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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Oct 04. 2022

11 HYOJIN : 마침표란 없는 세계

2022.05.03. @이태원역


시그니처 아이템의 의미 ─
정확히 말하면 결혼반지는 아니고 연인일 때 선물 받은 커플링이에요. 부모님 사이가 썩 좋진 않아 결혼에 긍정적인 편이 아니었어요. 결혼생활과 별개로, 결정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음을, 마치 떠밀려 결정한 마냥 오랫동안 괴로워했죠. 결혼 이후에 오는 모든 상황이 억울하고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걸 차치하고, 일말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내가 한 것임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한 번은 어느 연구소 면접을 봤어요.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기혼이라고 말하자 면접관이 제 이력서에 뭔가 적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일이 있는데요. 결혼이 경력에는 해가 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저의 가장 크고 넓은 경력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작이 커플링이었으니 시그니처 아이템이라고 볼 수 있죠.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인어공주는 물속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뭍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넘어가기 위해 다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로써 맞바꾼 것은 목소리. 배제된 적 없었던 삶에 처음으로 소외감과 상실감이 등장한다. 혼자라면 몰랐을 감정은 왕자라는 이방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그로써 희생한 것들이 도리어 자신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함을 깨닫는다.


인어공주가 그렇듯, 이 사회에도 실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기존에 상상하지 못한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이들. 내겐 기혼 여성이 그렇다. 효진은 반려자라는 낯선 이를 만난 후 안정감을 얻은 동시에 새로운 다리를 얻은 듯 다시 걸음마를 시작해야 했다. 모든 게 낯설고 막막하며 금방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였다. 결혼과 출산이 그러했다.


기량을 뽐내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서 존재감이 확실했기에 그렇지 않은 삶에서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지런히 모래를 다져도 파도에 쓸려 금세 무너지는 매일이 반복됐다. 그동안 그의 몸 곳곳도 한데 갈려 나갔고, 회복에 전념하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목소리를 잃는 건 정말 사라져서가 아니라 억눌린 탓에 들리지 않는 것이라는 걸.







제가 주변에서 볼 수 있던 여성의 모습은 비혼이 제일 많고, 미혼인데 미래엔 어찌 될지 모르는 상태인 경우가 그다음이에요. 결혼한 이가 많지는 않아서 효진 님을 만나는 게 내심 반가웠어요.

요즘 갈증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육아를 비롯해 하는 일은 많은데 어딘가 소속되어서 사람들이랑 부딪히는 일은 없어서요. 여러 사람이 부딪히는 조직에서는 별일이 벌어지니 짜증 나고 화나는 등 부정적인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요철을 통해 나를 알 수 있는 지점이 있단 점에서 그립더라고요.

이 프로젝트를 신청한 건, 기록에 남기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패턴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서예요. 20대 때 한 친구가 서울에서 자취하는 20대 여자라는 기획으로 저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친한 친구라 편하게 진행했고, 묻는 족족 당시 입버릇인 ‘다 짜증 난다’라고 말했어요. 그게 인터뷰에 고스란히 담기면서 악플을 많이 받았죠. 요즘 애들은 패기가 없고 세상에 짜증 나는 것만 가득하다는 식으로. 일면 사실이기도 해요, 그때는 진짜 짜증 나는 것밖에 없었죠. 이 인터뷰를 통해 그때와 달라진 모습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오가는 대화에서 모르는 내 모습도 경험하고 싶어서 신청했어요.


감사합니다. 흔쾌히 마음을 열고 임해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네, 재밌어서 마음을 열어도 될 것 같은 안전함도 좀 있었어요. 교집합이라면 여성 커뮤니티 <빌라선샤인>도 알고 있었고 <분노의 글쓰기 클럽>에서 글 쓰고 있거든요. 모임 리더인 사과집 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고 신청하게 됐어요.


무소속으로 지낸 기간과 더불어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무소속으로 지낸 지 8~9년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별명으로 통성명해왔기 때문에 그룹별로 호칭이 다 다른데요. 최근에는 이름을 많이 불러주니 그거대로 반갑더라고요. 어릴 때는 이름 자인 ‘효’가 효도를 강요하는 듯해서 안 좋아했어요. 학교에는 같은 이름이 워낙 많아서 A, B로 구분해야 할 정도이기도 했고요(웃음). 그런 이유로 다양한 별명으로 오랜 시간 불렸고, 이름으로 불린 기간이 짧아서 이젠 이름이 별명 같기도 해요. 대개 할아버지나 작명소에서 짓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엄마가 지어주신 이름이라는 것도 만족스럽고요.


별명으로 불러주는 게 이름보다 더 친근감 느껴지고 좋았던 시절이 제게도 있거든요. 지금은 이름이랑 좀 친해져 보려고 하는데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자아가 두 군데에 있잖아요. 오프라인과 온라인(웃음). 이게 취향과도 연결되는 지점인지라, 취향을 주제로 얘기했어도 재밌었겠다 싶었어요. 삶이라는 주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그렇게 보였군요. 아마 취향 위주로 살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나 봐요. 취향보다 삶을 택한 건, 무소속이긴 해도 어떤 면에서 동네 소속이기도 하고, 양육하며 보게 되는 것이 삶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듯해요. 자연스럽게.



무소속으로 지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아니요. 의도 없이 무소속이 되어 버렸어요. 일말의 선택은 있었을 텐데 몸담고 있던 조직이 와해된 것이 주효했어요. 정확히는 결혼하고 난 뒤에 무소속이 됐고, 해외에 머물다가 출산하고 육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온 거죠.


모든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된 거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좋아서 한 게 아니고.


이전에 그런 삶을 상상해 보셨어요?

그럴 리가요. 이런 삶을 생각하면서 살지는 못했어요. 그냥 하루하루 보내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향유하며 살았고, 어느새 무소속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채로 지금까지 왔어요. 지나고 나서야 ‘나 무소속이구나’를 좀 느꼈달까요. 때때로 이렇게 도태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지금은 루틴한 일상을 보내는 것에 만족해요. 당장 내일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죠. 부족한 게 많아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만족하려고 노력해요. 대체로 만족하고 가끔 불만족스러운 일상입니다.

아기가 어렸을 때는 개인적으로 일이 들어왔어요. 그중 하나가 사보 쓰는 거였고, 다음으로는 드라마 홍보였죠. 드라마 홍보 글을 쓰려면 먼저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한 편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결국 한두 편 쓰고 못 쓰겠다고 한 뒤로 일이 슬슬 끊어지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육아 상황에 맞춰 일을 조정하다 보니 자꾸 뒷전이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일해봤자 어설픈 퀄리티가 나오면 성에 안 차기도 하고, 갓난아기라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를 통제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듣기는 했지만 살아보지 않아서 그게 어떤 느낌일지 쉬이 가늠하기 어렵네요.

제 주변만 봐도 결혼하고 육아하는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하고, 대다수는 이제야 결혼하는 추세예요. 예전에 이런 일도 있었죠. 저희 애가 갓난아기 때 집에 필요한 물건이 있었어요. 불과 7~8년 전인데도 로켓 배송이 뭐예요, 배달 문화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거든요. 마침 친구랑 대화하면서 집 바로 앞에 마트가 있는데 사러 갈 수가 없다고 토로했더니, 어서 사 오라는 타박이 돌아왔어요. 순간 친구와 제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제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했어요.

“내가 지금 마트를 나가려면, 우선 아기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옷을 갈아입혀야 해. 옷을 입힐 때도 춥지 않도록 내복부터 양말까지 단단히 입히고서 아기를 고정하는 아기띠도 해야 해. 아기띠를 하려면 애를 들어 올리고 띠를 묶고 모자를 씌워야 하고, 침을 많이 흘리니까 가재 손수건이랑 장난감들을 챙긴 가방을 메고 문을 열고 나가야 해. 이후 아이가 아기띠에서 내리고 싶어 하면 내려두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따라 개미 보다가 풀을 보고 돌을 만지다가 차도가 나오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따라다녀. 나중에는 아기를 들어 올려 안고 건너는데 걷다가 사람들과 부딪힐까 싶어 노심초사하느라 마트에 도착하면 진이 빠져있어.”

홑몸이라면 고작 집 바로 앞에 있는 마트인데, 아기와 함께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니 친구도 놀랐죠. 마트 가는 게 너한테 쉽지 않겠구나, 하는 말을 듣고서야 우리가 이렇게 다른 양상으로 산다는 걸 계속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어요. 그때부터 나의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말하곤 해요.


우리에게 상상력이 더 필요하지만 그런 상상력조차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이런 부분 같아요. 육아하는 부분, 여성의 생활 리듬부터 생활상이 다 바뀌어버리는 것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봐도 비슷해요. 90년대에 지어진 전형적인 2베이 구조(2bay. 거실과 방 1개가 베란다 방향에 위치한 구조로,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두 세대가 마주 보고 있는 계단식 아파트)인데, 생활하다 보면 아파트를 지은 사람은 일상을 모른다는 게 느껴져요. 동선 면에서나 생활하는 데서 편하지 않거든요. 그런 집들이 많으니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한 동선을 만들어가며 집을 짓겠죠.







10~20대 효진 님에게 서태지라는 존재는 각별해요. 그 덕분에 내 주변에 뭐가 있는지, 무엇을 더 봐야 하는지, 어떤 세상이 있는지 계속 구경하며 나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여기에 한번 가볼까? 하고 발을 들이면 보이는 게 달라지고 실제로 해본 것들이 생기면서 또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는 기회들이 많았을 거로 생각해요.

답변을 쓰면서 불같았던 그 시절이 오랜만에 떠올랐어요. 그 당시 서태지가 제 버팀목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어요. 지금도 제 주변은 그 당시에 만났던 사람들, 즉 초중고대학을 같이 다녀본 적이 없는 친구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나이도 제각각, 사는 환경도 제각각이죠.

2001년 이재수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을 패러디하는 과정에서 저작권 이슈가 있었어요. 원작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패러디 곡을 발매하면서 소송으로 불거졌거든요. 서태지가 그 과정을 지적하며 강한 메시지를 남겼고 팬덤에서도 그게 문제라고 여기기 시작했어요. 그걸 발단으로 전국에서 모인 팬들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앞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했죠.

또 사전 녹화 이슈도 있었어요. 지금이야 사전 녹화가 일반화됐지만, 당시에는 방청객이 있는 상태에서 무대에 올랐거든요. 뮤지션 입장에서는 밴드 음악이기 때문에 음향이나 무대를 원하는 대로 꾸려서 보여주고 싶다는 취지로 사전 녹화를 요구했고, 방송국 쪽에서는 예외적으로 따로 녹화하는 게 특혜라는 말이 나왔어요. 아마 방송국의 권한을 침해받는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양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탓에 그걸 허용한 MBC에서만 방송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서태지와 연관된 일에서 한국 매스미디어 문제로 관심이 확장됐고, 나중에는 SBS 앞에서 1인시위를 하기에 이르렀어요.


1인시위요? 메시지가 뭐였어요?

메시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한 연예인이 저를 보고 지나가면서 피식 웃은 장면은 똑똑히 기억나요. 문득 이런 건 내가 아니라 가수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활동의 수혜자는 그들인데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었죠. 그때 이런 활동을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팬으로서 이 사람이 좋고 그 메시지에 감응해서 움직인 건데 사회적으로 뭔가를 바꾸는 일에 도달한 경험이네요. 1인시위를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거예요. 스스로 그 행동이 옳다고 여긴 지점이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사회와 연결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맹목적이다, 오빠부대다, 빠순이다 하는 멸시를 받았지만 그 변화의 주역으로 팬덤의 힘을 무시할 수 없죠. 넓게는 그런 활동들이 한국 음악사의 토대가 돼서 오늘날 케이팝에 이른 거고요.

얘기하다 보니 사전 심의 폐지 이슈도 떠올라요. 군사 정권 때부터 이어져 온 악습으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가 음반 발매 전 사전심의를 담당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 가사를 지적하자 서태지가 가사를 전부 삭제하고 수록하면서 대립각이 커졌죠. 이를 계기로 사전심의제도의 문제점이 대두되면서 팬들이 나섰고, 공윤을 괴물화하면서 이런 괴물을 없애야 된다, 우리가 승리해야 된다고 합심해 결국 폐지하는 데 일조했던 기억이 나요.


요즘 온라인에 청원하듯이 당시에는 오프라인으로 활동을 진행한 거네요.

그런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낼 방법이 시위나 편지였기 때문에 매일 엽서에 우표 붙여서 공윤에 보냈고, 공윤에서는 방대한 청원서를 마주하고서야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기기 시작했어요. 사전심의가 폐지된 후에 그걸 기념한 <시대유감> 싱글 앨범이 발매됐고, 팬덤 내에서는 승리의 노래로 자리 잡았어요. 팬덤을 주축으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한 기억들이 좋게 남아서 더 똘똘 뭉치고 그런 이슈에 관심 가지는 자극제가 됐죠.

재밌는 건, 서태지보다 서태지가 좋아서 몰린 사람들을 더 좋아했어요. 그들과 밤새가며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했고 많은 영역을 구경하다 겪은 일들이 많아요. 공연을 보다가 공연을 기획하게 되고, 음악방송 녹화하다 영상편집 일을 하게 되고, 저작권 시위하다 저작권 공부해서 변리사가 되고, 아카이빙이 중요하다며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상영회를 열고, 게시판에서 글 쓰다가 평론가가 되고, 공연 질서를 수호한다고 시작한 모임이 경호업체가 되는 등 저마다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시대를 열심히 살았죠. 돌아보면 진기한 경험이에요. 서태지를 좋아하건 않건, 여전히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있어요.


각자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을 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변화가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내어 바꿔 간 셈이네요. 그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된다는 게 멋지고요.

그렇지만 아래에서 시끄럽다고 무작정 바뀌는 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있어요. 위에서 자각하고 짚어주는 일도 중요하거든요. 이 과정들이 팬덤의 힘으로만 이뤄진 건 아니니까요.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인식해야 법이나 제도가 바뀌는 거니 쉽지만은 않았어요.

지금은 덕질하고 있지 않은데, 친구들 말에 의하면 제가 요가를 덕질처럼 한다더라고요. 웃기죠(웃음).








그 시절이 어느 정도 서태지를 종교화, 신격화했다고 하셨지만, 어떤 행동을 할 때 이 사람을 생각하면서 움직이고 가치 판단을 내릴 때도 확신을 갖게 해준 존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거예요. 일종의 버팀목으로서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왜 그렇게 서태지를 좋아했을까 꼽아보면, 각자 결핍된 지점이 있었어요. 온전하다고 생각했던 가족이 붕괴되거나 입시를 앞둔 상황에서 선생님들의 폭력적인 언사에 자존감이 낮아지는 등 개인사이자 시대상이 있었더라고요. 버팀목 같은 존재가 절실한 사람들이었어요. 그가 우리에게 그런 존재라서 위안이 됐던 건 아닐까 싶어요. 특히 저한테 버팀목이 중요했던 게, 가족과 떨어진 타지에서 학교 다니는 게 처음이라 너무 불안한 시기였어요. 행복한 가정이 아닌데도 집으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안정감이 필요했나 봐요.

남편이나 동네 언니도 저한테 안정감을 주는 존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남편과는 올해 결혼 10년 차인데 솔직히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어요(웃음)! 그는 제 머릿속에 수많은 불안과 상상이 만들어놓은 알고리즘을 단숨에 깨주는데요. 해당 직무 전임자가 특정 시험을 보면 월급을 더 준다고 하자 5분도 고민하지 않고 시험 준비하는 데서 경탄했어요. 지금 뭔가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다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아 자괴감 들 때 옆을 보면 가장 강한 자극제를 만날 수 있죠.

또 동네 언니는 아이 키우다 만났어요. 어쩌다 보니 인연이 길어지고 깊어졌어요. 저와 매우 다르게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인데,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면서 생기는 수많은 선택을 굉장히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걸 보노라면 전처럼 쉽게 좌절하지 않게 돼요. 최근에 언니 아버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면서 보여준 의연함은 놀라움 그 자체였어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할 수 있는 정도를 행하는 것. 몰랐는데 정말 대단한 거더라고요(웃음). 사고나 행동 면에서 뿌리를 내려줄 수 있는 느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해요, 이제는.


출산, 육아를 거치며 고충을 나눈 동네 언니에게서 남다른 위안을 받으셨겠다고 짐작해봤어요.

결혼 안 한 지인들도 가족이 얽힌 문제들에 공감은 해줘요. 그러한 깊은 공감이 좋지만, 내일을 살아야 하는 처지로서는 해결하는 법을 포함한 다른 공감이 간절했어요. 보통은 조리원 동기 모임이 있다는데 지속되기 힘들다고 느꼈어요. 아기는 24개월까지 면역력이 없어서 만남을 꺼리게 되거든요. 또 생애주기가 있다고는 해도 저마다 속도와 패턴이 천차만별이라 자는 시간만 해도 다 다르고 언제 아플지 모르니 약속해도 못 만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하도 변수가 많으니 사람을 못 만나는 게 한때는 너무 우울했어요.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아기를 데리고 문화센터를 찾았어요. 기저귀, 분유, 장난감이 든 큰 짐가방을 가지고 문화센터까지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동네 언니가 제게 대뜸 이렇게 말했어요.

= 곧 어린이집 보내지? 어디 보낼 거야?

집이랑 제일 가까운 데 보낼 거예요.

= 어린이집 보내면 애들 패턴이 똑같아지거든. 등하원 시간부터 잠자는 시간까지. 놀이터에 앉아있는 엄마들이 다 외로우니까 오는 전화는 다 받아. 그 엄마들 가운데 이상한 사람도 분명히 있어, 교회 포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00명 중 1명은 괜찮아. 그러니까 변호를 다 따보고 말을 걸어봐.

그 얘기를 듣고 어린이집을 보내자마자 엄마들과 인사하는 족족 전화번호를 물었어요. 각자 집에서 다 외로워하는데 말을 어떻게 걸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인 거예요. 개인 시간, 집에 머무는 시간이 있는데 이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누구를 만나자니 뭣하고요. 저는 외향적이라 약속이 잡히면 설사 실망하더라도 애 데리고 바로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많은 인연을 만났고 4~5명과는 굉장히 끈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애와 함께하며 벌어지는 가정사를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으니까 이들과 만나면 편한 게 가장 좋았죠. 저랑 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 낳은 사람들이라 공감대가 남달랐고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불구덩이가 아니겠다는 안심이 들었어요.


동네 언니가 꼭 곁에 있는 사람 백과사전 느낌이네요. 그런 존재가 있으면 너무 든든하죠. 두 분이 상호 보완한다 싶어요. 부딪힐만한 민감한 지점은 서로 잘 피하면서요.

적당한 거리가 엄마들 관계에서도 중요해요. 서로 원하는 거리가 다 다르니까 나름의 선을 지키는 게 쉽지 않거든요. 의도하지 않아도 누구는 훅 들어오고, 누구는 미적지근하고. 언니는 동네에서 누구든 크게 가깝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이기도 해요. 실질적인 삶의 팁을 많이 주고요.

언니와는 밀착적인 관계가 아니라서 각별한데요. 저는 저 나름대로 생활하는 게 중요해서 관계는 있되 제 시간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거든요. 언니는 그 부분을 존중해 주면서 관계를 이어가기에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 같아요. 제가 이상주의에 가깝고 감정적이다 보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못 해버릴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실수하면 다음에 고치는 게 아니라 망했다고 여기면서 하고 있던 것도 안 해버리는 스타일이죠. 반면 언니는 단계별로 차근차근 나아가는 편이라 제게 좋은 본보기가 돼요.



얘기를 듣다 보니 결혼이 극적인 전환점이기도 하네요. 관계나 시선이나 삶의 양상이 달라지니까.

아이를 키우면 내 일거수일투족이 모두에게 공유되고 어떤 행동을 하려면 정당한 이유를 필요로 해요. 예를 들면 아이가 없을 때는 제가 약속을 잡아서 뭘 하던 모두에게 공유하지 않잖아요. 아이가 생기면 제가 어떤 동선으로 뭘 하기 위해 움직이는지 모두에게 공유해야 해요. 혹여 아이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면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합의된 기준에 부합해야만 하고, 이유가 정당하지 않으면 저는 개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요. 그래서 처음 아이를 두고 외출할 때 내가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언제 돌아올 건지 다 얘기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면서 괴상하다고 느꼈어요.


정말 그러네요.

구속적이었죠. 그러다 보니 제게는 1분 1초가 중요한데 친구가 3분이나 늦으면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시간이 즐겁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고요. 결혼하기 전까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겨야 한다는 모토로 살았다 보니 그 생활이 더 불만스러웠어요. 출산과 육아가 저한테는 엄청난 삶의 브레이크였던 셈이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급정거했다는 느낌이요.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 생애주기에 별 관심이 없었던 부분도 있어요. 막상 제 일이 되자 애를 낳고서야 이유식도 알았을 정도로 처음 알아가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지금은 아이가 끼친 영향이 제일 커요. 제 약점도 제일 잘 알고, 제 강점도 제일 잘 알고, 저를 제일 많이 사랑해주고, 저밖에 모르죠. 영향력이 큰 존재지만 아이는 제가 기댈 만한 대상은 아닌 거잖아요, 제가 보호자니까. 아이가 독립적이라 제 손을 제법 빨리 벗어났는데, 막상 초등학교 들어가더니 버거운지 유독 저를 많이 찾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네요.

모성애가 자연발생적인 게 아니라는 걸 낳고 나서야 알았어요. 배 속에 있던 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예쁘지 않다’가 아니라 ‘쟤는 누구야?’ 였거든요. 저도 처음 봤잖아요.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생기니까 정이 든 거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제 주변에도 없어요. 내 몸조차 성치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매일 돌봐야만 하니까 나름대로 애를 보호해야겠다는 책임감은 있어도 모성애는 아니었다 싶어요. 심지어 커뮤니케이션도 안 되는 존재잖아요. 저희 아이는 말이 느려서 더더욱 집에서 말할 사람이 없었어요. 우울감에 빠졌고 말해봤자 바디랭귀지나 우는 것이 고작이니 말하고 싶지가 않았죠. 성인과 대화하는 맛을 그리워하며 오래 지냈죠.


말씀하신 괴리가 일종의 단절처럼 느껴져요.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 하지만 비슷한 키워드를 공유할 때라야 모일 수 있잖아요. 재교육이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양육자로 경력 단절된 분뿐만 아니라 청년이되 일 외에 다른 풀을 만나기 힘든 분도 그렇고, 중장년층도요. 거의 전 세대가 재교육받지 않으면 자꾸 탈락하게 되는 시대, 고립의 시대.

집안에 한정될 때의 사고는 사회에서 일할 때와 너무 다른 것 같아요. 가끔 카페에서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어대는 주부들을 마주하면 거슬릴 때가 있었어요. 이제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라는 의문이 생겨요. 아이를 키우면 사고와 생활 패턴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쉬는 날이 딱 그래요. 통상적으로는 주말에 쉬고 월요일에 한 주를 시작하지만, 우리는 월요일에 쉬어요. 우리에겐 집이 일하는 곳이라 애를 포함한 가족이 나가야 쉬는 거예요. 회사를 기준으로 생활이 맞춰진 사람들에게는 주부들이 이상한 사람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시점에서 다시 진로 고민을 하고 있어요. 가만히 있고 싶지 않으니까 뭔가 해볼 생각이 들어서 발버둥 치는 중이에요. 내가 사는 곳에서는 주도권을 가지면서 관리할 수 있으니 편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어딘가에 소속되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사회의 감을 다시 익혀보고 싶어요. 물론 워킹맘도 많지만 저는 아니라서 그 괴리가 커요.







동선부터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삶을 사는 데 급급하니까 서로를 이해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리는지도 모르겠네요. 개인 차원에서 더 관심 가지자는 말은 너무 쉽잖아요. 기본적으로 사회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고, 개인이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해볼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돌이켜보면 회사 생활할 때 광화문이나 여의도에서 한 번도 아이를 본 적이 없더라고요. 우선 관심이 없었고, 제가 출퇴근하는 시간에는 학교나 유치원에 갈 테니 마주칠 수가 없죠. 결혼하고 이사한 동네에서 아이가 있는 가족을 마주하고 함께 살면서 이제는 반대로 직장인과 마주할 일이 별로 없어졌지만요.

최근에 온라인 친구와 출산 휴가 관련해 얘기했어요. 출산 휴가를 쓴 직원을 대체할 인원을 새로 뽑지 않아 기존 직원이 그 업무를 떠안게 되자 해당 직원을 탓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해요. 그로 인해 이어진 말들을 읽으면서 너무 헛헛했대요. 듣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결혼 전에는 준거집단이 가중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직원이었다면, 이후에는 출산 휴가를 쓴 직원으로 옮겨간 셈이에요. 실제로 제 주변에는 능력 있고 자기 일을 좋아했던 사람임에도 출산과 육아 상황에 따라 일을 그만둔 경우가 많아요. 복직할 때도 이전처럼 더 잘할 수 없다는 데서 스트레스받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면서도 괴로워했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기 시작하면서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여기게 됐죠. 솔직히 제가 지켜보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거예요. 그래서 결혼을 기점으로 달라지는 삶들이 공유되는 게 중요하겠다고 생각해요.


그런 데서 효진 님은 글 쓰는 여성이자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분이라 그런 이야기를 쓰시는 게 남다른 의미를 가질 듯해요.

제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도 사람들이 검색하는 건 관심사 기반이라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만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아이를 키우며 배운 것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불편한 것들이에요. 요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에서 이동권 보장 지하철 출근 투쟁을 진행하고 있잖아요. 휠체어와 유모차는 거의 비슷해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유모차도 들어갈 수 없어요. 그걸 깨달은 계기가 동네 백화점에서의 경험이에요.

유모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고작이에요. 거대한 자본 덕분이라는 건 차치하고, 너무 희소하죠. 일단 거기서는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있고 다니기도 한결 수월해요. 그래서 친구와 함께 동네에 새로 생긴 백화점으로 향했는데,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당황했어요. 유모차를 밀고 갈만한 문이 하나라 내린 데서 반대편까지 돌아가야 했거든요. 중요한 건 경사인데, 아마 이걸 모르는 사람이 만들었겠죠. 게다가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사람이 워낙 많은 데다 아무리 기다려도 유모차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생기질 않았어요. 한두 사람 탈 공간이 생기면 뒤에 기다리던 사람이 홀랑 타버리는 거죠. 유모차를 봐도 아무도 양보하지 않고 심지어 새치기하면서까지 타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면서 분노가 차올랐어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달리 유모차는 오로지 엘리베이터만 이용해야 하잖아요.

그런 경험이 있으니 육아하는 가족뿐 아니라 장애인도 웃으며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동권 운동에 사회적 비용이 들지만 결국 모든 사람에게 수혜가 돌아가거든요.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만 쓰는 게 아니라 유모차 끄는 보호자도 쓰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도 쓰고, 무거운 짐을 든 성인도 써요. 올해까지 이동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해놓고서 지키지 않은 탓에 전장연이 정당한 요구를 하는 건데도, 사회는 당장 자신이 불편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잖아요.


일상 곳곳에서 불편함이 포착될 때 사건은 한 시기에 머물고 끝날 수 있지만 삶은 계속되잖아요. 그래선지 요가하시는 게 남다르게 다가와요. 운동이자 심신을 가다듬는 행위로 보이거든요.

오늘도 5시에 새벽 요가를 하고 왔는데, 쉽지 않아요(웃음). 코로나19로 아이들의 활동 영역이 제한되고 방학에는 집에만 있으니까 붙어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그러다 보니 훈육할 때 제 감정이 널뛰기 시작했고 요가 시간을 앞당겨야겠다고 여겼어요.

요가 한지 올해로 5년 됐거든요. 육아는 체력이라 첫째를 24개월 만에 어린이집에 보내고서 곧장 필라테스와 발레를 등록했어요. 몸 곳곳에 통증이 일어서 각종 병원에 다녔는데, 아마 아이를 키우면서 생긴 긴장들이 가라앉으며 통증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상태에서 운동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효과가 있겠어요, 그저 힘들죠. 그래서 다 그만두고 열심히 놀러 다녔어요. 카페에 앉아 쉬고 하늘 보면서 1년을 지내니까 이제 운동해도 될 것 같더라고요. 한창 SNS로 요가 얘기가 많았고 주변에서도 한번 해보라고 제안하기에 동네에 있는 조그만 요가원을 찾았어요.

전화 문의할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찮았어요. 친절하기보다는 무뚝뚝하고 단호한 대화였는데,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가더라고요. 요가원이 기초 체력 운동부터 다지는 스타일이라 제격이었던 거예요. 선생님은 대부분 엄마로 구성된 그룹이라는 걸 알고서 원래 정해진 시간의 2배 이상을 들여가며 주 3회씩 수업을 진행했어요. 시쳇말로 빡세게 굴렸죠(웃음). 규모가 작기도 하고 출석이 안 채워지면 인원을 잘랐기 때문에 원래도 열심히였지만 더 절박하게 임했어요. 그러는 사이 요가가 몸에 배기 시작하더니 운동 나가는 습관이 생기더라고요. 몸을 살리려고 했다가 나를 되돌아보게 됐달까요?


요가 역시 이전에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습인 거네요.

전혀 몰랐죠. 심지어 자격증까지 따게 될 거라고는. 한 동작을 오랫동안 유지하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거든요. 요가에서는 현재 내가 있는 곳이 아주 중요해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현재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거기에서 내 불안이나 걱정이 어디서 오는지… 현재로 끌어오는 과정을 통해 한곳에 고이던 생각이 트이는 경험을 자주 했어요.

아직 출산의 경험이 생생할 때, 그 충격을 소화하기도 전에 애를 길러야 했고, 과격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눈만 뜨면 지옥이었어요. 뒤돌아서면 뭐 해달라고, 뒤돌아서면 뭐 해달라고 하는 연속이라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어요. 끝없는 터널 같았죠. 그러던 중 요가를 시작하니 후련하달까요. 신체적인 부분은 내가 끝내면 되고, 정해진 시간을 다하면 끝난다는 데서 쾌감이 느껴졌어요. 지금도 요가를 하고 안 하고에 따라 하루의 질 차이가 커요. 요가하고 나면 워낙 고단해서 진이 빠지고, 저절로 차분해지는 면이 있어요. 그게 저한테 잘 맞아서 이제는 가족들이 먼저 요가 안 가냐고 물어볼 정도예요.

<분노의 글쓰기 클럽>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그래요. 결혼하고 출산 전까지는 매일 혼란스러운 지금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꼬박꼬박 일기를 썼어요. 거의 집착에 가까워서 하루라도 안 쓰면 불안할 정도였죠. 놀라운 건 요가를 한 뒤부터 일기의 형태가 확실히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누군가 이렇게 말했고 나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였고 감정이 이렇다는 식으로 기분이나 상태 얘기뿐이었어요. 감정에 휩싸여서 주변을 못 보는 느낌, 제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상황을 해결하기보다는 억울함만 계속 쌓이는 느낌이었거든요. 이제는 그날 있었던 행위만 쓰는 게 보여요.



대화 중에 퀘스천(question)이란 표현을 자주 쓰시더라고요. 의문을 가지고 궁금해하는 태도, 질문을 계속 고민하는 태도가 지금에 이르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가를 공부하다 보면 장르별로, 선생님별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방식이 다 달라요. 그런 걸 알아갈 때마다 흥미를 느껴서 다 공부해보고 싶어지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나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해요. 여러 흥미 가운데 하나를 고르려니 선뜻 못 하겠더라고요. 워킹맘으로서 무언가를 선택하면 기대되는 아웃풋이란 게 있으니까요.

한 번은 동네 언니에게 나는 왜 이렇게 선택을 못 할까, 이게 내 인생 같다며 고민을 털어놨더니, 너는 참 좋은 면을 많이 보는 사람 같다는 거예요. 그때 제 긍정적인 면을 찾았어요.


요가를 중심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동시에 삶을 재편하는 과정처럼 보여요. 예전에는 한 가지를 100이나 80의 비중으로 임했다면 이제는 여러 가지를 그 절반 또는 적정한 비율로 조정하면서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통해 강하게 몰입한 덕질사를 돌이켜봤잖아요. 제 인생 전반을 통틀어 좋아하는 일에 관한 궤적을 그려준 것 같아요. 그 기억이 이렇게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면서도 경력이라고 할 만한 건 적고 주로 경험에 가까운 듯해요. 좋게 보면 많은 것을 경험했으니 경험치는 많은데 경력이 될 만큼 오래 하진 않았더라고요. 그 경험들이 가치 없다기보다 경력으로 만들어서 다른 걸 시도해야 하는데 계속 새로운 것만 찾으니까 인정받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인 건 이제 알겠으니 앞으로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좀 들어요.


좋아하는 게 뚜렷하게 생기면 행위로 자꾸 이어지잖아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직접 경험을 잘 꿰면 경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장단이 있는데, 여태는 그걸 경력으로 포장하면서 그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지점들이 있었어요. 20대의 저는 늘 퀘스천이었거든요. ‘그때 왜 그랬을까?’ 자문하면 불안이 큰 요인이었어요. 스스로 짜증 났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그게 삶의 일부가 됐고, 이렇게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걸 수시로 느끼는 동안 좌절감이 컸어요. 그 시기에는 계속 시도하면서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싶어요. 안타깝죠. 사회와 나를 어떻게 연결 지을지 생각하지 못했고, 이상과 현실의 갭을 모르고 큰 걸 추구했어요.

그러면서도 정말 즐거웠죠. 맨날 노니까 주변에서는 제가 노는 애로 통할 정도였어요(웃음). 마포농수산물시장이 근처에 있어선지 일대에서 구하는 농수산물이 싱싱하고 쌌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가 김밥인데 한식의 1위라고 생각할 정도로 참 대단한 음식이에요. 뭘 넣어도 말 수 있으니 기분이 좋으면 좋아하는 식재료를 넣어서 김밥을 말곤 했죠. 1줄만 말기는 아쉬우니 한번 만들면 족히 8줄은 나오는 거예요. 그럼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먹는 거죠(웃음).


20대는 그런 데서 극단적일 수밖에 없나 봐요(웃음). 떠올리면 기분 좋은 일들이 많았던 때이자 드러나지 않아 가장 불안한 때니까요. ‘어른’을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신 게 비슷한 맥락 같아요. 이제 본인의 선택을 책임져야만 한다는 의미에서요.

제가 좋아하는 문장이 ‘DONE IS BETTER THAN PERFECT’예요. 생각만 하다 지나버린 일들을 아쉬워하지 말고 ‘하자’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든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쉬지 않고 끓는 용암을 품은 활화산 같다고 생각했어요. 불같이 열정적으로 산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요. 계속 뭔가 하고 싶어 하고 본인을 자꾸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크게 느껴지거든요. 인생에서 용암이 끓는 순간을 계속 유지하려는 에너지가 좋게 보였답니다.

감사합니다. 놀라운 건 친한 친구가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거든요. 제게 화의 기운이 있는데 불밖에 없어서 활활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줬어요. 주변에 물이나 땅을 마르게 할 정도로 강력하대요. 마침 불이 들어가는 표현으로 비유하셔서 놀라워요. 인터뷰하는 동안 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점이 보여서 흥미로웠어요.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집에서 이불킥 할지도 모르지만(웃음), 미란 님이 스펀지 같아서 너무 신기한 시간이었어요.



인터뷰를 정리하는 동안 오랜만에 서태지의 음악을 찾아 들었다. 이제는 흥분보다 추억을 돋우는 게 꼭 어느 날 접어둔 책 끄트머리를 펼쳐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펼친 면에 적힌 건 없지만 내가 왜 이 페이지를 접어뒀는지, 그때의 영감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생각하다 보면 그곳은 더 이상 공백이 아니게 된다.


효진이 곳곳에 남겨둔 책 끝을 펼쳐본 시간도 그랬다. 보이지 않아서 없는 줄 알았지만, 언젠가 흘린 눈물이 마른 자국, 차마 스미지 못한 소리가 맴돈 흔적,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문지르기만 하다 남은 손때가 있었다. 글이라는 대표 언어에 담기지 못한 삶은 전체 책 두께보다 훨씬 두툼하고 방대했다. 당연히 그의 삶을 표현하기에는 여기 적힌 이야기로 한참 부족하다.


동화와 삶은 엄연히 다르다. 동화가 결말을 통해 삶의 단면을 보여줄지언정 끝이 없는 현실을 담아내기에는 협소하니까. 우리는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의 결말은 알아도 효진의 결말은 알 수 없다. 이 시점에 갈무리된 듯 보이는 결말조차 나중에는 다른 결말이 될지 모른다. 삶은 계속해서 결말이 바뀌는 이야기이고, 끝끝내 결말을 짓지 못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가 살아내야만, 본인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써야만 유효한 결말 말이다.




효진 님을 더 알고 싶다면


http://www.instagram.com/mover_re







인터뷰, 촬영   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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