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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un 28. 2021

취향 | 다양한 줄기 아래의 일에 무심하지 않은 태도

소민의 취향


✨무소속 6개월

✨합정역

✨취향





취향을 얘기할 때 고구마 줄기를 떠올리곤 한다. 순식간에 땅바닥을 뻗어 나가는 기세도 그렇거니와 수확할 때 줄기를 잡아당기면 있는지도 몰랐던 고구마가 우수수 딸려오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고구마는 열매가 아니다. 뻗어 나간 줄기가 땅 밑으로 뿌리내리면서 양분을 저장하는 덩이뿌리, 즉 고구마를 만든다.     


소민의 취향도 고구마 줄기 같다. 자신이 누빌 수 있는 땅바닥인지 금세 파악하고 괜찮다면 장악한다. 그의 관심과 호기심으로 줄기는 날마다 튼튼해진다.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면 줄기를 붙잡아 고구마를 확인하곤 한다. 얼마만큼 있는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한 신에서 차이와 유사를 가르며 축적한 내용이, 다른 신에서도 반복됐다. 거기서 동일성을 발견하고 근원을 파악하다 보니 하나로 귀결됐다. 이 과정을 취향의 다양성, 무경계성, 확장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소민을 만났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여러 가지의 삶을 살아가는
정소민입니다.





덕질하는 게 있나요

이 질문을 받고 덕질을 뭐로 정의할 수 있을지 오래 고민했어요. 저는 관심사가 아주 다양한 편이고, 하나만 고르는 걸 못 하는 사람이에요. ‘무경계성’, ‘확장 가능성’은 제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기준이거든요. 즐기는 것이 굉장히 많아서 열거해보자면, 우선 24절기를 챙기며 그때마다 파인다이닝을 경험하고 리뷰를 작성하고 있어요. 기호품 소비 양상에 관심이 많아 위스키, 차, 커피 등 수많은 기호품을 공부하고 경험에 자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죠. 또 나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집을 만드는 일에 열성이고요. 

여러 관심사의 원류가 뭘까 파고들다 보면 결국 ‘취향의 다양성’이 나와요. 사람마다 어떤 취향이 있는지그 취향은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발현되었는지만약 개별적인 취향이 아니라 집단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관한 총체적인 덕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13살 무렵의 내가 재밌어하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그때도 요즘처럼 한창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었어요. 6공 다이어리를 사서 시나 좋아하는 글귀, 노래 가사를 적고, 오빠들의 사진도 붙이고 그랬죠. 아, 그 일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도 있는 스크랩을 좋아했어요. 당시 꿈이 요리사여서, 집에서 보는 신문에서 미식, 요식업계 기사를 스크랩하고 요리 레시피를 모았었어요. 스크랩북은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실 즈음 좋아한 아이돌이 혹시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H.O.T.요. 사실 H.O.T. 외에 다른 가수들은 관심이 없었어요. 노래에 관심이 있던 게 아니거든요. 아마 그때 좋아했던 것도 그냥 가장 인기가 많아서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마 그 자리에 어떤 사람, 어떤 가수를 넣어도 똑같이 그랬을 것 같아요. 나는 그 세계가 궁금했고 그 세계를 알게 해준 매개가 그 가수였을 뿐. 그걸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니까 굳이 다른 가수를 한 번 더 좋아해 볼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이 났어요. 취향이 될 뻔했는데 취향의 범위에서 비켜난 상태예요.      


소민님의 취향에서 덕질이란 점만 한 크기겠다 싶어요.

맞아요. 다양한 내 취향 중 하나에 덕질이 있을 수 있죠. 





어릴 때 흠뻑 빠진 일들에는 뭐가 있어요?

굉장히 컨셉충인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웃음). 가장 오래전 기억이라고 여겨지는 건 5~6살 무렵인데요. 집에 다구 세트가 있었거든요. 한복을 입고, 소반과 다구 세트를 꺼내 티타임 놀이를 하곤 했던 기억이 나요. 자라면서 한복이 점점 작아지는 바람에 엄마가 입혀주지 않았는데, 그럴 땐 생떼 부리면서 울기도 하고요. 중고등 학생 때는 의상과 소품, 콘텐츠를 완벽하게 갖춘 데이트나 노는 날을 기획하길 즐겼어요. 나라나 도시가 콘셉트가 되기도 하고, 시대가 콘셉트가 되기도 했죠. 대학에 와서는 그런 걸 공부로 하기 시작했고요.     


떡잎부터 남달랐네요눈에 띄는 건 한복을 입었다는 점이에요왜 드레스가 아니었을까요?

드레스가 없었어요(웃음). 드레스는 그럴 때 입는 거잖아요. 음악, 피아노 콩쿠르나 막내 고모 결혼식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평상시에 그걸 입고 활동하거나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듯해요. 만약 외화를 많이 보고 수입 문물에 익숙했다면 드레스를 입고 티타임하는 나를 그려볼 수 있었을 테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았을 거예요. 우리 집에는 그런 게 없는 대신 다구가 있으니 자연스레 그만큼의 상상을 하게 해준 셈이죠.     


한복도 비슷하게 학예회나 명절에 입는 정도로 예상하거든요한복을 즐겨 입고 놀았다는 데서 복식에 관심이 있었겠다고 짐작해요.

복장보다는 TPO가 갖춰진 그 신, 연출이 중요했어요. 나무 살이 있는 우산과 소반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특히 나무 우산은 냉장고 위에 보관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어른이 내려주지 않으면 쓸 수가 없었어요. 저는 내려달라고 자주 성질부렸죠. 엄마 입장에서는 낡고 더러운 물건을 꺼내면 일이 많아지니 자주 쓰면 안 되는 물건이었을 거예요. 어린 저는 그게 항상 내 손에 닿을 만큼 내려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물건 중에 하나에요.      


집에서 그렇게 하신 거죠?

네. 혼자서요. 아주 어릴 때, 거의 2살 무렵의 사진이 남아있어요. 사진 속의 저는 한복 차림으로 차 한 잔 놓고 우산 펴고 앉아있거든요. 엄마가 찍어놓은 사진을 커서 보고 그걸 계속 따라 한 것 같기도 해요. 제 머릿속에 ‘이 풍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여긴 그림이 어쩌면 그 사진이었을지도요.      


컨셉충이라고 하셨지만 요즘에는 무드를 잡고 스타일링하는 직업이 따로 있잖아요.

그러니까요. 고등학생 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미술감독이었어요. 지금 말로 하면 영화미술 감독. 로케이션 장소 섭외하고 세트장 디자인하고 의상 같은 것까지 책임지는 일이요. 그때는 그런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막연히 ‘그런 건 누가 하는 걸까?’라고만 생각했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대 미술부터 접근했어야 하는데 주변에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영화도 너무 낯설었어요.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야 그런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후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꼭 그 일을 하지 않더라도 제가 해오거나 하는 일에 다 연결되어 있긴 했어요. 미술감독이라는 건 비주얼적인 작업이잖아요. 그런 직업이 있는 걸 알았을 즈음에 제가 공부하고 있거나 하고 싶었던 건 테마파크 기획자였어요.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졌죠(웃음). ‘완벽하게 세팅된 테마파크를 만들 거야!’로 변했는데 그 꿈이 오래 가진 않았어요. 왜냐면 문화를 공부하다 보면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세계나 환경 등을 자연스럽게 배우거든요. 내가 만들려는 게 이렇게 파괴적인 거였구나, 이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러고 나서 도시계획으로 넘어간 거예요. 

비록 완벽하게 세팅하거나 비주얼적으로 세팅하는 건 아니지만, 정책이나 정서, 법, 제도로 어떤 세계관이 세팅되는 거로 생각하면 도시계획도 그 연장선에 있더라고요. 그때 진로를 정했죠. 문득문득 ‘이제 120세까지 살아야 하는데 뭘 하고 사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놓쳐버린 꿈들, 하고 싶었던 것들을 떠올려 보곤 해요.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능력은 길러지는 건지 타고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훌륭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많고 내가 잘할 자신은 없어요. 20대 후반 넘어가면서부터는 남이 더 잘할 수 있는 걸 남한테 맡기고 저는 그걸 즐기는 방식을 배우려고 많이 노력해왔어요. 다른 말로 포기라고 하죠(웃음).





티타임이라는 행위가 현재까지 이어져 차나 커피 같은 식음료에 관심 가지는 걸까요

글쎄요. 저는 특별히 좋아해서 이런 것들을 많이 취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환경이 모든 사람에게 당연했으면 좋겠어요

한 번은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는 친구랑 이야기했는데요, 친구는 라이프스타일이나 삶의 방향이 맞는 사람이 하우스 메이트로 들어오면, 절기마다 제철 채소로 밥 해 먹고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대요.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걸 챙기고, 식생활에 공을 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좋은 음식이 뭔지, 맛있는 음식이 뭔지 아는 것도 어떤 자원이고, 나의 취향이 뭔지 명확히 안다는 것도 경험의 빈부격차가 있는 영역이죠. 

저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해요. 최근까지도 한국 사람들은 풀이나 허브의 다양한 맛을 낯설어했잖아요. 이제야 그걸 좀 즐길 수 있게 된 데는 해외여행 경험이 깔린 거죠. 이렇게 사회문제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아직도 대다수가 제한된 선택지만 부여받고 그게 당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기쁨이 되게 컸어요.     


어떤 거요?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요. 제가 어렸을 땐 커피는 맥심이었어요. 그게 싫으면 향은 정말 좋으나 맛은 쓰레기인 헤이즐넛 원두커피, 아니면 맥스웰이니까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컸죠. 어느 날 우연히 들어간 로스터리 카페에서 5천 원짜리 드립 커피를 마시게 됐어요. 몰랐는데 아저씨가 로스팅하면서 맛을 보느라고 커피를 많이 내리는 가게였나 봐요. 커피 좋아하냐고 물어서 당연히 싫어한다고 했죠. 근데 캐러멜 마키아토 같은 메뉴가 없어서 이걸 시킬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더니 드립 커피 3잔을 내준 거예요. 과테말라 같은 무난한 커피에서 시작해 몇 잔을 연달아 마시면서, 나 같은 입맛도 커피 맛을 구별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이후엔 그런 카페 가는 것도 안 무서워지고 이것저것 주문해서 마셔보게 되더라고요. 

한 번은 도쿄 여행을 갔는데 마침 길목에 올리브유 전문점이 있었어요. 올리브유가 잔뜩 들어 있는 워터저그가 한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죠. 그램으로 판매하는 올리브유 전문점이었던 거예요. 모두 올리브유고 색깔도, 향도 정말 다양하더라고요. 비싸 보이고 누가 봐도 안 사게 생겼다고 여겨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런 가게가 있는 정도의 사회라는 걸 느낀 계기였어요. 커피로 시작했지만 사실 그런 건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무궁무진하게 보이는 거니까요. 결국 부의 영역이기도 하고요.      


삶에 전환점이 된 경험들이네요.

차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주로 이렇게 전개돼요. 사실 제가 더 크게 관심 쏟아왔던 부분은 취향의 다양성인데요. 어렸을 때부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선생님께 많이 불려가던 학생이었어요. 노는 애도 아니고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고 말썽 피우는 것도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을 꼭 하고야 마는 성미였어요. 정식으로 이야기하면 문제 제기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금 틀어서 장난스럽게 얘기하면 선생님 입장에서 빈정대는 거로 들렸던 거죠. 그래서 오해받은 적도 많았고 “너는 어떻게 생겨 먹어서 그 모양이니?” 이런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게 얼마간 쌓여왔던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다 똑같이 하라고 하지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저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건데왜 다 이렇게 해야 하지?’라는 점이 제 안의 화두였죠

대학 부전공이 문화콘텐츠학이에요. 콘텐츠는 100% 상업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단어고, 문화는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 만들어진 좀 더 개념적인 단어잖아요. 둘을 마주치게 만드는 방식에서 매번 큰 갈등을 겪어야 과제를 제출할 수 있었어요. 시장성을 내려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빼야 하는데, 이걸 빼면 문화 콘텐츠로서의 차별성을 기대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돈이 안 되더라도 누군가는 이걸 해야 한다는 게 제 사고방식이었어요. 콘텐츠성을 평가받아야 한다면 현실과 타협해서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왜곡하거나 포장하는 일이 필요했고 그 점이 큰 딜레마였죠. ‘이 시장성이라는 걸 도대체 누가 결정하는 거지? 왜 다수가 좋아하는 게 이렇게나 한 방향이지? 정말 이상하다, 이건 모함이야(웃음)’ 그런 과정으로 획일성을 만들어내는 권력, 자본에 대해 고민이 컸어요. 

그러니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영역 대부분을 의심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웠죠. ‘왜 그동안은 인스턴트 커피를 주로 먹었지? 왜 마트에는 빨간 당근밖에 안 보이지?’ 이런 세세한 면면들이 서로 관련 없는 게 없었고, 결국에는 차나 커피도 연결되더라고요. 수익성이 크고 출하량이 많은 품종을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재배해 최대치의 효율을 내고, 전국 슈퍼에 똑같은 채소가 깔리고 우리는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먹고…. 이런 생태계를 깨닫고 나니까 문화나 먹는 거나 다 똑같다, 이건 다양성이 아니지. 여러 브랜드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거로 현혹하면 안되지(웃음), 나는 정말 다양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쉽사리 문화를 만들거나 바꾸지는 못하니까할 수 있는 선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며 시도했던 거네요경험해보고 먹어보면서.

우선은 먹어보는 즐거움이 커서 이유나 목적이 딱히 없었어요. 올리브유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걸 알고 나면 어떤 식당에서 올리브유를 줘도 나한테는 이야기가 생기는 거잖아요. 아주 개인적인 취미나 취향으로 대했죠. 나중에 공부나 일의 측면에서, ‘기업들은 그렇다고 쳐. 근데 사람들은 왜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국면으로 넘어왔어요. 저는 이걸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는 어떤 삶의 여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때 다수와 다르면 되게 두렵잖아요그 감정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제 결론은 그런 걸 존중받아본 적 없는 것의 한계존중받아본 경험이 없는 삶의 한계였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어른들도 그렇고, 얘기하자면 끝도 없어요. 그런 고민이 도시정책으로 넘어가서 참여민주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이어졌죠. 내가 어떤 발언을 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져서 우리 동네가 바뀌었다는 경험을 일상 속에서 많이 만들어내는 일이요. 그게 공교육을 바꾸는 거나 독서 교육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스케일 큰 변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그것도 되게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소민님은 취향에 기반한 공부와 일로 흘러가고 있네요내가 계속 공부하면서 그 취향을 깊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비슷한데 ‘내 취향에 속았어’ 이런 부분도 강해요. 예를 들어 덕질이 좋은 거라고만 얘기하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까 안 좋은 것도 있었다고 인정한 거죠. 그러면 좋게만, 또 얕게만 바라보는 그 바닥을 뜨고요. 커피가 좋아서 공부했는데 커피 농가의 문제점을 알게 된다든지, 테마파크가 좋아서 공부했는데 테마파크의 파괴적인 면을 알게 된다든지 하는 부분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본질적인 문제로 파고 들어가고 있더라고요. 내가 실망하는 내 취향의 모든 것이 연결돼 있었고 하나의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 순간, 다 연결된 공부라고 생각했던 듯해요.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 취향에 영향을 주었거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이 있나요?

집 취향이라고 하면요. 2016년에 교토로 여행을 갔는데, 그때 유명한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집에서 머물렀어요. 일본의 흔한 2층 주택에 주인은 2층에 살고 1층 방들을 에어비앤비로 운영하면서 바깥으로 난 쪽엔 매장이 있는 구조였는데요. 이 호스트는 교토예술대학에서 공예를 하던 친구였던 거로 기억해요. 아주 오래된 집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생명력 있게 쓰는 모습에 감명받았죠.

유명한 사람으로는, 일본 디자이너인 나가오카 겐메이를 들 수 있어요. 롱 라이프 디자인을 모토로, 오래되고 좋은 디자인을 조명하고 현대에도 쓰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디자인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에요. 이분으로 인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디자인이라는 모종의 행위가 결국 ‘최적의 상태’를 스스로 찾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계발 본능 같은 거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집이라는 데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지금의 집을 만든 순간이 있죠. 독립할 때 새벽에 배낭 챙겨서 가출하듯 나왔어요(웃음). 처음부터 메뚜기처럼 살았죠. 수중에 30만 원이 있었고 보증금 없는 셰어하우스에 들어간 다음 알바를 구했어요. 30~35만 원짜리 셰어하우스를 왔다 갔다 하다가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 게 옥탑방이었어요. 독립하고 열흘 정도 몸을 의탁한 친구네 집이었죠. 친구가 살 때는 엄청 넓어 보였는데 제가 살 때는 신발장같이 좁았어요(웃음).     


짐이 엄청 많으시구나.

집에 있는 옷가지나 책들을 다 들고나왔거든요. 처음으로 혼자만의 공간을 갖게 됐으니 로망 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비록 조그만 공간이지만 친구들 불러서 파티도 하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집에 가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집에서 고양이가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12시 전엔 집에 가고 싶지 않고, 들어가면 지쳐 쓰러지듯 잠만 자고 나오곤 했어요. 본가에서 살 때도 그랬거든요. 집이 저한테 휴식 공간이나 머물고 싶은 공간이 아닌 불편한 공간이었어요. ‘그렇게 성장해서 이런 건가?’ 하면서 편하게 남 탓했죠. 

어느 날은 허브를 사다가 키우는데 허브는 바로 분갈이를 해줘야 한대요. 포트에 담겨 있는 채로 키우면 금세 죽는다 그러더라고요. 얘가 시들어가는 걸 보고 있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네. 땅에 있는 것처럼 성장할 수 있는 건데 내가 화분을 땅처럼 안 만들어 줬으니까 얘가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싶었어요. 내 삶이 참 이런 화분 같다계속 화분을 갈아가면서 땅에 심기지 못하고 이렇게 좁은 화분 안에서 살아야 하는구나그러면 아무리 좁아도 이 화분을 진짜 땅인 것처럼 느끼게끔 만들어야겠다고 여겼어요. 그때부터 살림의 시대가 시작된 거죠. 

내 집을 그저 뚜껑이 있는 침대가 아니라 집답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고 엄청나게 몰입한 시기였어요. 그때 다이소에 있는 물건 대부분을 샀을 거예요. 퇴근하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서 필요할 것들을 바구니에 막 담아요. 분명 1천 원짜리를 골랐는데 계산할 때는 5만 원인 거예요. 그걸 몇 개월 지속한 듯해요. 정말 월급이 모자랄 정도로 돈을 쓰고 버릴 거 다 버리고 나니까 내 삶, 내 생활의 시스템이라는 게 생기더라고요. 그걸 스스로 찾아냈을 때 기분 좋았어요. 암벽등반을 해낸 성취와 비슷할까요.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하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기 삶의 시스템이 잘 만들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동경하게 됐죠. 그걸 찾았어도 유지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거든요. 어쨌든 자기를 잘 관찰하는 영역이라. 

예능 <신박한 정리>에 나오는 거랑 비슷해요. 옷을 항상 의자에 걸어놓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 옷걸이를 놔주면 되지, 그 의자를 옷방으로 치운다고 옷이 옷방에 걸리는 게 아니잖아요. 나한테 얼마나 딱 맞는 생활을 꾸리느냐. 그러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골몰해야 하고, 애정이나 돈, 시간도 많이 들여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됐죠. 처음에는 집에서 시작해 다음에는 동네 만들기 같은 거로 확장해왔어요. 집이 너무 좁으니까 집이 침실이라고 하면 거실로 쓸만한 카페를 찾고 식당으로 쓸만한 술집을 찾는 식으로 영역을 넓혀나갔죠. 사실 낯선 동네 이사하면 낯선 스트레스가 있잖아요. 미루지 않고 이사 간 날부터 미친 듯이 산책한다든지 지름길, 세탁소 가는 길 등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딱 세팅해놓고 나면, ‘내가 정말 안정적으로 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돼요. 일종의 땅 같은 화분 만들기 프로젝트에 들어간 거죠.     


그러면 지금은 그 땅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 같아요?

식물에 비유하자면 어린 모종일 때는 어떤 땅에 심기고 관리받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몇 년 그렇게 살아서 생명력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연륜이 쌓이면 그 땅을 자기 스타일대로 바꿀 에너지도 생기거든요. 그 뿌리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에너지. 지금은 어딜 가서 어떻게 살더라도 내 삶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무게중심도 굉장히 확실해요. 삶을 우선 세팅하고 다음이 있는 쪽으로 잡힌 것 같아요.      


주도적으로 계속 뿌리내리려 노력하셨다고 느껴요이사하게 되면 그 동네 주변을 내 집처럼 계속 만들어가고 발굴해내는 과정 자체도 대단하고요.

이 부분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또래 여자들이 새로 집 구할 때 제가 이렇게 많이 말하거든요. ‘무조건 동네는 걸어봐야 한다.’ 연결되어 있는 감각 같은 게 있거든요.

갑자기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요. 제가 처음 집 나왔을 때 단칸방에 살면서 매달 50만 원씩 냈어요. 돈 없다고 하면 엄마가 들어오라고, 돈이 아깝지도 않냐고 그랬죠. 그럼 제가 “엄마, 자유를 누리는 데 필요한 비용이 50만 원이면 너무 싸, 200만 원도 낼 수 있어”라면서 어떻게 자유에 값을 매기느냐고 했어요. 엄마는 저더러 헛소리한다고 했죠(웃음). 

어느 날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그 많은 선택지 중에 굳이 이 돈을 내고 이 고생을 하면서 서울에 사는 건 서울이란 도시를 구독하고 있는 거라는 말이 나왔어요. 사실 저는 구독 서비스를 이용할 때 그렇거든요. 내가 매 순간 알차게 쓰지 않더라도 언제고 필요할 때, 하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상태로 세팅해두는 게 일종의 의료보험 같아요. ‘서울 구독’ 역시 내가 이걸 당장 쓰지 않고 3개월에 한 번씩 한남동에 가더라도내가 가고 싶을 때 ktx 안 타고도 갈 수 있다는 것이 서울 구독의 매력이다했죠이 도시에서의 삶을 월세로 구독하고 있는 거로 생각하면 싸죠(웃음)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나로 사는 것에 가장 큰 무게중심을 두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소속이라고 여기는 지금취향을 맘껏 누리면서 지내고 계시나요?

논문 쓴다고 최근 한두 달은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취향은 부리고 싶은 대로 부리면서 지내고 있어요.      


시간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2가지를 계속 고민하게 돼요. 하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업을 하고 싶고요. 하나는 극강의 비건 레스토랑을 만들든가, 고깃집 대신 야채집을 만들고 싶어요.

어렸을 때 꿈이 레스토랑을 만드는 거였어요. 국내 여행을 가면 그 지역 특산물로 한상차림 나오는 곳 있죠. 봉화는 송이 정식, 단양은 마늘 정식 이런 거요. 그게 정말 놀라웠던 이유는 서울에서는 음식을 한 가지 종류로밖에 안 먹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지역에서는 특산물이 메인이 된 다양한 메뉴를 볼 수 있었어요. 마늘 정식에는 마늘 튀김도 나오고, 마늘 소스로 한 삼겹살도 나오고, 마늘을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한상차림인 거예요. 봉화에서도 송이 정식을 먹었는데 마찬가지였어요. 

그게 맛있고 맛없고를 떠나서 한 가지 재료로 다양하게 베리에이션 할 수 있는 상상력이나 시도가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많이 연구하고 지원하면 엄청 간단해 보이는 식재료로도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그런 연구를 겸하는 레스토랑을 열고 싶었거든요. 지역별로 기후가 다르니까 계절별로 봄, 한여름, 초여름에 나는 식재료가 다를 것이고 그런 식재료들을 가지고 뻔한 방식이 아닌 다양하게 먹을 수 있도록 누군가 연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연구할 자신은 없고 돈을 많이 벌어서 돈을 내는 사람이 돼야지, 이런 생각이었어요.      


획기적이네요!

한상차림이라면 가운데 떡갈비가 올라가는 정형화된 모습이 있잖아요. 특산물은 채소인 경우가 많으니까 채식 연구를 하는 게 훨씬 확장성이 있고 앞으로도 도움이 되겠다 하는 식으로 구상하게 돼요. 저는 지금도 먹으러 다니고 비싼 레스토랑 가거든요. 그런 데는 한상차림 대신 가는 거예요. 한식은 갖은양념, 그리고 참기름과 참깨로 모든 음식을 마무리해요. 더 이상 그런 건 먹고 싶지 않고, 제철 채소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접근한 음식들을 먹고 싶을 때는 그 돈을 주고 누군가 연구해놓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어요. 사실 그런 데 쓰는 돈은 아깝지 않죠. 제게 똑같은 식재료 100개가 있다 한들 이런 레시피를 생각할 수 있을지 되묻게 되거든요. 가면 신기한 접근을 많이 해요. 

그런 거랑도 연결돼요. 요즘은 품종에 관심이 높아져서 딸기도 다양한 종류로 팔잖아요. 이게 다 취향에 관심이 커지면서 생기는 일 같아요. 채소도 농사짓는 것부터 같이 연구하고 그걸 먹는 방법도 다양하게, 또 맛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면서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다면, 사람들이 튀긴 동물성 단백질이 들어가야만 맛있다는 데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업은 어떤 식이에요?

제가 남 이야기 듣는 걸 참 좋아한다고 항상 소개해왔는데요. 할머니들 이야기 듣는 걸 진짜 좋아해요. 학교 다닐 때 안동 종가에 가서 종부님 인터뷰하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이전까지 저는 종부님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적이었어요. 머리를 쪽진 무서운 시어머니에 제사를 호령하는 모습이요. 그때 제가 만난 종부님들 중에는 제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를 가진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셨어요. 그중 몇 분이 인상에 남아요. 

한 분은 농구 선수였대요. 그러니까 결혼을 40년에 했으면 40년 전에 이미 농구 선수였던 거예요. 여자 농구 선수. 결혼하면서 그 직업을 포기한 거죠. 맞지 않는 살림을 하며 지내는 동안 주변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셔서 지금은 본인이 담고 싶은 장아찌를 담그면서 산대요. 젊은 이장 이런 사람들이 사업하자고 해서 공장도 만들고요. 70대인데도 지금 농구 선수라고 느껴질 만큼 엄청난 에너지였어요. 충격적이었죠.

두 번째는 종부, 종손님을 같이 인터뷰했어요. 종부님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를 캐내는 구술사 작업이었죠. 시집올 때 며느리에게 한상차림을 해주는데, 그때 낯설거나 이상한 음식이 있었는지 물어보기 위해 두 분은 어떻게 만났는지 먼저 물어보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결혼하실 때는 어떻게 처음 만나셨는지 물었더니 경성역인가 서울역을 언급하면서 “아주 퍼스트 임프레션이 좋아서 내가 첫눈에 반했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웃음). 종손님은 80대고, 종부님은 70대, 그러니까 제가 막연하게 엄청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생각한 거죠. 이미 어느 정도 부가 있는 사람들은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돼서 연애도 하고 대학도 다닌 건데. 종부님도 대학 나온 분이셨거든요. 거기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죠. 더 큰 건 그래서 그분은 밥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형들, 식솔들이 밥을 다 해줘서 기억하는 레시피가 없었던 일화가 있고요(웃음). 

그런 식으로 할머니들 이야기 듣는 게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양희은의 시골 밥상> 같은 프로그램을 진짜 좋아했어요. 구술 생애사를 언젠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죠.      


소민님이라면 정말 잘하실 것 같아요

작년에 코로나가 너무 심각해졌잖아요. 할머니들이 집안에 고립된 상태로 계시고, 자식들도 전화로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상황이 됐죠. 제가 구상하고 고민해온 일을 회사 관두면 바로 해야겠다 하던 차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갑작스럽게. 작년 목표 중 하나가 이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할머니와 파일럿을 돌리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저에 대한 많은 것들이 원망스러워지더라고요. 뭐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미뤘는지부터,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3개월 전이었는데 그때도 코로나 좀 괜찮아지면 갈게요, 이렇게 얘기했거든요. 따져보면 할머니와 지척에 살았어요. 그런 것들이 미안하고, 꿈을 미뤄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깨달음이 생겼어요. 나중에 조금씩 능력이 되고 좀 더 잘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해야지 하고 생각해왔는데요. 그 일을 기점으로 못 하더라도 능력이 안 되더라도 지금 당장 시작해야지포기하거나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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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촬영   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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