 루틴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죠.

회사라면 적어도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물론 퇴근 시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요(웃음). 프리랜서 때는 작업이 잘될 때 조금 더 하자는 마음이 드니까 패턴이 무너지기 쉬웠어요. 공부하면서도 마찬가지예요. 계획 없이 공부할 때랑 계획을 탄탄히 짜서 공부할 때 감당할 수 있는 게 달라요.


일과 공부가 비슷하지 않을까요

좀 다르더라고요. 공간을 집으로 한정해 프리랜서와 공부를 비교하자면, 프리로 일할 때는 일과 삶의 공간 분리가 안 돼서 힘들었어요. 하지만 공부는 침대 바로 옆에 책상이 있는 게 할 만해요. 제가 절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집에서 공부할 때만큼은 침대에 잘 안 누워요. 일할 때는 쉬는 날 침대 밖으로 거의 안 나가곤 했는데 말이에요. 제 나름의 다짐과 규칙 때문이기도 해요. ‘너무 졸리고 쉬고 싶더라도 책상에서 하자!’ 졸더라도 책상에서, 쉬더라도 책상에서 핸드폰을 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책상에서 뭔가를 한다는 자체가 불편하니 결국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돌아와요. 안 되는 날이 있더라도 꾸준히 그 규칙 안에서 공부해나가고 있어요.


간절함에 더해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을 안 뒤에 공부하는 거라 그럴까요.

그런 부분도 있어요. 공부를 전업한 건 올해부터라도, 회사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1년 넘게 공부해오고 있거든요. 탈 디자인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시작한 거라 공부를 길게 끌면 안 되겠다, 올해 합격하면 좋겠지만 혹여 안 되면 내년까지만 해봐야겠다는 마지노선을 정했어요. 보통 2~3년쯤에야 합격하더라고요. 휴. 공부하면서 그간 모아둔 돈을 쓰고만 있거든요. 매달 돈이 떨어져 가는 걸 보면서 올해 합격 못 하면 큰일 난다 싶죠. 내년까지 공부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걱정이 많고 불안할 것 같아요. 남은 돈이 없으니 처음부터 모아나가야 한다는 압박이 커서요. 





보경님만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있으세요?

음, 친구들과 카톡 하거나 전화하고, 트위터에 글 쓰는 정도? 회사 다닐 때보다 지금이 덜 힘들어요. 회사가 대부분 행복한 공간은 아니잖아요.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공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동시에 있었다 보니 그때는 정말이지 힘들고 우울했어요. 반면 퇴사하고 공부만 하는 지금은 그때만큼 우울하진 않아요. 올해 들어서는 할만하다는 생각이 커졌고요. 불현듯 올해 합격할까? 하는 생각 드는 게 스트레스지, 공부 자체는 스트레스가 아니에요.


불교에서는 고통을 직시하고 흘려보내면 고통스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사람이니까 아예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루틴이 되면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이 문득 오는 것 같아요. 최근 2주 정도는 걱정거리가 많아서 8시간 공부를 못 채웠어요. 같이하는 사람이 있다면 으쌰으쌰 할 것 같은데, 고등학생 때처럼 비슷한 모양대로 사는 게 아니라 각자 자리에서 다른 모양대로 사니까 SNS를 통해 그걸 보는 게 힘들더라고요. 

공부를 위해 장만한 책상이 정말 작아요. 800x600mm라, 힘들 때면 내가 1평도 안 되는 딱 요 크기 안에서만 매일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죠. 초반에는 운동하는 시간도 아깝고, 밥 세 끼 먹는 시간도 아까웠어요.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앉아 있는다고 그 시간 동안 공부한다고 볼 수는 없거든요. 다 포기하고 공부만 해보니 운동하지 않으면 이것도 오래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일할 때도 딴짓을 많이 한 편이에요.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고요. 어차피 책상에 앉아서 핸드폰 볼 거, 나가서 핸드폰 보거나 바람 쐬면서 쉬자고 마음먹죠. 그렇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너무 힘들어서요. 운동이나 산책하러 나가면 기분전환이 돼요.


보경님에게 꼭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 있으신가요?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데 지금 할 수 있는 걸 당장 하는 거?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게을러서 무슨 일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았어요(웃음). 대학생 때까지도 미뤘다가 밤새 야작하는 패턴이 있었죠.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나 새벽에 아이디어가 잘 나와서도 있지만, 대개는 놀다가 닥쳐서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 번 휴학 후 복학하면서는 눈앞에 놓인 과제를 빨리하고 끝내자는 생각으로 움직였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이 일을 못 했는데 다른 일이 생겨버리면 두 개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그런 일이 생기게 하지 말자는 마음이죠.


하고 싶어서 끝내 성취한 일이 있나요?

글쎄요. 생각해보고 있는데 잘 떠오르는 게 없어요. 목표를 정해두고 하는 일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되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말고. 되는 데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는 생각이요. 그래도 되면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요? 다행히 실패에서 오는 절망감에 좀 무뎌요. 가끔 자괴감이 들어도 그 감정에 오래 붙들려 있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털어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르지만요.


시험 합격하면 해보고 싶은 일 있으세요?

취미생활을 아예 못하는 상황이니까 거창하게 뭘 해보고 싶은 마음보다도 취미생활을 누리고 싶어요. 책을 못 읽은 지 정말 오래됐어요. 지겹고 읽기 싫어서 미뤄둔 건데도 요즘은 그렇게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소소하게 뜨개질도 하고 싶고, 요즘은 정적인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삶은 그저 평범하게회사에서는 일 걱정하고 퇴근해서는 저녁 뭐 먹을지 고민하고저녁 먹고는 좋아하는 아이돌 영상을 보거나 하고 싶었던 뜨개질을 하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보다 잠들고시간 있으면 운동하는 일상이에요. 공부하면서 사소한 일상이 다 뒤로 밀리곤 해요. 당장 제일 중요한 건 공부니까요. 개중에는 뒤로 미뤄서 후회되는 일도 있는데 어쩔 수 없죠. 합격자들 수기를 읽어봐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더라고요. 결과에 확신이 없으니까 계속하는 수밖에 없어요.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고통이죠. 불안정에서 오는 고통. 무소속은 결코 환상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중간중간 퇴사하고 쉬었을 때 정기적인 소득이 끊기다 보니 집에서 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게 느껴졌어요. 그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대체 돈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나’ 싶었죠. 생활에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다 보니 우리 가족에게나 저한테는 일은 곧 돈이고 돈이 곧 안정이거든요. 소득이 끊기니 안정이 사라지고 불화가 생기더라고요. 아무래도 어른들은 회사를 안 다닌다고 하면 그저 잉여 인간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저희 엄마도 그렇고요.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때만큼 벌이가 충분치 않으니 여러 가지가 망가졌어요. 의뢰인들은 자꾸 싸게만 해달라고하는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그 금액으로는 어렵다고 다른 제안을 하면 그냥 안 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었죠.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쁜데 남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일하려고 회사를 나와서는 정작 돈이 되는 일보다 돈 안 되는 일만 실컷 하다가 통장 잔고도, 마음도, 몸도 병이 들었죠. 

지금도 비슷해요. 다행히 집에 손 벌리지 않고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언제 돈이 바닥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무서워요.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에요. 하루라도 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요. 엄마한테도 자랑할 만한 딸이 되고 싶고요.






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copyright ⓒ 미란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취향 | 부서진 조각이 무기가 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