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현대시 감상하기 2)

왜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해 당신을 생각했을까?

by Quaerens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님의 침묵>(회동서관,1926) -




화자는 땅도 없고 집도 없고 민적도 없습니다. 땅이 없어 스스로 작물을 기르지 못한다면 사서 먹어야 하겠지만, 집도 없는 화자에게 돈이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 나아가 민적까지 없는 화자는 인권조차 부정당합니다. 이러한 궁핍한 상황이 극한에 몰릴수록 화자는 ‘당신’ 을 생각합니다.


1연에서 화자는 당신이 가신 뒤로 당신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생각한 이유는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화자 자신을 위함이 많다고 합니다. 왜 화자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당신을 생각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곧 이 시를 관통하는 화살입니다.


2연에서 화자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나올 때 화자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당신이 없기 때문에 화자는 사람다운 삶을 부정당하는 치욕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게 화자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당신이 있다면 주인에게서 내쳐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므로, 화자는 ‘자신을 위해서 당신을 생각’ 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연에서, 민적이 없으면 인권도 없고 인권이 없는 자가 순결을 지키는 것은 과분하다고 능욕하는 장군에게 항거한 뒤, 장군에게 향한 격분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으로 바뀌는 찰나 당신을 생각합니다. 화자는 당신이 있었다면 자신이 장군에게 능욕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연과 3연 모두 화자가 당신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없으므로 인해 자신에게 쏘아진 멸시와 모욕의 화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자가 자신을 위해 당신을 생각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갑을 깜빡하고 집에 두고 나왔을 때, 순수하게 지갑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군침 도는 냄새를 맡으며 지갑이 있었다면 저 음식들을 먹을수 있었을 텐데! 하며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만 감상하였어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화자의 시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본질적인 감상을 해 화자의 메세지를 파악하고, 시를 온전히 맛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마지막 두 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감상으로는 마지막 두 줄을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연에서의 화자는 온갖 윤리와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에 봉사할 뿐인 허망한 것들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칼은 3연에 나온 장군 - 즉 권력을 의미하며, 황금은 2연에 나온 주인 -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화자는 윤리와 도덕, 법률은 있는 자 (부자) 와 힘이 강한 자 (장군) 들을 감싸고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는 허망한 것이라고 보며, 이러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존재인 '당신' 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 라는 말은 돈과 권력을 감싸도는 거짓된 윤리와 도덕, 법률에 편승하는 것을 말합니다. 술을 마실까 망설이는 것은 이러한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잠시나마 몽롱한 취기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 또다시 화자는 '당신' 을 보게 됩니다. 왜일까요? 아까와 동일한 질문이지만, 이 맥락에서의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해도 - 윤리와 도덕과 법률마저 있는 자를 감싸도는 세상이어도 - '당신' 은 현실과 타협하고 더렵혀진 정의에 편승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항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 이란 세상이 타락했더라도 사람은 이 현실과 싸우지 않고는 -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느끼고 항거하지 않고는 진정한 정의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제 맨 처음 연의 '나를 위해 당신을 생각했다' 는 구절을 다시 돌아가 감상해 봅시다.


화자는 구걸을 하러 주인에게 가지만, 거지라며 무시당하고 박대당합니다. 이때, 화자는 이러한 부당한 현실에 부닥치며- 허황된 정의가 만연한 현실에 편승하고, 거짓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그러한 현실에 저항하는 '당신' 을 생각한 것입니다. 3연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결국, '당신' 이 없으므로 화자는 사람다운 삶을 부정당하는 치욕 속에 있는 것은 맞지만, 역설적이게도 올바른 정의를 좇으며 현실과 싸우는 '당신' 도 마찬가지로 거짓이 사실이 된 세상에서 진실을 외치므로 삶을 부정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 가진 세상을 화자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자의, 한용운의 '역사' 를 바라보는 아름답고 고고한 시선이며, 여기까지 이해하였을 때 비로소 화자가 부정적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런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조금 첨언하자면, 한용운의 시에는 '당신' 이나 '님' 이라는 존재가 아주 빈번히 등장합니다. 이에 대해서, 한용운의 시집 서두를 보면 한용운은 어떠한 사람만이 '님' 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것은 모두 다 '님' 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꼭 '님' 이 어떠한 사람이 아닌 진리를 대변하는 근원적인 원리라고 생각을 넓힌다면 한용운의 시에 대한 감상을 깊이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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