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청춘시대>, 우리의 환상 밖 여대생 혹은 여성의 모습
우리의 삶 대부분이 그렇다. 정의된 양 극단의 어디 즈음에서, 경계를 밟으며 정체를 오간다. 우리는 때론 착하고 때론 나쁘다. 때론 멋지며 때론 구질구질하다. 어느 것도 거짓은 아니다. 삶의 양태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자기를 취한다.
한국 드라마가 별로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간 봐왔던 수많은 캐릭터는, 작가에 의해 부여받은 자기 정체를 고유하게 유지하거나 혹은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만 바꾼다. 한없이 착하고 자상한 아버지는 어느 날 가족 앞에 놓인 고난의 상황 때문에 삶을 급격하게 전환하며 야수로 변한다. 그를 변하게 만든 건 오직 가족이라는 외부환경일 뿐, 그 아버지는 원래 ‘착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정에 반드시 헌신해야 하는 ‘가장’이기도 하다.
한국의 콘텐츠는 ‘정상’이라고 불리는 어떤 이상향들을 복제하기에 바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보편타당한 ‘정상성’과 ‘전형성’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굴릴 수 있었던 게 내가 떠올린 그간의 한국형 드라마 콘텐츠였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뻔한 정상과 비정상 사이 어디쯤을 비집고 들어가 이야기를 풀어낸다.
윤진명은 어쩌면 전형적인 캐릭터다. 하루에 알바를 몇 개씩 하고 남는 시간에 취업을 준비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나 바쁜 몸으로 남들과 비슷한 스펙을 만들기도 힘들다. 일요일 저녁에 캔맥주 한잔 마시는 게 그가 누리는 유일한 유흥이다. 최근 복제되고 있는 고단한 청년 세대의 과장된 전형이다.
윤진명의 반대편에서 철저히 대비되는 캐릭터, 강이나는 윤진명에게 왜 그리 힘들게 사냐고 반문한다. 스폰서를 둔 가짜 여대생, 가짜 연애를 대가로 받은 신용카드로 자기를 마음껏 치장하고 사는 강이나지만, 자신의 ‘가짜’인 것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진짜’이기도 하다.
양 극단에 있는 두 캐릭터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비로소 접점을 찾는다. 매장 매니저가 소박한 제안을 대가로 윤진명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조금 더 포장된 조건을 구실로 별장으로 데려갔을 때. 그 별장 문턱을 넘지 못하는 진명에게 “덜 절박하구나”라고 이야기했을 때. 고개를 떨구고 “절박하니까 여기까지 온 거겠죠”라고 답했을 때. 그때 진명은 이나를 떠올린다.
“그동안 난 널 경멸했다. 내가 너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아니었어. 나에겐 그저 너만큼의 유혹이 없었던 것 뿐이야.”
드라마는 유혹을 이겨낸 진명을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진명과 이나를 둘러싼 ‘유혹’을 조명한다. 같잖은 제안을 이유로 허벅지에 손을 올려도 되는, 여대생 스폰서가 사회적 문제라면서 여대생들의 비윤리성을 지겹도록 읊지만 정작 ‘스폰서’에 대해선 함구하거나 그의 ‘능력’이라고 치켜세우는. 그런 세상을 조명한다. <청춘시대>는 진명을 선으로, 이나를 악으로 그려냈던 그간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대신 조용히 묻는다.
“우리를 이렇게 나누어 놓은 것은 대체 누구지?”
직업란에 자기가 다니는 대학교 이름을 적었다는 이유로 예은은 차 밖으로 끌려나온다. 그게 남친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다는 이유다. 상황을 목격한 이나는 예은에게 윽박지른다.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사냐고.
예은에게도 사정이 있다.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연애가 끝나는 게 무서워서 기울어진 관계를 택한다. 이해심 많고 남자를 위해주는 ‘개념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연애를 하는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이라고 여기며 체념한다. 남자가 연애관계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지만, 예은은 그때도 화를 내기보다는 웃음을 짓는다. 오히려 둘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을 인내해본 적 없는 남자가 먼저 쉽게 화를 낸다. 이 개념녀는 결국 이별을 선언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예은에게 찾아온 건 ‘안전 이별’이 아니라 납치와 감금이었다.
이나는 예은과도 정반대에 서 있다. 자기의 가짜 연인들의 무리한 요구를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늦은 밤 나오라는 애인의 연락에 예은은 ‘마침 그 근처에 있다’고 거짓말 하며 나가지만 이나는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냐’며 성을 낸다. 하지만 따져보면 사실 이나가 크게 유별나거나 나쁜 것도 아니다. 개념녀의 옷이 거추장스러워 자기 편의를 택했을 뿐이고 우린 그걸 좀 어색해 할 뿐이다.
언뜻 보면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이나지만, ‘썅년’의 삶이 마냥 순탄하지도 않다. 이나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던 남성은 자신의 구애가 통하지 않자 결국 이나의 삶이 잘못되었다며 그를 구원하겠다고 선언한다.
“지금 이나씨가 하고 있는 건 매춘입니다. 그 남자들 이나씨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 남자들 이나씨 돈으로 사고 있는 거예요. 이나씨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이나씨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도와줄 게요. 이나씨 과거가 어떤진 모르겠지만. 내가 구해 줄게요.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어요.”
여기까지는 흔한 구원의 서사다. 보통이라면 여성은 남성의 순애보에 감동받아야 하고 그래서 그 남자를 다시 봐야 한다. 하지만 거듭 말하듯, 이 드라마는 기존에 통용되었던 문법을 따르진 않는다. 그 남자의 구원의 손길 앞에서 이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야 이 새끼야.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내몸 팔아 사는데, 니가 왜 지랄이야. 니가 왜 지랄이냐고 개새끼야.”
여태까지 유효했던 순정파의 순애보나 구원의 서사가 비로소 무례와 폭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저 욕지거리는 ‘그녀’들의 삶에 부단히도 개입했던 ‘그’들을 향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이다’는 조금 슬프다. ‘착한 개념녀’도, 윤리나 보편적 감성 같은 것들을 걷어차고 살았던 ‘썅년’도 ‘그’들의 간섭이나 폭력에서 비껴나가기는 힘들다.
이 땅의 수많은 ‘예은’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여자’로서의 의무를 참아낸 대가로 낡고 초라한 ‘개념녀’의 훈장을 얻었겠지만, 그 의무를 걷어 찬 소수의 ‘이나’들은 그때부터 ‘썅년’ 내지는 ‘창녀’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야 한다. 이나가 그랬듯이.
그간 한국 방송에서, 혹은 영화에서 그려낸 여성들의 모습은 철저히 도구에 불과했다. 수많은 ‘그녀들’은 독립된 캐릭터로서의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다. 그저 ‘여성’으로서 눈요기로 소비되었거나 조금 더 나은 경우 남성의 성장이나 변화의 계기로서 사용되었다.
영화 <차이나 타운>은 그래서 이상했다. 이 영화는 기존 남녀의 서사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여성에 의해서 유지되는 느와르의 세계는 그 자체로 이상했고 낯설었지만, 더 이상했던 건 영화 속 에 등장하는 석현(박보검 분)의 캐릭터였다. 혹자는 그가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석현은 아무이유 없이 일영(김고은 분)을 향해 시종일관 잘해주고 웃어주며 일영에게 사랑의 감정을 알려주지만 그래서 죽는다. 석현의 죽음으로 일영은 비로소 거친 세계 속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 문법은 낯선 게 아니다. 다만 그간 성별이 뒤바뀌어 소비되었을 뿐이다.
여성 다섯이 전면에 등장했던, 그리고 그들의 캐릭터가 살아 움직였던 드라마가 몇이나 될까? 크고 작은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거나 혹은 <차이나 타운>처럼 어색함만 만들어내고 사라졌다. 물론 그걸 전적으로 ‘작품’의 탓으로 돌리기엔, <차이나 타운>의 여운은 너무 찝찝하다.
<청춘시대> 속엔 그림처럼 그려낸 ‘여성’이 없다. 대신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다섯 명이 그려내는 좌표 어딘가에서 방황하며, 쉽게 한쪽 편에 서지 못하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모두를 이해하게 되는 관조자인 내가 있을 뿐이다. 그 알뜰한 긴장감이 내가 이 드라마를 ‘최고’라고 꼽는 소박한 이유다.
비록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매니아들의 성원에 힘입어 종영 1년여 만에 새로운 시즌을 방영한다고 한다. 윤진명 역의 한예리와 정예은 역의 한승연, 송지원 역의 박은빈은 그대로 출연하고 강이나 역의 류화영과 유은재 역의 박혜수는 빠질 예정이다.
올해 8월, 다시 한번 <벨 에포크>에서의 삶을 엿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