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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un 21. 2021

삶 | 죽음이 나를 찌를 때마다 다시 태어나고

인애의 삶

✨간헐적 무소속

✨줌

✨삶





부끄러움, 겁, 두려움은 시간과 함께 자란다. 멋모르고 해본 일에 크게 데여 움츠러들고, 무심코 뻗은 손이 거절당했을 때 실망한다. 이 기억들은 삶 군데군데 포진해있어서 자칫하면 나를 못살게 굴기 십상이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뒷걸음치게 만들거나 선뜻 손 내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애는 민감한 사람이다. 그래서 본능적인 감각부터 존재를 대하는 순간이라는 파편들을 그러모아 여러 번 맞춰보고 다시 흩뜨려 맞추는 일을 반복한다. 놀랍게도 이 파편들은 애초 완성본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파편을 쉽게 잃어버리고, 맞추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 가운데서 인애는 파편마다 다른 모양을 유난히 꼼꼼하게 살펴 자신만의 접착제로 단단히 고정한다. 그 접착제는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양날의 검이라, 삶의 추동력인 동시에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파편이 작으면 접착제가 삶을 뒤덮어버리지만, 파편이 크면 접착제가 삶의 윤곽을 보여주는 촉매제가 된다. 아직 그 모자이크가 어떤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질문을 놓지 않는, 삶에 민감한 사람, 인애를 만났다.






어제의 내가 부끄러운
최인애입니다.




요즘 내 삶의 만족도는 어느 정도예요?

0부터 100이라고 치면 75 정도 되는 거 같아요. 앞으로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불안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일상은 안정적이라 요즘 제 삶은 꽤 만족스러워요. 모아둔 돈이 있으니 당장 굶주릴 걱정 하지 않아도 되고 두 다리 뻗고 누울 집이 있으니까요.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퇴사하고 나서 느슨하게 있다 보니 영 현실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기도 해요. 너무 안전한 공간에 있어서 생존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인애님은 또래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많은 선택을 해오셨던 것 같더라고요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뭐예요?

일상생활에서의 자잘한 선택을 못 내리면서도 인생에서 큰 선택을 해야 할 때는 주저함이 없는 편이에요. 일단 내가 하고 싶은지가 일 순위여서, 지금까지는 ’끌리냐 안 끌리냐‘로 선택해왔어요. 직업을 고를 때도 이게 나의 커리어와 연관되어 있는지보다는 살면서 꼭 한번 해보고 싶어서 했어요.


그 기준이 중요하면서도 어렵잖아요인애님은 본인과 대화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가요(웃음). 자신과 대화를 하긴 하지만 잘 대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자신과 대화해서 혼자 결정을 내리면 좋으련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특히 확신이 없을 때는 귀찮게 물어봐요. 선택했을 때 따르는 책임이 그려지지 않거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요. 

경험의 폭이 좁을 때는 실패에 관한 두려움이 딱히 없었는데 이것저것 경험하다 보니까 전보다 생각이 많아졌어요. 요즘 나이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요.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데 자꾸만 나이 타령을 하게 돼요. 이 나이를 먹고 소속된 직장 없이 무소속으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사람을 설득하는 게 여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겁이 나요.


인애님이 겁을 먹게 만드는 데는 뭐가 작용했을까요?

요즘 겁을 먹는 건 비교할 대상이 많아지면서부터 그래요. 언택트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저는 전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느끼거든요. 인터넷만 봐도 나를 자극할 것들이 엄청나고, 어딜 가든 다 영감인 사람들이에요. 참 멋있고 대단하고 응원하고 싶고 같이 연대하고 싶고 내가 저 크루였으면 좋겠고 누군가를 선망하게 되죠. 인터넷이나 SNS가 활발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존재를 몰랐다면, 이제는 내 주변부터 시작해서 나랑 연관이 없는 사람들, 저 먼 나라 사람들까지로 선망하는 마음이 확장된 거예요. 계속 성장하고 싶고 발전하고 싶으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있는 게 용납이 안 되죠. 그런 게 계속 불안한 것 같아요. 

저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변화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함께 변화하고 싶달까요?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말하면서 좀 거창하다 싶은데(웃음), 사실 없던 길을 만드는 선두자였으면 좋겠다고 상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검열에 빠져서 제풀에 지치는 게 아쉬워요. 더 좋은 길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은 선택을 하고 싶은 듯해요. 끌리는 게 명확한 편이지만 끌리는 게 있더라도 숨을 한 번 고르고 선택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하고 싶다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더라고요그중에서 내가 좋아할 선택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돼요.




사진제공 인애


초등학생 때 학교의 규율에 길들지 않고 지낸 시간이 길었다고요전학 간 뒤에야 내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고 하셨어요

저는 예민하고 불안감이 높은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고 이불에 지도를 그렸거든요. 엄마가 선생님인데도 제게 학교는 놀러 가는 곳이었어요. 다들 선생님 딸이 왜 저러냐고 수군거렸어요. 엄마는 공부하란 말을 일절 하지 않으셨어요.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면서 저 스스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거로 생각하셨대요. 저는 학교에서 왜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창밖을 보며 멍때리기 일쑤였어요. 교과서를 챙기지도 않았어요. 교과서로 딱지 만들어서 혼난 기억이 날 정도로 그저 친구와 장난치기 바빴어요. 당연히 학습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공부를 못해서 바보 취급당했어요. 

전학 간 학교에서는 시험 성적으로 좌절하는 친구들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어요. 분명 저보다 성적이 좋은데도 혼날 걱정만 할 뿐 전혀 기뻐하지 않았거든요. 이후에도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불안감과 함께 계속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린 저는 엄마랑 서점이나 도서관 가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하루는 서점에서 《창가의 토토》라는 책을 읽고 ‘어? 토토가 난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네? 여기 너무 좋다, 나도 이 학교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어요.


감각이 민감했다면 많은 사람과 어울려야 되는 공간에서는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 같아요대처하는 몸의 능력이나 불안을 컨트롤 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랬을 테죠.

맞아요. 중고등 학생 때는 소통할 때마다 혼란을 겪었어요. 특히 고등학생 때는 대안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선후배랑 같이 방을 썼죠.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감정을 느끼는 데 무뎌지는 연습을 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 제게 상처가 될 말을 하면 네가 이러이러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얘기해요. 그럴 때 돌아오는 답은 “너 왜 그렇게 예민해. 그게 왜 기분이 나빠?”인 상황이 몇 번 반복됐어요. 감정을 세세하게 알아채기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먼저였죠. 그럴 때마다 ‘내가 장난을 못 받아치는 아이인가? 이걸 그냥 웃고 넘겨야 할 일인가? 아니면 화를 내도 되는 일인가? 내가 조금 참아야 하는가? 내 말을 해도 되는가?’ 하는 데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어요. 아이들 무리에는 끼고 싶은데 내가 느낀 감정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이 쌓이며 조금씩 오류가 났던 거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괜찮아졌어요.


성인이 된 후에는 그게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어릴 때는 내가 정말 못나서 혹은 그 친구들에게 맞추지 못해서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시기에는 또래 집단이 자아상에 영향을 크게 미치잖아요. 어릴 때 그런 경험이 있으니 아직도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관계가 더 진전되기 전에, 당신과 내가 그렇게 굳이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고 되뇌어요. 그 말을 되도록 안 하려고 하는데 이제 너무 입에 붙어버린 것 같아요.


사실 마음은 정말 친해지고 싶잖아요.

그렇죠. 제가 카카오톡이나 SNS를 정말 어려워하는데요,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스몰토크에 너무 취약해요. 티키타카를 잘하고 싶어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고민해요. 가볍게 툭 던지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문자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거의 편지를 써서 한 번에 보내요. 그래도 만날 때는 태연한 척 할 수 있는데 비언어가 없는 온라인상에서는 어렵더라고요. 내가 몸으로 표현한 것이 문자에 그대로 드러나야 하니까요.


고등학생 때 대안학교를 선택하신 이유도 듣고 싶어요.

저는 학교라는 틀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였어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니까 애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저를 어려워했어요. 저도 학교가 어려웠고요. 남들은 다 자연스럽게 배우는 학교 규칙을 저는 여기저기 깨지고 부딪치면서 힘들게 익혔어요하면 안 되는 게 많은데 왜 하면 안 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거든요. 무슨 일이든 ‘네’ 하고 수긍하기보단 ‘왜요?’라고 물어보는 제가 예쁘게 보이진 않았을 거예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정답이 있는 배움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어요. 특히 국어 시간이 그랬어요. 선생님이 불러준 감상의 정답을 교과서에 받아 적어야 했어요.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정답과 다르게 느끼더라도 의문을 품지 않는 게 현명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고등학생인 저는 이전과 다르게 더이상 손을 들고 왜를 묻지 않았어요. 튀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몸소 배웠으니까요. 그래도 이해가 가진 않았어요.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이상했거든요. 좋은 성적을 받아서 대학에 가면 그럼 그다음은? 끝나지 않는 다음을 위해서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엄마는 제가 공교육엔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어요. 교육자이자 제 양육자이기도 하니까 확실히 느끼셨던 것 같아요. 대안학교를 제안해주신 것도 엄마였어요. 나중에야 《창가의 토토》에 나온 모습이 대안학교라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인문계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기대한 대안학교는 가보니 어땠어요

대안학교에 가기 전엔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학교이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했어요. 상상한 것과 실제는 달랐어요. 대안학교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요. 제가 간 학교는 인가학교라 교과 과정을 그대로 따라야 했고 중간, 기말고사는 물론, 모의고사도 봐야 했어요. 그런 데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었죠.

그래도 좋았던 건 일반 고등학교보다는 선택할 자유가 컸다는 점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연습을 할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과 소통하면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선생님이 먼저 ‘왜’를 물어봤어요. 맞든 틀리든 너나 할 거 없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수업을 만들어나갔어요. 저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대부분 속으로 답하곤 했지만요. 단점이라면 24시간 또래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교 폭력은 더 심했죠.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고등학생 때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아서 그 돈으로 터키로 2주간 배낭여행을 갔어요. 엄마는 후배랑 저랑 둘이서 간 걸 알았지만 아빠한테는 단체여행이라고 거짓말했어요. 여자 둘이 간다고 말하면 안 보내줄 거 같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었는데 대책 없이 갔어요. 영어도 못 하면서 전자사전 하나 안 챙겼고 로밍은 생각도 못 했어요. 터키 여행책이 전부였죠. 나름 터키어로 인사말은 익혀 갔는데 안 통하더라고요. 소통을 할 수 없으니까 온몸을 이용해서 대화한 기억이 나요.




사진제공 인애


어린 시절 재미있었던 일꿈꿔왔던 일들이 지금의 인애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여기는 게 있을까요?

전부 다 제게 영향을 미치고 있더라고요. 내가 무얼 경험하든 다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요. 당시에는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여전히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더라고요. 그때는 흑역사라고 생각해서 이불을 발로 뻥뻥 차면서 밤새 부끄러워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용기 내 준 저에게 너무나 고마워요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저질렀던 무모한 제가 지금의 저에게도 용기가 되더라고요.

연극부에 입단하려고 연극부 선배들 앞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전달하는 기자 역할을 즉흥 연기로 오디션을 보고,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어서 표창원 씨에게 메일을 보내고, 박치면서 랩퍼로 축제 무대에 올랐던 일이요. 어떤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시도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어요.


또 몸 쓰는 걸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춤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것 자체를 즐겨 하시는 것 같았어요마침 연극에 흥미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고등학생 때 드라마와 영화에 푹 빠져 살았어요. 그때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봤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배우라는 직업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이 드라마에서는 모든 것을 잃은 처연한 역할로 나온 배우가 다른 영화에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이 악한 인물로 그려지는 게 재밌었어요. 다양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배우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어요. 집에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전체 대본을 인쇄했다가 잉크를 다 써서 엄마에게 혼난 기억이 나요. 대본을 내 마음대로 뜯어 보는 게 재밌었어요. ‘이 대사를 말할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심정으로 이 대사를 말해야 하지? 이 역할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를 분석하면서 혼자 대사를 주고받는 게 재밌더라고요. 하지만 그 당시엔 직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던 터라 배우라는 직업을 오래 할 확신이 없어서 지레 겁먹고 포기했어요. 그냥 한번 해보면 될 걸 괜히 겁이 났어요.

그래도 연기할 상황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시도했어요. 고등학생 때 가장 많이 연기했던 거 같아요. 성인이 된 후에는 관심이 식었다가 다시 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어요. <괜찮아마을>에서 낭독극을 했는데 아이를 유산한 엄마 역할을 맡았어요. 엄마도 어려운데 더군다나 아이를 유산한 역할이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꽤 고민했어요. 다행히 관객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여전히 저는 무대 위에 섰을 때를 상상하면 설레요. 엄청난 열망은 아니지만, 어떤 역할을 받았을 때 그 역할을 분석하고 온전히 몰입한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려요. 꼭 굳이 배우가 되지 않더라도 조금은 다르게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은 상상에 머물러 있지만요.


<오픈컬리지>에 대해서 한번 여쭤보고 싶은데요고등학생 때 대안학교를 택했듯 성인에 이르러서는 <오픈컬리지>로 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오픈컬리지>는 성인들을 위한 대안학교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내가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움을 함께 나누고, 내가 잘하는 게 있으면 이 배움을 또 누군가한테 나누는 커뮤니티였어요. 마침 제주에 <오픈유니브>가 생기면서 저는 유니브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유니브는 주체적인 배움을 만드는 곳이에요. 이미 짜인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의 주도권을 잡고 온전히 이끌었죠. 어떤 공부를 할지 기획하는 것부터 하고 싶거나 일상에서 불편한 걸 작으나마 바꾸는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제 삶에 대한 ‘why’를 끈질기게 묻고 답했어요. 물론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주제지만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피하지 않고 조금씩 답할 수 있었어요.

특히 수평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수평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했지만, 서로의 나이를 궁금해하지 않고 우리는 모두 친구라는 마인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 좋았어요. 경험과 나이는 비례하지 않는데 괜히 나이가 주는 권위가 있잖아요. 그런 느낌을 받지 않고 모두가 동갑내기 친구일 수 있었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동시에 저에게 붙은 꼬리표들이 다 떼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지금, 여기 있는 최인애만으로 말이에요. 무엇보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친구들을 만난 게 정말이지 행복했어요. 다시 돌아가도 즐거울 만큼요!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네요.

어설픈 아이디어라도 이들 앞에서는 검열 없이 마음껏 말할 수 있었어요. 좀 어설프면 어떠냐고 말해주는 친구들 덕분에 저부터 저를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됐어요완전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안정감을 느꼈어요굳이 나를 멋지게 꾸며내거나 가공할 필요가 없는 편한 시간이었어요.

당시 저는 감정이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할 때였어요. 밥 먹다가도 그냥 눈물이 나고, 잠을 자다가도 눈물이 나고 일어나서도 그냥 눈물이 나는 때였죠. 그런 저를 봐도 친구들은 이해해줬어요. 시절인연이라고 했나요? 그간은 저를 사회성이 없고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네, 나도 환영받을 수 있는 존재구나, 여태 이런 사람들을 못 만났을 뿐이지 이런 관계도 있구나, 앞으로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괜찮아마을>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값진 경험을 하고 나니까 용기가 조금 생겼기 때문이에요.




사진제공 인애


그다음 스텝으로 결정하신 <괜찮아마을>은 어땠어요?

유니브에 있는 동안 다음 스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됐어요. 안전한 곳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도 저 자신을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지금 내가 시도하고 싶은 것을 두고 같이 판 벌일 동료가 있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하던 찰나에 한 친구가 <괜찮아마을>을 소개해줬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문구가 마음에 훅 들어왔어요. 여기서는 유니브처럼 어떤 시도든 해봐도 괜찮을 듯한 예감이 들었어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괜찮아마을>을 기획한 0장0장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프로그램 참가자였던 제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참가자들 앞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죠. 그러면서 제가 무대에서 혼자 있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로이 알게 됐어요. 사람들 앞에서 준비한 걸 펼친다는 점에서는 연극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연극 할 때의 감각과는 달랐어요. 연극은 기본적으로 무대 위에서 선보일 캐릭터가 있고 무엇보다 극의 이해도가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시너지를 내는 거잖아요. 하지만 프로그램 진행은 혼자서 참여자들과 계속 소통해야 하는 점이 어렵더라고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때 알았죠.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걸요.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온몸에 힘을 주기보다 오히려 힘을 빼고 흐름을 탈 수 있어야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는 걸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고 나서야 알았어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부족한 게 잘 보이잖아요저는 그럴 때 타인의 입을 통해 내가 보지 못했으나 잘한 점들을 모으면서 시야각을 넓히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함께 일한 동료나 참가자가 전하는 칭찬을 온전히 귀담아들을 수 있을까요. 칭찬보다는 오목조목 개선할 점을 알려줄 때 습자지처럼 받아들여요. 칭찬도 습자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또 그림과 사진으로 전시를 열었다고요하나는 개인전하나는 단체전자신을 표현할 수단으로 선택했을 수도 있겠다 여겨요전시회를 열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전시회를 열게 된 계기라… 시작은 호전적인 마음이었어요. 예술은 타고나야 한다는 말과 담판을 짓고 싶었어요. 예술 관련된 학과를 나오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했어요.

저 자신에게도 궁금했어요.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내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좋아했지만 잘하는 건 아니었어요.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그림은 아니었으니까요. 제 그림을 본 친구들은 기괴하거나 무섭다고들 했거든요. 느껴지는 대로 그린 거였는데 아마 제 마음을 표현한 게 그런 그림이었을 테죠. 그래도 계속하고 싶었어요. 그 당시 제게 그림은 감정을 분출하는 통로였어요. 올라오는 감정을 말이나 글로는 어떻게 다 표현하지 못하니까 그림으로 풀어냈죠. 그래서 첫 전시는 그림을 그리면서 마주한 저의 감정의 생김새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제 그림을 통해 저마다 외면했던 감정을 하나씩 꺼내 보는 시간이기를 바랐어요.



사진제공 인애


단체전에서는 <쓸모의 연대기>라는 작품을 만드셨어요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더라고요.     

도구화가 짙게 퍼진 사회다. 목적이어야 하는 본질은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처럼 취급된다. 도구화 현상이 비대해질수록 인간의 존엄성은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모든 것에서 쓸모를 찾는 사회에서 나는 가치 없는 상품에 불과했다. 사회가 원하는 기준이 충족되지 못할 때마다 내 존재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최상의 상품이어야 했다. 잘 팔리고 싶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기 계발로 자아는 더 나은 성과를 좇는 도구로 전락했다.
삶에서 쓸모없다고 치부된 행위를 다시 들여다봤다. 정말 쓸모없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물건은 사진을 매개체로 현재의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궁금하다. 당신에겐 인간이 존재만으로 가치 있다는 말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보기 좋게 전시하는 게 아니라 쓰임이 다한 물건 위에 제 생각을 담아내고 싶어서 비닐에 글을 인쇄해서 설치했어요. 이 작품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천장에 매달린 상태라 스쳐 지나가기 쉬운 위치이자 바람이 많이 불면 글자를 볼 수 없었어요. 이것은 작품일까, 아니면 가치 없는 쓰레기에 불과할까를 두고 저 혼자 실험한 것에 가까워요. 

<쓸모의 연대기> 글은 첫 번째 관객인 저 자신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요. 인애야 너는 부품이 아니야너는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사람이야괜찮아라는 말을 스스로한테 해주고, 나아가서는 관객들과 같이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지금 이 사회는 잘못됐어. 상황을 개인화하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만드는 이런 사회 구조가 정말 괜찮아?’

첫 전시에서 공간을 빌려주신 사장님이 그림 몇 점이나 팔렸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팔 수도 있었지만 안 팔겠다고 한 터라 굳이 답하자면 한 점도 팔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팔리는 그림은 무엇일까? 내 그림은 팔릴 가치가 있는 그림일까? 가치는 어떻게 논하게 되는 걸까? 팔리지 않는 그림도 가치가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그동안 제가 계속 품어왔었던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1인분의 몫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죽어야 하는지 고민했던 것도 전시와 맞닿아 있기에, 쓸모없다고 여기던 물건들을 모아서 전시해본 거죠. 이 사회의 태도가 여전히 사람을 부품으로 보잖아요. 구조 안에서는 개인이 나로서 온전하기가 힘들어요. 이게 비단 내 문제만은 아닐 텐데 말이에요. 이런 문제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했어요.


어쩌면 인애님이 새로운 공동체를 계속 찾아 헤맸던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건데도 이렇게 묻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말 어쩔 수 없을까우리 어쩔 수 없더라도 조금 뭔가 이야기를 해보면 어때?’ 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해줄 사람들을 계속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사진제공 인애


인애님이 해보신 실패에 관해서 듣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제겐 그동안 해온 모든 게 다 실패로 느껴져요. 아직도요. 실패의 기준이 낮아요. 누군가에겐 실패가 아닌 게 저한테는 다 실패였어요. 요즘엔 실패 대신 시행착오라는 이름을 붙여주려고 노력 중이에요.

제 오랜 연인이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알려줬어요. 그때까지 저는 망했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어요. 기다 아니다를 단번에 파악해 포기도 빠르고요. ‘이거 안 되네, 나는 재능이 없네, 못하네’라는 말을 제삼자가 아닌 최인애가 최인애한테 제일 쉽게 말했고 세상에서 가장 깐깐한 비평가였어요. 그러다 이 친구를 만나면서 ‘다시’라는 말이 제 안에 들어오게 됐어요. 하지 말자가 아니라 다시 하자.’ 제게 엄청난 실패를 이 친구는 작은 실패로 만들어줬고, 이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다음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게 했어요. 

이 친구를 보면서 삶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이런 거구나,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를 알았어요. ‘다시 하면 되지’란 말을 그냥 하는 거예요.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게 와장창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이걸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죠. 그래서 실패할 때마다 아직도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만, 회복이 빨라졌어요. 다시 하면 되지에이 그럴 수 있지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하자, 이렇게 자신에게 주술 외우듯이 말해요.


얘기를 쭉 들어보니 인애님에게는 질문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맞아요. 질문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질문하면서 답을 얻지 못할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이 돼요.

가장 오랜 시간 골몰한 질문들이 있어요. ‘나는 왜 살고 있는 걸까? 삶에서 자신의 몫은 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1인분의 삶을 살고 있는가? 쓸모가 없다면 주변 사람에게 폐 끼치지 않고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굳이 이 삶을 지탱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필요조건을 계속 따졌어요. 그 당시엔 내면에 화가 많은 상태라 감정 조절도 안 되고 우울증도 심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질문을 해봐도 계속 맴돌 뿐이니까 혼란스럽기만 했어요.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배운 게 있어요. 나한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가나를 확장하는 질문이 아니라 고립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 인데요. 그게 실마리가 돼서 이후로는 저를 열어놓고 확장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던 듯해요. 두렵고 불안하면서도 조금씩 저를 움직인 건 질문이었어요.


죽음이라는 키워드도 있죠두려운데도 탐구하다시피 들여다보고 계속 더 알고 싶어 하면서요인애님이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은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인 거예요아니면 앞이 더 그려지지 않을 때인 거예요?

매일 죽음을 떠올려요. 그래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요. 그건 제가 열심히 살아서가 아니라 죽음이 그렇게 큰 이벤트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 단골 멘트로 듣는 말이 있어요. “노인이 된 너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아? 그때는 네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안 궁금해?” 궁금하지 않더라고요. 노년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삶을 더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요. 지금의 삶이 불안해서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타인이 저더러 자유롭게 살아서 부럽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살 수 있냐고들 물어요. 질문을 곱씹어 보니까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그럴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계속해서 죽음을 떠올렸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저는 사회가 규정한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어요. 제대로 된 길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길을 만들어서 나아가야 하고, 그 길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돌아가야 해서 앞이 안 보이는 건 너무 당연해요. 길을 계속 내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니까요.

<열정대학>에는 죽음학과가 있어요. 그곳에서 관에 들어가고 유서를 쓰는 경험을 했는데요. 그때 더 확고해졌어요. 지금 죽어도 정말 괜찮다는 걸요. 최근 1~2년 사이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셨어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처음이었어요. 죽음을 피부로 느끼는 계기였어요.


죽음이 아주 멀리나와 별개의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답을 찾거나 질문을 던지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많이들 생각하는 듯해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고 이 정도면 인애 씨는 이미 자살할 정도의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에 스스로 왔다는 건 삶에 대한 큰 열망이 있는 거라고 했어요. 충격이었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죽고 싶은 사람에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니. 속으로 돌팔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부정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삶에 큰 열망이 있었기에, 호기심이 있었기에, 계속 문을 두드리고 나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가까운 시일 내에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들판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요. 근데 제가 벌레를 너무 무서워해서 걱정이에요(웃음). 돗자리를 깔고 누울 수도 있지만, 돗자리 안 깔고 눕고 싶어서요.


무소속 기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안과 관계 맺는 방법을 알아가는 시간이에요. 조직에 속했다고 해서 불안이 사그라들진 않더라고요. 그 안에서는 무소속일 때와는 다른 불안이 엄습해요. 어찌할 수 없는 불안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어요.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주체적으로 쓰는 방법을 터득해나가면서요.


어른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른이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요. 현실에 안주해서 모른 채 눈을 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처한 상황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 제가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해요. 감당하기 힘든 문제는 눈을 감고 한동안 회피하거든요. 

말하고 나니 제가 만든 어른이라는 기준이 너무 깐깐하네요. 말 바꿔도 되나요(웃음). 회피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요너무 늦지 않게요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제쳐 놓으면 안 되니까요.






✨인애님을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inxside


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사진 제공    인애
copyright ⓒ 미란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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