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제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
‘정상화’라는 말이 사회 이곳저곳에 남용되는 분위기지만 여기에는 확실히 붙일 수 있다. 주52시간 근로제 이야기다.
원래 우리 법은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이전부터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정해두었다(제50조, 제52조).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1주의 기준을 7일이 아닌 주말을 제외한 5일로 해석하는 행정지침을 내리면서 갑자기 평일 52시간에 주말 16시간을 더해 총 68시간까지 노동시간이 가능하게 됐다. 행정지침으로 법을 형해화하는 조치였다.
이 행정지침은 2018년에 들어 폐기됐다. 정확히 말하면 근로기준법에 ‘일주일은 7일’이라고 못박으며 꼼수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국회는 2월 28일,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명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지침은 올 7월부터 적용됐다. 언론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다고 이야기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상화였다. 이제 원래 법대로, 꼼수 없이 주 52시간제를 시행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정상화라고 하지만 기존의 관행대로 사업을 유지하던 기업에게는 타격이 생길 수 있어 정부는 유예기간과 특례업종을 정했다.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직원 300명 이상 사업장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단속과 처벌도 6개월간 유예했다.
지난 10월에 구직플랫폼 사람인이 직장인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응답자들이 재직 중인 기업의 43.6%는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 재직자 중 절반이 넘는 54%는 별다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긍정적으로 체감’하는 사람은 30.6%, ‘부정적으로 체감’하는 사람은 15.4% 였다.
하지만 한국경제신문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한국경제는 주52시간 제도가 시행된 지난 7월부터 10월 말까지 약 150여편에 이르는 ‘주52시간’ 관련 기사를 써냈다. 매일경제도 약 120편 정도의 기사를 내보냈다. 매일 경제는 분석기사와 비판기사가 골고루 나왔지만 한국경제신문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비판기사였다.
문제는 이 비판의 내용이 사례를 억지로 꿰맞춘 경우가 잦다는 점이다.
정부는 ‘주52시간제‘를 도입하면서 산업별 특성에 적용될 수 있는 예외적인 조항을 같이 만들어두었다. 모든 회사와 업종에서 ‘한주에 52시간만 근무’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한국경제가 올린 기사와 그 예외 사례를 살펴보자.
″시운전은 건조한 선박을 선주에게 인도하기에 앞서 계약서에 따른 성능과 기능을 검증하는 업무를 말한다. 크게 안벽(배를 접안할 수 있는 부두시설) 시운전과 해상 시운전으로 나뉜다. 6~8개월가량 걸리는 안벽 시운전은 부문별로 동시에 성능검사를 하는 만큼 단기간에 업무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일반 상선은 바다에서 3주가량 해상 시운전(군함 등 특수선은 6개월 이상)을 하는데 근로자 교대 자체가 쉽지 않아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키기 어려운 구조다. 승선 근로자를 늘리면 생활 공간 등이 부족해져 안전 사고 위험이 커진다.”
- 2018년6월4일 보도
먼저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주 52시간 근무를 최대 3개월에 걸쳐서만 시행하면 된다. 가령 앞서 언급된 ‘건조 선박 시운전’ 업종은 단기간에 업무가 몰리기 때문에 업종의 경우 이 제도를 시행하면 3개월 중 2개월은 주64시간(주52시간 + 연장근로 12시간)을 근무하고 남은 기간은 휴가를 사용하거나 오전근무만 하면 된다. 3개월간 최대 10주까지 주64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심지어 아래 표처럼 첫 3개월은 휴가 후 10주 근무, 두번째 3개월은 10주 근무 후 휴가를 적용하게 되면 최대 20주까지 주64시간 노동이 가능해진다.
″홍보업계에 종사하는 A 씨는 주 52시간 근무가 남의 일처럼 들린다. 회사 정책에 따라 컴퓨터가 6시 30분에 꺼지지만 A 씨와 동기들은 6시부터 개인 노트북을 펼쳐야 한다. 클라이언트와 계약한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서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 2018년6월 보도
노동자가 회사와 ‘월 단위‘로 근로시간을 합의하고 자율적으로 출근하는 방법도 있다. 이른바 ‘선택적 근로시간제’이다. 이 경우에는 노동자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따라 야간, 주말 출근을 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회사에 나오지 않는 것도 가능하다. 주 52시간제 근무가 월단위로 적용되기 때문에 극단적인 예로 첫 한달간 보름을 쉰 뒤 하루에 14시간씩 보름을 일하고 다시 하루 14시간씩 보름을 일한 뒤 보름을 쉬게 되면 한달간 14시간씩 근무하는 것도 산술적으로 가능하다.
″명확한 합의나 대책 없이 ‘주 68시간 근무제’에 돌입한 방송사들이 저마다 한숨을 쉬고 있다. 드라마 촬영 현장은 작가가 대본을 빨리 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예능 역시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려고 PD들이 매일같이 대책회의를 해보지만 뾰족한 수는 없는 상황이다. 방송가에선 “68시간도 이런데 장기적으로 52시간은 어떻게 맞추느냐”고 입을 모은다”
- 2018년 7월 보도
더 폭넓은 예외도 있다. 바로 재량근로시간제이다. 이 경우 서면합의로 근로시간만 정하면 실제 업무 내용이나 노동시간을 노동자가 임의로 정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고도의 전문 업무에 종사하거나 창의적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의 경우에는 업무 수행 수단에 재량의 여지가 크고, 보수 또한 근로의 양보다는 근로의 질 내지 성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에 ”종래와 같이 시간의 길이에 따라 임금지급액을 결정하는 방식이 적절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며 제도의 취지를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임금을 결과물에 따라 ‘통으로’ 정하는 제도다.
물론 이 제도를 적용할 수 있는 업종은 한정돼 있다. 기술연구 분야, 일부 IT 업종, 기자, 편집자, 방송 PD, 디자이너, 법무나 회계 등 전문직 등이다. 노동시간의 경우에도 서면합의에서 정한 간주근로시간이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하는 경우, 예를 들어 간주 노동시간이 주 52시간인 경우 40시간 초과분에 대해서는 가산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휴일과 휴가, 휴게시간 등도 별도로 부여해야 한다.
물론 앞서의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혹은 노동조합)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거나 임금 협상을 할 때도 노동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에게 중요한 근로조건 변경에 노동자의 동의를 받게 하는 데에는 협상에 있어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이 있다. ‘근로조건을 변경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이런 근로기준법의 근간까지 훼손하며 노동자의 동의 요건을 없앨 수는 없다.
앞서의 기사보다 더 심각한 보도가 지난 24일 등장했다. 한국경제는 ‘제작비 100억 이상의 대작 영화들이 잇따라 흥행에 참패했다’면서 그 이유를 ’52시간 근로제’에서 찾았다.
한 제작사는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면서 촬영시간을 하루 8시간 이내로 맞추려다 보니 촬영일수가 크게 늘었다”며 ”편당 제작비가 급상승했다”고 말했다.
이는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무시한 보도다. 이 보도가 지적한 영화는 안시성, 명당, 물괴인데 이 영화 모두 올해 초 촬영을 마쳤다. 주52시간제의 시행일은 올 7월부터다. 후반작업이 7월 이후까지 계속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주52시간제는 기업의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된다. 300인 이상의 경우는 올 7월부터 시행되는 게 맞지만 50인 이상 ~ 300인 미만의 사업장은 2020년부터, 5인 이상 ~ 50인 미만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시행된다. 즉, 후반작업이 7월 이후까지 진행됐다 하더라도 300인 이상 사업장인 경우에나 적용된다. 후반작업을 진행하는 회사 중 300명을 넘는 회사는 거의 찾기 힘들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한경 편집회의에서도 이 기사에 대해 “말 안 되는 논리를 억지로 갖다붙였다”는 지적이 나왔다고 한다. 결국 이 기사는 25일에 수정됐고 한경은 별도의 알림을 내보냈다.
10월25일자 한국경제신문 A31면에 실린 ‘제작비 100억원 이상 大作 잇단 참패’ 기사에서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돼 제작비가 급상승했다”는 한 제작사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한 것은 해당 기사에 적합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방송인 김어준씨는 25일 TBS 라디오에서 “영화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소는 시나리오, 연출, 감독, 배우, 시대 트렌드, 관객 기호, 개봉시기, 경쟁작의 유무 등등 대단히 복합적”이라면서 “그 복잡한 요인 중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엮어 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비난했다. 해당 기사의 포털 댓글도 조롱 일색이었다. 오죽하면 한국경제신문의 보도행태를 관동 대지진 사건에 빗댄 ”주 52시간제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한경이 계속 이런 식의 보도를 계속하는 이유를, 전경련 회원사가 그들의 주주라는 이유에서, 또 그들이 전경련의 기관지라는 비아냥에서 찾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토록 우스갯거리가 될 때까지 사실관계를 무시하는 보도를 내는 다른 뾰족한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한국경제신문은 1980년 11월 15일 언론통폐합 때 한국신문협회의 결의에 따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사 202개가 주주가 참여해 창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