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의 정점에서 쓰는 SF소설은 여전히 Fiction인가?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다. 진짜 책상에 앉진 않았다. 앉아있는 쪽은 의자다. 공부를 하고 있지도 않다. 이 글을 적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의자에 앉아서 책상 위에 책을 펼치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빛의 발산지는 나의 머리 위에 있다. 자정의 태양같이, 다만 내 머리를 달구지는 않으며 나의 정수리 위에서 빛을 비추어 주고 있다. 때문에 내 손 밑의 그림자에게 잡아먹힌 글씨는 어둡다.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카페에 전등이 하나뿐만은 아니니까. 모든 전등이 바로 아래에만 빛을 비춘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빛은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다. 물리법칙을 단정하는 요소이긴 하나, 무엇보다 빠르면서 무엇보다 부드러운 것이 빛이다. 부드러운 빛 덕분에 나는 그림자에 가려진 종이 위 글씨도 문제없이 볼 수 있다. 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동시에 움직인다. 마치 내가 아니라 그림자가 문제를 푸는 듯 보인다. 재미있는 상상이다. 그러나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은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 문제보다 이런 상상이 더 재미있나 보다. 문제가 재미없음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문제가 재미없으니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가 재미있어야 문제에 집중을 했을 텐데, 문제가 재미없음에 문득 실망감이 느껴진다. 문제를 향한 실망감이 아니라, 나를 향한 실망감이다. 이런 실없는 상상보다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나에겐 더 실리적인 문제라고 나 자신을 길도록 세뇌시켰으니까. 이런 실없는 상상이 나의 미래를 만들어 준다면야 또 못할 것은 없다. 조금 더 불확실할 뿐, 분명히 이런 실없는 상상은 나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줄 거야. 어쩌면 이런 상상으로부터 새로운 법칙을 발견 할 수도 있어. 이런 상상으로 소설을 적어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영화화가 되어 억만장자가 될 수도 있잖아. 실없는 상상을 조금 더 계속해 본다.
나의 세뇌는 강력했다. 어느새 의식은 문제로 옮겨갔다. 무아지경으로 문제를 풀던 중, 다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악마와도 같은 존재다!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게 만들고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일상 속의 평온함을 깨트리는 존재. 아무리 일상이 혼돈 속이라도 이것이 나타나는 순간 혼돈은 평온함이 된다. 존재 가치는 하등 존재하지 않으며 없어져야 할 마땅한 존재. 다만 악의는 없는 존재. 다만 이 악마는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샘통이다. 이미 이 카페에서 악마에게 여러 번 패전한 전적이 있기에 오늘은 철저히 준비를 하고 왔다. 반팔, 반바지는 금물. 악마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는 성수까지 목과 손에 뿌렸다. 다만 머리카락에 뿌리는 것은 깜박했는지, 악마가 나의 머리카락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악마를 보고 있지 않다. 그림자를 볼 뿐이다. 내 눈 앞에 3차원의 악마가 나타났다면 나는 수차례 반복 끝에 단련된 죽음의 박수로 악마를 2차원의 존재에 가깝게 찌그려트렸을 것이다. 나의 머리카락에서 날아간 악마는 나의 흰 책이 마치 자신의 무대인 마냥 곡예를 시작한다. 그의 3차원적인 움직임이 2차원에 투영된다. 잡생각이 발동된다. 지금 이 악마가 나의 책 위에 그리는 2차원적인 궤도를 만족하는 3차원의 악마의 움직임은 얼마나 다양할까? 어쩌면, 4차원의 존재가 우리의 움직임을 보는 것은 책 위 모기의 그림자를 보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나는 3차원, 모기도 3차원, 모기의 그림자는 2차원. 3차원의 움직임에 대응되는 2차원의 움직임은 하나뿐이지만, 2차원의 움직임만으로 3차원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는 없어. 4차원에 철수라는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철수는 4차원, 4차원에 있는 모기도 4차원, 모기의 그림자는 3차원. 나는 3차원. 내가 4차원 모기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고 쳐보자. 실제로 4차원 모기는 하나의 4차원적 궤도를 그리면서 움직이겠지. 하지만 내가 3차원에 나타난 4차원 모기를 보고 4차원에서 어떤 궤도로 움직이고 있을지 예측을 할 수는 없어.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4차원을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실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종이에 비친 내 손의 그림자는 내가 손을 움직여서 바꿀 수 있어. 모기도 움직이면 종이 위의 그림자를 바꿀 수 있겠지. 다만 내가 만든 그림자로 모기의 그림자를 때린다고 해도 모기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못해. 철수가 자기 그림자로 모기 그림자를 때린다 한들 철수의 그림자는 모기의 그림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거야. 현실에서 일어나면 꽤나 끔직하겠네.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나에게 아무런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거지. 그렇다고 유령처럼 통과하는건 아닐 거야. 나랑 모기의 그림자가 합쳐지면 모기가 완전히 내 그림자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있지만, 두 그림자가 섞여 괴상한 형태를 만들기도 하니까. 이것처럼, 통과하는 도중에 나와 그 사람의 3차원적 위상이 뒤섞여 이상한 형상으로 바뀌는 거지!
여하튼, 결국 빛이라는 매개가 있어야 3차원의 모기를 2차원의 모기 그림자로 바꿀 수 있어. 빛 말고 차원을 바꾸어 주는 매체가 뭐가 있을까? 당장엔 떠오르지 않아. 세상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3차원이라는 것을 오로지 촉각과 청각만으로 판단하게 될 거야. 촉각에서도 평평한 것과 울퉁불퉁한 것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이 둘을 바꾸어 주는 어떠한 매개체는 생각나지 않아. 청각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인식하는 사실의 차이가 있을 뿐, 이를 결정적으로 나누어 주는 빛같은 매개는 떠오르지 않아. 박쥐는 아마도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을 거야. 그럼, 4차원에도 빛같은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만약 2차원에 생명체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 생명체의 존재 유무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 일단 지금까지는 2차원 생명체에 대한 과학적 보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 2차원에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생명이 없거나,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 만약 생명이 없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 이라고 해 보자. 조금 더 자세히는, '3차원의 영향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무언가' 라고 해 보자. 생명이 아니라, 2차원만의 독자적인 메커니즘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네. 2차원에서의 바람, 물, 생명 등등이 있냐 생각을 해 보는 거지. 그런데, 지금까지의 과학적 보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경우는 없어. 갑자기 그림자가 알아서 움직이거나, 종이 위 글씨가 알아서 움직이는 경우는 없는 거지. 사실 종이도 3차원이긴 하네. '근사적인' 2차원일 뿐. 다만 그림자는 정말 2차원이 아닐까? 빛은 질량이 없잖아.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2차원과 3차원 세계는 완전히 독립적인,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관계인 걸까?
아니면, 2차원 세계는 3차원의 세계에서의 움직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수동적인 세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3차원 모기의 움직임이 2차원 세계에 투영되면, 2차원 세계에 모기가 생기는 거지. 자신들은 이 모든 것이 자아를 가지고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 3차원 세계에서의 일이 투영되는 결과일 뿐인 거야. 다만 하나의 2차원에는 수많은 3차원 세계가 대응될 거야. 내가 지금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해서 그림자가 변하지는 않으니까. 마치 0차원에서 시작해서 1차원에 대응되는 수많은 2차원, 그 2차원에 대응되는 수많은 3차원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거지.
아까 박쥐 이야기를 했어.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에서도 빛을 인지하지 못하는 박쥐나 두더지같은 생명체가 있어. 그런 생명들이 만약 4차원에도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3차원과는 어떤 상호작용을 하게 될까? 지금 내 머리 위의 전등에 의해 하나의 둥그런 빛의 영역이 생기고, 이는 즉 2차원의 무대야. 무대 밖엔 2차원을 위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아. 빛이 미치지 않거든. 이는 즉 빛이 미치는 모든 공간은 2차원의 무대가 된다는 거야. 우주에 있는 모든 광원은 2차원의 어머니인 셈이지. 그럼 블랙홀은 뭘까? 2차원에게 있어선 어떤 존재일까? 블랙홀이 3차원의 존재가 맞긴 할까? ... 블랙홀에 대해 아는 내용이 너무나도 부족하네. 더 이상 상상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어. 지식이 부족하네. 다른 생각을 해보자.
4차원에도 만약 빛이 있다면, 그리고 그 빛의 그림자가 3차원이라면, 우리는 그림자야. 다만 우리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은 거야. 우리에게 대응되는 4차원은 무한대에 가깝게 펼쳐지는 거지. 흔히들 우리가 4차원을 생각하면 4차원에서는 x,y,z축에 이어 시간축까지 모두 정해져 있어 사실 우리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는 상상을 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가능성의 측면에 있어선 그 반대인 거야. 지금 내가 생각하는 다중우주의 개념은 또 흔히 알고 있는 다중우주의 개념과는 다른 것 같아. 순간의 모든 선택이 각자의 다중우주로 퍼져나간다는, '가능한 모든 경로' 를 지나쳐 온다는 그런 느낌의 다중우주랑은 다른 느낌인 거지. 예전에 파인만의 책을 읽으면서 얼핏 들었던 이야긴데, 자세히 생각나지 않아. 다시 읽는다고 해도 내가 이론적으로 그 개념을 이해하기는 먼 이야기일 거야.
... 생각은 계속 이어지다, 하나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꿈이었다.
물리학 학부생이 이 생각을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말 그대로 SF소설, 공상과학에 불과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물리학 학부생이 되어서 하는 상상을 석사나 박사가 본다면 헛웃음을 지을 것이다. 내가 석사나 박사가 되어 상상을 한다면 교수가 구박할 것이다. 그럼 만약, 내가 교수가 되어 상상을 한다면? 학문의 벼랑 끝에 서서, 학문의 선봉장에 서서 상상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논리적 결함이 없는 상상을 한다면, 이 상상은 Science Fiction의 범주인가, Science의 범주인가?
나는 아인슈타인도, 뉴턴도, 테슬라도, 보어, 슈뢰딩거, 디렉, 란다우, 폰노이만, 파인만도 소설가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갖고 있던 지식을 토대로 논리적인 상상을 했으며, 그 상상이 검증을 거쳐 이론이 되고 법칙이 된 것이다.
이것이 SF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검증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과학에 기초한 소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올린 과학을 기반으로 펼쳐진 상상이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로 미래일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이 매력을 초등학교 때 쥘 베른에게서 처음 느꼈다. 처음엔 해저 2만리를 그저 흥미로운 모험 소설이라고 읽었지만, 나중에 그가 이 소설을 '전기' 라는 것이 없는 시절 바닷물로부터 에너지를 만들어 인간을 태우고 바닷속을 돌아다니는 잠수함을 상상했다는 것은 어린 시절 나를 충격에 빠트리기엔 충분했다.
흔해빠져 지겨울 정도로 인용되는 명언이 있다. 고도로 발전한 과학은 소설과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 SF 3대 거장인 아서 클라크가 한 말이다. 아서 클라크도 1945년 발표한 'Extra-Terrestrial Relays' 라는 소설에서 정지궤도 인공위성의 존재를 예견하였고, 정지궤도의 이름은 '클라크 궤도' 가 되었다. 나를 더 설레게 하는 것은 아서 클라크의 학력이다. 그는 런던왕립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최우등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기술은 사실이 되었다. 다른 SF 3대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필립 K.딕은 과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사유인 철학을 공부하였다. Timescape로 네뷸러상을 수상한 물리학 박사 그레고리 벤포드. A Deepness in the Sky로 휴고상을 수상한 수학 박사 버너 빈지. Startide Rising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한 우주물리학 박사 데이비드 브린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기막힌 SF소설을 적었다.
과학자들만이 SF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당장 최근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휩쓴 아카디 마틴도 인지과학과 심리언어학을, N.K 제미신도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다만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 성격의 SF소설보다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력을 펼쳐가는 가령 '삼체' 같은 하드 SF 소설에 더 매력을 느낀다. 애당초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SF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내 평생 꿈 중 하나는 기막힌 SF소설을 써보는 것이다. 다만 항상 나를 가로막는 것은 나의 과학적 지식이다. 상상력 하나는 자신있다. 물론 이 상상력이 세계에 먹히리라는 것은 기막힌 자만이지만,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대화에서 상대를 먼저 지치게 할 자신은 있다. 다만 내가 가진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 어느새 SF가 그냥 판타지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충분히 SF소설은 적을 수 있지만, 나는 만족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다. SF소설 하나 때문에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것은 말도 안 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SF소설을 소설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자. 앞서 이야기했지만, 만약 내가 학문의 끝자락에서 SF소설을 쓴다면, 그건 곧 이론이 된다. 상대성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된 '증명된 SF소설' 이라고 생각한다면, SF소설 하나 때문에 물리학과에 가고 싶다는 것은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문학적으로 훌륭한 SF소설, 학문적으로 훌륭한 SF소설 모두를 적는 길을 향해 가고 싶다. 그것이 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