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의 배경이자 흔히 '강호무림'이라 일컫는 무협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사회를 지형과 세력으로 구분하는 용어가 따로 존재한다. 지형적으로는 패권다툼이 주로 벌어지는 대륙 내부지역인 중원과, 변방-외지를 통틀어 가리키는 새외로 나뉜다. 세력적으로는 크게 정도(正道)를 걷는 정파와 일반적인 도덕상식을 벗어나 사특한 길을 걷는 사파, 그리고 악마들의 종교집단인 마교로 나뉜다. 정파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가문들이 속해 있으나, 그중 천하의 명문으로 불리는 거대세력만 따지면 도가 혹은 불가에 수행의 바탕을 둔 구파일방과 혈연에 근본을 둔 오대세가로 다시 나눠볼 수 있다.
#대화산파_13대_제자 #천하제일검_매화검존
환생 전 과거의 청명은 천하를 오시하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문파였던 화산파 소속이자, 일신의 무위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하제일검이었다. 한마디로 빽도 짱짱한데 개인 스펙까지 원톱인 사기캐였다는 소리다. 물리적 힘의 경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결정하는 강호에서, 청명은 제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인 청문을 제외하면 천하 그 누구라도 두려울 것이 없는 절대강자였다. 타고난 천재성, 거칠 것 없는 불 같은 성미와 유아독존의 태도로 한평생 만인에게 선망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매화검존 청명은, 천하를 악(惡)으로 평정하기 위해 중원을 침략한 마교와의 전쟁에서 선봉으로 활약한다. 이때 마교의 교주이자 초월적 존재인 천마와의 악전고투 끝에 그의 목숨을 거두어 세상의 평화를 지켜낸 뒤 전사한다.
당시 청명은 난세 영웅의 삶에 부족함 없는 자질과 의기를 지녔지만 단 하나, 주변을 돌아봄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포용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다. 당대의 인재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걸출한 사형제들마저도 불세출의 천재인 청명 본인과는 도무지 속도를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표현법은 거칠어도 청명의 눈에 그들은 항상 '약해 빠져서 자신이 지켜줘야 할' 녀석들이었던 것이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개세지재(蓋世之才)로서 이러한 청명의 강박적인 책임 의식은 마교와의 혈투에서 세계관 최강자인 천마를 대적하느라 전력을 다한 나머지 함께 싸우던 사형제들의 전멸을 막을 수 없었던 최후의 순간, 죽음 이후에도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트라우마를 청명에게 남겨주었다.
#대화산파_23대_제자 #천하제일_후기지수_화산신룡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현재 시점, 청명은 거지소년 초삼의 몸으로 환생한다. 그러나 청명의 둥지였던 화산은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순조롭게 망해가고 있었다. 결국 청명은 화산을 재건하겠다는 일념 하에 다시 화산파의 삼대제자로 입문하게 된다. 화산의 선조이자 전설인 그가 말단 중에서도 가장 막내 취급을 받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어린 소년의 몸에 갇혔다고 해서 천하에 악명(!)을 떨쳤던 그 승질머리까지 어디 가버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선후배간에 엄격했던 화산의 위계질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에 의해 완벽하게 재편된다.
그렇게 화산 역사상 제일의 기재였던 청명의 부활은 부강했던 과거의 풍모를 잃고 몰락해가던 화산파 부활의 신호탄이 되어, 화산귀환의 1막을 대차게 열어젖힌다. 편의상 연재분의 절반 가량인 500화, 즉 백년 전 수장인 천마를 잃고 잠적했던 마교의 부활을 암시하는 북해빙궁 에피소드까지를 1막이라고 정의한다.
1막, 느슨해진 강호에 긴장감을 주는…
화산파 몰락의 시작은 마교와의 전쟁이었으나, 기폭제가 된 것은 전쟁 이후 정파들 간의 알력다툼이었다. 청명의 화산은 전쟁에서 가장 앞장서 싸웠기에 가장 큰 희생과 전력 소실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가며 세상을 구원한 대가는, 화산과 천하제일문파 지위를 두고 다투던 타 문파들의 철저한 외면이었다.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아예 화산의 공로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렸다. 구파일방이라는 이름 아래 한 배를 탔던 이들이 화재로 다 타버린 집에 수습할 손을 보태기는 커녕 한 톨 남은 불씨까지 되살리겠다고 기름을 부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파악을 마친 청명의 구파일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은 벽돌깨기하듯 이어지는 경쾌한 복수극의 동력이 된다.
작품 초반부 청명은 말 그대로 '멱살 잡고' 화산을 이끌어간다. 새로운 몸에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하지만 과거의 감각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개 제자들의 수준은 아득히 뛰어넘는 무력, 그리고 육체적인 능력과는 다르게 오랜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서 남아있는 지략과 처세술로 순식간에 화산을 장악한 청명은 화산 제자들의 하드 트레이닝을 통한 환골탈태 프로젝트를 전적으로 담당한다. 멸문 직전의 문파라는 비참한 환경 안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후배들의 몸뚱이와 정신력을 화려한 말빨과 계급장 뗀 주먹으로 쇠처럼 두드려 단련시킨다. 덕분에 거진 모든 명문가를 통틀어 하위권이던 화산 문하생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한다.
그럼에도 이미 지나가버린 백 년의 세월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는, 청명 본인이 직접 나서서 아주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버린다. 전쟁 중에 실전된 비법서를 기억만으로 복원해 전수한다거나, 화산의 검법을 표절한 종남의 제자 열 명을 상대로 혼자서 무패전승을 한다거나, 화산의 세가 기우는 틈을 타 천하제일문으로 자리잡은 소림이 공들여 키운 비밀병기마저 실력으로 압도해 콧대를 꺾어 버리는 등, 맹활약을 넘어선 청명의 원맨쇼에 독자들은 화산의 후예들과 함께 환호하며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비범함으로 시작해 꼰대력으로 끝나는 악마의 스타성
아무리 전근대적인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무림이라지만, 청명이라는 단 한 명의 게임 체인저로 인해 화산이 기사회생하는 일련의 과정은 얼핏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이러한 원톱물의 맹점을 중화시키는 요소가 바로 청명의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성이다.
"지가 날고 뛰어 봐야 땡중이지. 어디 머리털도 없는 게 날 이겨 먹으려 들어. 대가리를 확 마!" "……."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인간이 안 된다. 모두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연소자의 외관으로 뻑하면 라떼는 말이야를 부르짖으며 사형제들의 어이를 가출시키는 특기를 가진 청명.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가식은 버리고 실리는 취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작중 최고의 속물이자 어그로꾼인 청명을 씹는 것은 화산의 일상이다. 평범한 무인들은 그 나이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차원에서의 발전을 거듭하고 성과를 내면서도, 한결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 꼴로 언동하며 벌어지려는 심리적 거리를 도로 좁혀 놓는다. 그러니 누구나 청명의 비범함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돌아서면 염라대왕도 반품할 인성질에 혀를 차기 일쑤인 것이다. 청명이 본연의 압도적인 아우라를 내보이는 순간은 오직 화산이 무시당하거나, 현저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뿐이다. 그렇기에 청명의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은 집단 내부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청명의 이런 날 것의 성향 덕분에 화산귀환 1막은 전반적으로 쫄깃하고 유쾌한 리듬으로 흐른다. 화산의 명맥이 끊어지기만을 고대하며 대놓고 괄시하던 작자들의 대가리를 청명이 사이다병으로 후드려 깨는 해프닝의 연속. 전쟁으로 전수자와 바이블을 모두 잃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수 없었던 화산의 고급 무학들이 청명의 몸과 정신을 빌어 깨어나고, 지옥의 훈련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해지자 화산의 명성은 다시 강호에 파랑을 일으킨다. 협의의 종말이라는 비정한 현실 앞에 화산을 좀먹어가던 무기력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이 지천의 매화처럼 꽃망울을 틔운다. 이렇듯 1막의 청명은 무력을 과시함으로서 강호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 안에서 화산의 내실을 재정비한다.
실상 이 모든 변화는 전쟁 이후 망조가 든 화산에 꿋꿋이 남아준 이들에게 선조인 청명이 마음의 빚을 갚는 과정이다. 자신을 포함한 화산의 재목들이 최전방에서 모두 죽었기에 그 공백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마교 최대의 숙적이었던 청명의 본적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은 마교의 잔당들이 화산에 몰려와 본산을 전부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 년간 꿰맬 여력도 없이 벌어져 피만 흘리던 화산의 상처는 청명이 돌아와서야 비로소 치유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전쟁이 청명 자신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죽어있는 동안은 흘러버린 백 년의 시간을 체감할 수 없기에, 청명에게 전쟁은 몇 년 전이나 다름없는 생생한 기억이다. 죄의식을 가진 청명이 과거보다 현재의 화산에 몰두했기에 볼 수 없었던 것을, 청명에게 몰두한 독자들은 차츰 보게 되는 것이다. 빛이 들지 않는 심연으로 가라앉으며. 화산귀환 2막은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