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에 다녀와서
처음에 전자책이란 것을 알았을 때에는 '획기적이다'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을 가방에 집어넣고 통학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책을 수백 권 들고 다녀도 늘어나지 않는 무게, 책에 비해 싼 가격. 그리고 태블릿을 들고 책을 보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의 짜릿함.(속된 말로 허세) 그것에 "책의 내용이 겉모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한 친구는 "우리 학과 교수님은 책을 스캔해서 PDF 파일로 변환해 주는 곳에 자신의 모든 책을 보냈다" 라며 내가 전자책을 살만한 근거를 새롭게 마련해주었다. 며칠 뒤 내 손엔 아이패드가 들려있었다.
내가 전자책을 보며 처음 느낀 감정은 '아 이거 별로다'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별다른 필기도구 없이 표기도 가능했고, 내가 좋아하는 글귀는 따로 보관도 가능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주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싶으면 기다리지 않고 구매하면 바로 볼 수 있었다. 단어에 대한 검색도 가능하다. 요즘엔 책을 보지 않고 듣기도 가능하단다. 다시 말하면 책 읽기 편리함의 총체다. 그런데 나는 뭔가 맘에 안 들었다.
종이로 된 책은 불편하다. 일단 무겁다. 300쪽이 넘는 책 두권만 가방에 넣어도 들고 다니기 힘들다. 책에 어떤 표시를 하려고 해도 필기도구를 준비해야 하고, 혹시나 펜으로 잘못 표기했다면 지우기도 힘들다. 지금 A라는 책을 읽고 싶은데, 서점에 갈 수 없다면 기다려야 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해 택배를 기다리거나 다음 날 서점에 가야 한다. 책을 많이 사면 공간도 부족해진다. 이사할 때도 이삿짐 아저씨로부터 엄청난 쿠사리?를 먹는다.
그래도 난 종이책이 좋다. 이미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더 잘 읽힌다. 느낌도 좋다. 책을 넘길 때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도 정겹다. 새 책을 샀을 때 그 빳빳한 느낌도 좋다. 꼭 나와 처음 만난 동물 같다. 어느 정도 책을 읽다 보면 책이 넘어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꽤 잘 길들였구나'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기도 한다. 나름 중요한 부분이라 밑줄을 그은 거 같은데, 다시 보면 왜 그었지? 하는 때도 상당수 있다. 가끔 생각나는 것을 책에 적기도 한다. 나중에 보면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다. 어떤 메모는 지금 보기에 정말 부끄러울 때도 있다. 전자책이면 이런 흔적들 쯤이야 지우개 아이콘을 클릭해서 몇 번 드래그 해주면 끝인데.. 하지만 난 종이책의 약점마저 장점으로 보인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우리 모두 지우고 싶은 실수가 있지만, 한번 일어난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바로 볼 수 있는 전자책의 편리함보다, 택배를 기다리는 것이, 서점에 들러서 내가 사고픈 책 말고도 여러 책을 둘러보며 이런 책들이 있구나 라고 느끼는 것이, 혹은 내가 사기로 마음먹은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사는 것이. 난 이런 것들이 좋다.
어제 처음으로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지혜의 숲에 다녀왔다. 평생 다 보지도 못할 책들이 책장에 빼곡히 넣어져 있었다. 한쪽에선 아주머니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다른 한쪽에선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책을 읽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책이란 매개체로 지혜의 숲을 찾는 듯했다. 사실 나도 그런 이유로 지혜의 숲을 찾았고, 만족감을 느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종이책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난 종이책이 좋다. 책의 내용도 물론 소중하지만, 책이란 물건이 나에겐 소중한 그 무엇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늘도 책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