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by QUE


자취 약 5년차, 요리를 하고 설겆이를 한다는 것, 식자재가 냉장고 및 냉동고에 방치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에는 시간과 품이 든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따뜻한 집밥 분위기를 풍기는 식당을 좋아하게 되었고, 플라스틱이 아닌 자기나 유리그릇에 음식을 담아주는 식당을 선호하게 되었다.


남양주에 위치한 어떤 식당에서는 부엌이 오픈되어 있어 도각도각하고 가끔 무 써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게 그렇게나 큰 위안이 되는 소리인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몸이 노곤해지는 따뜻한 공간에서 누군가가 도마소리를 내며 요리를 해주는 공간이라는 게 그렇게나 평온을 건네주는 일인지를. 어쩐지 마음이 포근해져서 주변을 살폈을때 눈치챌 수 있는 건 따뜻한 온기 속에서 도마와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매 끼를 사 먹고 싶지는 않고, 누군가 해주지 않더라도 나를 잘 챙겨주기 위해서 가끔 요리를 한다. 가벼운 요리일지라도 최소한의 끼니 두번에 품과 시간이 거의 종일 소모되는 행위를 하다보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식사행위마저도 점점 자본이 침식해 와서 온전하지 못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온기를 자본주의가 무섭게 갉아먹으러 쫓아오는 기분이 든다.


식사를 차려먹기 위해서는 요리라는 노동을 할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재료를 구매해야 한다. 설겆이도 해야하고 발우공양하듯 싹싹 긁어먹어도 손질한 재료에 따라서 음식물 쓰레기도 적잖이 나온다. 바지런해질 시간도 주지 않고 냉장고 속 식재료들은 속절없이 상해간다. 그냥 나가서 해결하는 선택지를 손쉽게 고르고 싶어진다.


야채와 과일을 보관하기 위해 필요한 냉장고가 차지하는 공간은, 좁은 방 한칸에서는 나름 큰 공간이며 존재감이 있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석에 우두커니 서있는 냉장고를 볼때마다, 10평이 안되는 방 한칸에서 그 크기를 가늠하다보면 나중에는 정말로 땅에서 잘 자란 유기체를 소비하는 일이 값비싼 행위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가장 최근의 여름에는 계란과 우유의 공급이 끊길 때도 있었다. 매장에서는 날이 너무 더워서 소들에게서 우유가 나오지 않고 닭들이 계란을 낳지 않는다고 했다.


패스트푸드를 먹고 편의점 음식을 소비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아포칼립스에 가깝게 느껴진다. 얇게 출력된 고분자 화합물에 쌓여있는 값싼 음식물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혀끝에 잠깐의 즐거움은 스쳐가지만 그 안에 사용된 식재료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다. 입에 들어가는 것의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고 인간으로서의 통제감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실당한다.


요리를 해서 먹는 일이 부르주아적 행위라는 현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 하다. 의, 식, 주에서 식과 주가 자본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침식당하고 있음을 느낀다. 옷은 한두벌로도 찢어질 때까지 입으면 된다지만 식과 주는 매일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이래도 괜찮은 걸까.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들은 매달 고가의 방값을 내며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한칸에서 살아간다. 좁은 방에서 부엌과 세탁기는 마치 사치라는 듯이 가끔은 없기도 하다.


다 먹고 살기 위함인데 먹고 산다는 일이 이래서 괜찮은 걸까. 따뜻한 식사 한그릇을 위해 인류가 얼마나 더 처절해질지 이 방향이 맞는건지 어디엔가 따져묻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