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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May 27. 2021

삶 | 밀물의 기억을 소화하는 건 썰물의 몫

현진의 삶

✨무소속 3개월

✨목동역

✨삶





삶은 참 얄궂다. 갈망할 때 사라지고 원치 않을 때 들이민다. 특히 인연이 그렇다. 사는 동안 누구나 경험하는 이 통속적인 표현 앞에 ‘시절’을 붙여보자.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일종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북드라망, p.60-61)


즉 일정 타이밍에만 맺을 수 있는 관계이자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간. 그리 보면 삶은 시절인연으로 이루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현진의 삶을 대하는 내내 시절인연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그 인연과의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서 뜬금없는 충격을 마주하거나 야릇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감정의 결을 더듬는 과정이 연속되는 셈이다.


생애 곳곳을 수놓고 사라진 인물들은 다른 깊이의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었다. 현진에게 먼저 산 사람, 그러니까 선생의 흔적은 유독 깊었다. 하지만 애써 지우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흔적을 자신만의 타투로 삼아 살아나가는 현진을 만났다.






파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이현진입니다.




지금의 나를 키워드 3개로 표현해볼까요?

카메라, 약, 시계요.


약은 우울증과 공황 때문이라고요. 약을 먹은 지 3년 정도 되신 건가요?

맞아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나를 이루는 것으로 약은 빼놓을 수는 없는 부분이에요. 약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기엔 과한 것 같지만, 약이 없으면 불안하다는 느낌이 단박에 들어서요. 먹은 지는 3년 정도 됐고, 요즘 들어 약에 통제당하고 있다는 마음이 크게 들어요.


브런치에도 이 내용을 쓰셨죠. 우울증을 완벽하게 없앨 수 없다고, 평생 같이 간다고들 말하더라고요. 우울증을 같이 사는 동반자로 볼 수 있을 텐데, 약을 계속 먹으며 신경 쓰는 입장에서는 끝나지 않아서 좌절이랄까요. 힘드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처럼 미란님과 얘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친구와 만나는 등 일상적으로 생활해요. 가끔은 잠을 못 자거나 불안할 수 있으니 방지하는 차원에서 약을 먹는 거죠. 약 먹는 건 일련의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습관이자 행동이에요. 한 번 약을 끊은 적이 있었어요. 괜찮다고 느껴서 약과 병원 치료를 중단했는데 일련의 사건들로 다시 병원에 가게 됐죠. 옮긴 병원에 물으니 몇 년은 염두하고 가야 한다고 해요. 그때 좀 무력감을 느꼈어요. 이건 감기나 다른 병처럼 금방 끝낼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계속 같이 가야 하는구나 생각했죠.

우울증이 있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너무 불안해하고 잠도 못 자는 걸 보면 말해주고 싶어요. 정신과에 가는 일은 제게 이상하지 않거든요. 잠이 오지 않고 피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 ‘혹시 정신과 가볼 생각 없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조심스러워서. 다들 ‘안 가도 돼, 내가 거길 왜 가냐’는 식으로 대하니까 그런 생각을 깨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몸이 아플 때 가정의학과에 찾아가듯, 필요한 이라면 누구나 정신과에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힘든 순간이 올 때면 심리상담센터를 찾았어요. 몇 년 전에 간 센터에서 선생님이 제게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은 이겨낼 힘이 있다고, 괜찮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심리상담이나 정신과에 관해 어려워하지만 그만큼 관심이 많은 분야다 싶어요.

처음 심리상담을 받은 건 18살 즈음이었어요. 엄마랑 꾸준하게 싸워와서 서로를 아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아동 심리센터를 찾았어요. 상담사가 제게 통원치료를 권하더라고요. 속에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한 달간 매주 토요일이면 1시간씩 일주일 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화가 많았고 무의식적으로 당신 인생을 망친 것이 나와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때 ‘진짜 상담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엄마 같은데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야 엄마가 아팠고 호르몬 때문에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일들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 주며 살았던 거예요.

당시 제겐 지속적인 심리상담이 필요했는데 마침 동생에게 틱장애가 찾아왔어요. 저와 엄마가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주변 사람들도 곪았을 테고 동생이라고 다르지 않았던 거죠. 모두 케어하기 벅찬 상황에서 가족들은 동생의 치료를 선택했어요. 그때 잘 치료한 덕분인지 동생은 지금 말짱해요. 참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저는 그때 이후로 꾸준히 우울증과 살고 있다는 점이 씁쓸하죠.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공황이 크게 온 뒤부터는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왜 이렇게 됐는지 복기해볼 때마다 그때 누군가 내 말을 들어줬다면, 하고 가정해보곤 해요.


시계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시계는 욕망 같은 거예요. 제겐 공간이 아주 중요해요. 동생이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저는 할머니와 같이 방을 썼거든요. 할머니 방 안에는 창고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밖에서 보면 컨테이너예요. 그걸 방처럼 꾸며놓은 거죠. 여기엔 자개장도 있고 책장도 있어서 벽이 따로 없었어요. 그저 집안의 잡동사니를 모아둔 공간.

자라면서 점차 제 공간이 필요해졌고 할머니와 같이 있는 게 불편하니 자꾸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이불을 펴서 잠도 자고요. 우울증이 심할 무렵에는 책상에 앉아서 이 공간을 가만히 보는데 모든 게 다 쏟아져 내릴 것 같았어요. 책이며 잡동사니, 자개장까지 모두. 그즈음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후배가 집을 1달간 비운다고 하기에 곧장 거기로 도망갔어요. 다행히 숨통이 조금 트였고 비로소 알았죠. 내 공간이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3~4개월 전쯤에 독립 얘기를 꺼냈다가 머물기로 했을 때 아빠가 이 공간을 방으로 개조해주셨어요. 탑차를 동원해 책장과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을 버리고서 벽을 만들었죠. 침대도 들였고요. 그때 제가 방에 꼭 놓고 싶은 물건이 시계였어요. 벽에 시계와 달력을 걸고 싶었거든요. 이전에는 그 어떤 방도 제 방이 아니니까, 또 벽이 없으니까 그럴 수 없었는데 이제는 가능하니 주문했죠. 하나씩 배송되어 올 때의 그 기쁨(웃음)! 시계를 건 뒤로 매 순간 확인하면서 기쁨을 느껴요. 제가 하루를 보내면서 시계를 참 자주 보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시계를 봐요.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진 않나? 하는 질문을 자주 떠올리고, 시계를 보면서 내 방이 생겼다고 곱씹곤 해요. 그런 의미에서 시계는, 제게 중요한 공간에서 비롯된 사물이에요.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잘 쉬는 법을 알게 해준 시간이죠. 저는 아파도, 힘들어도, 그렇지 않아도 일을 했거든요. 제가 쉴 때 뭘 해야 할지도 몰라서 잘 쉬지 못했어요. 무소속으로 보내는 기간 동안 나를 돌아보고 내가 쉴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쉬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쉴 수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요리, 독서, 공예 등 쉬는 순간까지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어요. 고마운 시간이에요.


현재 삶의 만족도를 69점이라 쓰시고는, 매일 1점씩 올리고 있다고 표현해주셨어요. 때때로 –3, -1이 될지라도 꾸준히 무언가를 해나가실 텐데, 1점씩 올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활하시나요?

시간은 계속 흐르잖아요? 저는 시간 내에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어요. 퇴사하면서 제일 처음 했던 생각이 ‘시간을 잘 써야겠구나’ 였을 정도로요. 제대로 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쉬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던 거예요. 말도 안 되죠. 퇴사하기 전에 그랬어야 했는데! 제게 시간을 잘 쓴다는 말은 잘 쪼개 쓴다는 말이에요. 퇴사 후에 이것도, 저것도 하면서 한 달을 살아보니 굉장히 불안했어요. 그때 삶의 만족도가 50점까지 내려갔죠.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던 중에 심리상담사에게 말을 꺼냈어요. 잘 쉬는 법을 모르겠다고. 잠을 잘 자느냐고 물어서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했더니 편히 잘 수 있는 약을 처방해줬어요. 당장 필요한 게 쉼이라는 판단하에 독일어와 영어, 일러스트레이터 배우던 걸 정리했어요. 하루를 흘려보내는 연습을 해보는 거였죠. 시간별로 뭘 할지 투 두 리스트로 촘촘히 정하는 게 아니라, 오늘처럼 뭉텅뭉텅 사는 거예요. 오전에 운동을 다녀왔고 점심 이후에 인터뷰하는 것처럼요. 예전 같았으면 사이 시간을 활용해서 뭔가 하려고 했을 거예요.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뭔가를 하는 건 행위에 집중하는 거지 제게 집중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 상태에 집중하면서 오늘 낮잠이 자고 싶은 건지, 거북하니까 식사를 가볍게 하고 싶은 건지, 이 사람을 만나니까 좀 더 신경 쓰고 여유롭게 나가볼지 등을 생각해보는 거죠. 쉬었다는 기분이 들면 하루 만족도가 1점 올라가요. 엄청난 상승세는 아니더라도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아요.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 있지만, 지금을 잘 보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커요. 무소속의 시간이 제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매일의 내 상태와 자연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순간에 집중하는 일이죠.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게 꼭 그래요. 누굴 만나서 사진으로 찍으면 그 순간이 남으니까요.


카메라도 현진님의 중요한 키워드죠.

여러 대의 카메라가 있어요. 그중 필름 카메라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것을 물려받았어요. 수리하고 한 번씩 만져서 상태를 확인하고서 쓰죠. 필름 카메라는 필름을 현상하고 스캔한 사진을 기다리는 과정이 엄청나게 설레고 두근거려요. 최근에는 잡지에 수록할 사진을 찍었는데, 안 좋게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컸어요. 다행히도 함께 일하는 파트너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사진 좋다고 해주셔서 그대로 쓰기로 했죠. 이 카메라로 작업물이 나쁘지 않아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촬영하는 게 아닌, 처음으로 작업을 의뢰받아서 해본 거라 무척 떨렸는데 50점은 넘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삶의 분기점이었던 순간을 얘기해볼까요?

삶의 분기점이라…. 초등학생 때부터 제가 글과 친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좋은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나와서 지상파 아나운서를 한 고모가 있는데, 제가 고모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생김새부터 목소리까지 닮았다니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그의 어린 시절까지 닮고 싶었던 듯해요. 그래서 책은 늘 곁에 뒀어요. 중학생 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단편 소설로 시작했고, 팬픽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당시에 빅뱅을 좋아했는데, 동방신기부터 슈퍼주니어까지 좋다는 팬픽은 다 읽었어요(웃음). 어느 순간 직접 쓰고 싶어졌고 팬카페에서 활동하며 팬픽을 쓰기도 했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덕질을 원 없이 해봤던 시기예요. 그때는 한 문장을 가지고 몇 번이나 읽으면서 고치고 고치기를 반복했어요. 그만큼 문장에 자신이 없었나 싶기도 하고, 지금 보면 너무 오글거려서 네이버 드라이브에만 숨겨뒀어요(웃음).

2015년에는 자원봉사를 인연으로 기획팀 매니저를 맡았어요. 사수였던 팀장님은 알고 지내던 언니인 동시에 일 잘하고, 열정적이고, 침착하게 화낼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일이든 센스 있게 할 줄 알고, 아닌 건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해주고, 힘들어 보이면 먼저 말 걸어주고, 제 눈물도 자주 받아줬죠. 어떨 때는 저 대신 싸우러 가주기도 할 정도로요(웃음). 멋있는 사람이라 항상 닮고 싶었어요. 1년 3개월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좋았어요. 그런 사람과 같이 일한 것도 삶의 분기점이 되는 것 같아요. 일도, 삶을 대하는 자세도,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배웠거든요. 너무 힘든 날이면 침대 머리맡에 둔 팀장님의 엽서를 보곤 해요. 후에 팀장님이 퇴사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갑작스럽기도 했고 아쉬웠어요, 더 배우면서 재밌는 일을 같이해보고 싶었거든요. 무엇보다 앞으로의 일이 가장 막막했어요. 제가 팀장님의 공백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라 힘들어도 버티고 누구에게 말 못 하고 꾹 참고 지냈죠. 그렇지만 그에게 배운 대로, 어쩌면 제 방식대로,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여겨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여기는 게 있나요?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50%는 할머니. 선택에 할머니가 들어가면 저는 다 할머니 편으로 기울어요. 독일 유학을 결정할 때도 할머니 만류에 가지 않았고, 엄마랑 크게 싸웠을 때도 할머니 말씀에 독립하지 않고 남았어요. 기르고 보살펴주신 건 물론,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었죠. 어떻게 보면 치트키에요. 그리고 25%는 아버지. 제 삶의 기준이 돼주는 분이에요. 또 엄마는 어린 제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20% 정도 같아요. 안 닮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보고 자란 것이 있어서 분명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손이 크다든가, 억척스럽다든가, 언제나 부엌은 깔끔하게 유지해야 한다든가… 엄마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요. 남은 5%는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이에요. 그중에서도 좋은 어른들. 저는 어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전 팀장님을 포함해 지금은 <빌라선샤인>에서 만난 뉴먼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너무 닮고 싶은 사람들이죠.


할머니와는 언제부터 같이 사셨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낳아준 엄마도 그랬고, 지금 엄마도 맞벌이라서 줄곧 할머니 손에 자랐죠. 아플 때도, 어떤 순간에도 제 옆에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그래서 할머니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거역 못 해요. 그 어떤 것도. 그 정도로 각별한 존재예요.


현진님에게는 할머니가 엄청난 존재 같네요. 어쩌면 꿈보다 더.

독일로 유학 가고 싶다는 마음이 크진 않았어요. 주변에서 지금 아니면 못 간다고 말하던 상황에서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난 너 안 갔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하시기에 안 가겠다고 명확하게 답했죠. 또 스무 살 때 자취할 수 있었는데 할머니 때문에 하지 않았어요. 그때 해야 했는데…!


그 선택에 후회는 없으세요?

후회는 없어요. 항상. 왜냐면 할머니 마음이 편해지셨으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할머니 마음 편하신 게 우선인 거네요.

그러네요. 이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할머니는 늘 그런 존재였어요. IMF로 집안이 난리 났을 때 할머니가 저 키우느라 고생하신 걸 떠올리면 내가 이렇게 선택해서, 할머니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서 속 썩이는 게 크게 죄송스럽다 싶어요. 웬만해서는 할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하려 하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드리려고 해요.


유학 가고 싶은 마음이 크진 않았다고 하셨지만, 독일에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어요. 독일의 첫 기억은 어땠나요?

어머니가 경험주의자세요. “사람은 경험해야 한다. 그러니까 돈을 많이 들이더라도, 큰고모네 가서 신세 지며 경험하고 와라” 하시면서 고등학생인 저와 초등학생 동생을 비행기에 태워 독일에 보내셨어요. (둘만?) 둘만요(웃음). 독일어를 모르니까 큰고모부가 전화에 대고 “자, 이렇게 생긴 글자가 나오면 거기로 쭉 가면 돼. 거기서 짐을 찾고 이렇게 해서 오면 돼. 그러면 우리가 있을 거야”라고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가서는 큰고모 덕택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캠핑카 타고 돌아다녔어요. 국경을 조금 넘는다고 환경이 휙휙 변하는 게 신기했어요. 많은 걸 보고 느껴서 꿈도 바뀌었죠. 도시공학으로요.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게 아닌데도 제게 독일은 세상을 여는 창 같은 느낌이었어요. 다른 나라와 달리 큰고모가 있으니 쉽게 갈 수 있었거든요. 독일이 그 물꼬를 터주는 느낌이라 다른 나라 여행도 두렵지 않아졌어요. 길게 보면 큰고모의 전략이었죠. 손수 해주시기보다 직접 해보길 권하는 편이셨거든요. “가서 네가 주문해. 영어 해도 되고 몸짓 발짓 다 해도 되니까 네가 주문하고 와”, “길 몰라? 그럼 가서 물어보고 와. 지도 줄 테니 네가 앞장서서 가봐” 이런 식으로요.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싫었어요(웃음). ‘영어와 독일어 잘하는 사촌이 둘이나 있는데, 왜 하필 한국식으로 영어 배운 날 시켜?’ 싶었어요. 그래도 그 교육 덕에 용기가 생겨서 외국인에게 말 거는 게 쉬워졌죠. 지금은 고마운 기억이에요.





삶의 일정 시기마다 롤모델이 근처에 계시더라고요. 요즘엔 롤모델이 있으세요?

롤모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고, 고민이 생기면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을 정해놓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선생님께 갔고, 다음으로는 팀장님께 갔어요. 지금은 아버지예요. 저는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이고 정말 친해요. “아부지, 이거 봐봐. 이거 이렇잖아요”처럼 반 존대를 쓰기도 하고 친구처럼 지내요.

갓 사회에 나와서 버팀목이 돼주던 팀장님이 사라지자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이제 내 결정에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 컨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구나 싶었어요. 그럴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뿐인 거예요. 그전에도 아버지랑 이런저런 얘기는 자주 나누곤 했어요, 꿈을 결정할 때도요. 아버지는 자신의 꿈이 발명이라고 말씀하시며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제가 하고 싶은 걸 물으셨거든요. 제 얘기를 듣고선 방향을 제시하거나 조언해주시곤 해요.

대학교 3학년 때 선생님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서 아버지한테 그랬어요. “나 선생님 할까? 하면 잘할 것 같지 않아?” 그랬더니 아버지가 일말의 고민도 않고 “그래, 그거 하면 잘하겠다”라고 답하셨어요. 그전까지 꿈도 전혀 달랐고 그저 한 번 던져본 말이었거든요. 그런데 제 결정을 그냥 믿어주시더라고요. “너는 하면 잘할 거로 생각해.” 가능하다면 지원해주시지만, 그러지 못할 때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응원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아요. 기억 속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보면 늘 그렇게 저를 응원해주셨어요. 퇴사를 결정했을 때도 아버지가 큰 몫을 하셨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주시고는 “그런 회사에 더는 있을 이유가 없다. 나와라”라고…. 저도 고집이 있어서 일단 결정은 했지만, 어른의 한마디가 필요한 순간이 있거든요. 그때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안심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아버지가 롤모델 아닌 롤모델 같아요.


가족 안에 그런 존재가 있다면 참 좋을 듯해요. 든든할 것 같고.

든든하죠. 예전에는 아버지가 무심하다고 느꼈어요. 엄마와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회피하셔서. 다행히 그 문제가 다소 해결되기도 했고 아버지가 저를 응원하고 있음을 느꼈어요. 맹목적인 사랑은 아버지 나름의 응원방식이구나,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이런 거구나. 그걸 깨달은 뒤로는 무엇이든 편하게 도전해볼 수 있었고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 싶어요. 준비하고 있는 <매거진 제로>도 그렇고, 여러 프로젝트를 해보는 등 시도가 잦아요. 안정적인 삶을 그리 원하지 않는 이유도, 많이 도전해보고 안정을 찾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재밌는 일, 지금 아니면 못 하는 일을 해보자 하죠. 지금껏 아버지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믿어주셨기 때문에 해올 수 있었다고 여겨요.


그때그때 내린 현진님의 결정, 그리고 그 마음들이 지금의 현진님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누군가의 조언이나 응원이 순간마다 영향을 줬겠지만 결국 현진님이 직접 만들어오신 거니까요.

누군가에게 묻기 전에 제가 이미 선택해놓곤 해요. 내가 내린 답이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묻는 거죠.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바로 이거예요, 고집. 소위 답정너인 순간들이 많죠(웃음). 이 답이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하면 방황하기 시작하지만, 대개는 맞으니까 다행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어요.


현진님에게 남다른 표현에는 ‘선생’이 있죠. 나보다 먼저 산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고 영향을 받으신 편이네요.

맞아요. 먼저 선(先) 날 생(生), 먼저 살았던 사람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해요. 먼저 산 사람들이 허투루 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죠. 제아무리 나쁜 사람이더라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게 제 지론이에요. 그래서 선생, 어른을 좋아하는 듯해요. 실제로 선생님들은 제가 공부하게끔, 더 나은 삶을 살게끔 지표를 만들어주셨어요. 고민이 있거나 모르는 게 있을 때면 교무실로 뛰어가곤 했죠. 집안 형편 때문에 학원을 못 다닌 탓에 학교에서 다 해결해야 했거든요.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나요?

고3 담임 선생님을 제일 좋아했어요. 어린 마음에 이성적으로 좋아하기도 했고요. 제 마음에 들어오게 된 일화가 있어요. 하루는 수업에 책을 안 가져오시더니 “어? 교과서를 안 가져왔네? 출석부만 가져왔잖아?” 하고선 분필을 들고 그날의 수업 내용을 칠판에 줄줄 쓰시는 거예요. 심쿵(웃음)! ‘이 선생님 진짜 멋있잖아? 어떻게 그걸 다 쓰지? 이래서 선생님인가?’ 했어요. 그날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제 자리도 또렷이 기억나요. 3분단 둘째 줄.

선생님이 첫 담임을 맡은 게 저희 반이었어요. 첫인사 날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시고는 고민거리나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했어요. 저는 뒷장까지 빽빽하게 엄마 얘기를 썼어요. 내심 저를 불러서 뭐라 하실 거라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아무 말씀 없이 받아들이시더라고요. 또 젊은 데다 첫 담임, 첫 고3을 맡았으니 열정이 넘치셨죠. 언제 한번 심하게 화내신 날이 있는데, 다음날 교실 칠판에 편지를 빼곡히 쓰셨어요. 그걸 보면서 우는 친구도 있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었어요. 영화 같은 순간이라면 지금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런데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편입 준비를 하던 때였는데, 어른들이 말씀 안 해주시는 걸 보아 자살이 아니었을까 짐작해요.

선생님의 죽음이 제 삶에 분기점이 되는 것 같아요. 참 마음 아프죠, 평생 내 은사가 될 거로 예상했던 사람이 죽은 거예요. 제일 찬란한 시절에 저를 가르치고, 저를 위로했고, 제가 가장 어렸던 마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 이생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 이후에 공황이 찾아왔어요. 제가 본 선생님은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요.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고 동생이랑 둘이 살기에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급식비 낼 돈이 없어서 핫바를 대량으로 사다가 밥 대신 드시거나 동생 뒷바라지한답시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다 하셨죠. 그렇게나 열심히 살던 사람도 허망하게 가는데,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살아봐야 뭐하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분이라 충격이 더 컸을 것 같아요. 게다가 충격에서 헤어나오는 것도, 감당하는 것도 혼자 해야 하니까요.

상실감이 컸죠. 저조차 놀란 모습인데요. 선생님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셨는데 어쩌다 보니 만취했어요. 집까지는 잘 왔다만 그다음 기억이 없는 거예요. 다음날 동생에게 들어보니 제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오열했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잘 혼내지 않는 아버지조차 제가 너무 울어서, 그렇게 우는 거 아니라고 혼냈을 정도였다고.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누가 기억을 가져간 것처럼….

수목장한 곳까지 가는 길이 까다롭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혼자 찾아갔어요. 가서 울기도 하고, 속에 있던 얘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그러면 마음이 시원해지곤 했어요. 지금은 생각 안 한 지도, 바쁘다는 핑계로 안 간지도 좀 됐어요. 이제 제법 괜찮아졌나 봐요. 가끔 햇살이 너무 좋고, 선생님과 우연히 스쳐 지났던 버스정류장을 마주할 때면 생각나요. 보고 싶은 것 같아요.





우리 삶에 드문드문 죽음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짚어본 기억은 별로 없는 듯해요. 제대로 애도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고요. 현진님에게는 지금까지가 애도하는 시간이지 않을까요?

애도…. 애도가 어렵죠. 한때 누군가의 죽음을 줄줄이 듣곤 했어요. 일순간에 아주 가까이서 죽음을 느껴보니까 본능적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으려 애썼어요. 장 보러 갔을 때 시장의 냄새를 맡고, 햇살을 받거나 바람이 불 때 내 피부로 감각할 수 있으면 살아있다고 느꼈죠. 그때 비로소 애도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살아있구나. 그 사람들은 지금 여기 없구나.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 더 잘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을 찾은 것 같나요?

점점 선생님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거든요. 그 당시 누군가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수록 더 잘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때 선생님의 모습을 제가 보고 기억하잖아요. 그 사람이 이러했으니, 나도 그 멋진 모습에 걸맞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이제는 그 몫까지 더 잘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형체는 사라져서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지만 마치 존재가 현진님에게 흡수된 듯해요. 그 몫까지 잘살아야겠다고 다짐하신 걸 보면요. 대단해요, 쉬이 엄두가 나지 않는 태도잖아요.

친구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도 제게 영향을 미쳤어요. 저와 동갑인 멋진 친구였죠. 대인관계가 좋고 성격이 시원시원했어요.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 그 친구의 오랜 여자친구가 자주 출몰했거든요. 볼 때마다 죽은 친구를 떠올리게 됐어요. 그래서 여자친구의 마음이 어떨지, 그 상실감을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었어요. 다만 고개 들고 멋있게 잘살고 있는 모습에 영향받아 나도 잘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잘살기 위해 날씨를 잘 느끼려 해요. 시간도 잘 느끼고. 그러다 보면 하루하루가 가고, 뒤를 돌아보면 내가 한 일들이 남아있겠죠. 그걸 보면서 내가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인지하고요. 자연스레 선생님 나이까지 오게 된 거죠(웃음).


어른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싫은 것도 해내는 사람. 팀장님이 싫은 일에 투덜대며 그랬거든요. “어른이니까 싫어도 해야겠지. 어른이니까 싫은 일도 할 줄 알아야 해”라고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남들 다 싫어하는 일을 저는 해냈고 ‘어른이 되었나?’ 하고 돌아보면 아직 어른은 아닌 것 같아서 찾는 중이에요. 어른이 되는 법.


현진님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파도 같은 사람이요. 바다를 아주 좋아해서 바다도 생각해봤는데 왠지 다 품어주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기엔 제 속이 너무 좁거든요. 파도는 올 때와 갈 때를 잘 아는 것 같잖아요. 일정한 힘이 있고, 그 사람이 필요할 때 파도에 휩쓸려 다가갔다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다시 넘어가는 데다, 항상 그 자리에 있되 어떨 때는 순환해서 다시 돌아오는, 파도 같은 사람이고 파요. 특정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각각 다를 테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다면 디폴트는 파도예요.






✨현진님을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blairlee_


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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