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오슬로, 영화 <파리의 딜릴리>
서른이 되어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는 지지난해 유럽배낭여행을 다녀 온 것이다. 5달 넘께 꼬박 모아놓은 재정을 한방에 엔꼬로 돌리고 과감하게 15일 연가를 몰아 썼다. 돈도 돈이었지만, 직장 눈치며, 혼자서 일정을 소화시켜야 하는데 드는 체력과 안전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못 갈 이유는 시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차고 넘친다. 어쩌면 여행은 과정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갈 수 이유를 수없이 세다가 과감하게 모든 생각의 고리를 끊고, 비행기 티켓 먼저 예약을 하고 무작정 파리로 떠났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얼마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졌으니. 그 때 나는 인생에 의미있는 선택을 꽤 합리적으로 한 셈이다.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즐기는 시절은 끝났다."
어쩌면 우리가 차별과 까다로운 절차 없이 자유롭게 유럽을 활보하며 여행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슬픈 예언을 하던 동료의 말에 '샤를드롤 공항'을 끝으로 작년에 만기된 여권을 서랍에 고이 모시고, 아직 갱신을 하지 않았다. 스무살에 10년 기한의 여권을 만들고, 서른에 그 여권의 마지막 장에 그토록 꿈꾸던 파리여행으로 끝을 맺었으니, 나의 첫번째 여권은 여한없는 화려한 에필로그를 장식한 셈이다. 올 해는 다시 10년 기한을 두고, 새로운 여권을 만들 계획이다. 하지만, 언제쯤 다시 한반도 너머의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장기간 지속이 되면서, 일상이 지루하고 지칠 때마다 '여행'이 더욱 그립다. 낯선 장소와 사람들 안에 나를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경험. 두 발로 걸어, 온전히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마주하는 생경한 풍경 안에 푹 잠기고픈 그런 날마다. 서랍에 넣어둔 여권을 꺼내 파리로 떠났던 마지막 여행을 떠올리곤 한다.
언제나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에게 '파리'는 몇 번을 가도 또 가고 싶은 도시일 것이다. 파리의 거리 곳곳은 그 자체로 살아숨쉬는 예술과 역사의 현장이다. 낡은 휴지통과 오래된 하수도 마저도 예술적인 어느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빛 바랬지만 엔틱한 건축물들은 오랜 전통과 역사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을 자아내기도 하고, 사람들의 옷차림과 거리의 풍경,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변화는 그 자체로 회화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살롱뤼미에르에서는 코로나로 발목잡혀 여행이 그리운 날에, 프랑스영화를 통해 여행을 해보자는 취지로 여행을 테마로 한 상영회의 문을 열었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시작하는 상영회의 첫번째 주제는 '파리 벨에포크 시대'로의 여행이다. 그리고 햇빛 아래서 더 빛나고 찬란했던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2편의 작품을 소개했다. 앞서 두번 째 주 수요일에는 잘 알고 있는 우디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파리>를 상영했고, 오늘 소개할 영화 <파리의 딜릴리>가 두번째 상영작이다.
지난해 개봉해 소수만이 관람을 하고, 기존 정형화된 미국 애니메이션의 형식과 서사구조의 틀을 벗어나 생소할 수 있지만 기존 애니메이션에 없는 관점, 정말 프랑스스러운 고유한 감성과 자유로움을 담은 <파리의 딜릴리>는 미셸 오슬로의 작품이다.
미셸 오슬로는 프랑스 최고의 애니매이터로 '색체의 마법사'라고도 불린다. 미셸 오슬로 감독의 다른 작품으로 <파리의 딜릴리> 보다 12년 전에 만들어진 <아주르와 아스마르>라는 작품을 먼저 본 적이 있다. 여기서도 아랍권이랑 서구문명을 섞어놓은 미장센이 너무 앞도적으로 독특하고, 색체가 너무나 아름다워 파리의 딜릴리도 기대하면서 보았던거 같다. 또 금발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아주르'와 검은머리와 검은눈을 가진 '아스마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면서, 함께 요정진을 만나러 가는 모험담을 그려 서양문화와 이슬람문화의 화합과 공존을 말하는 미셸오슬로 감독만의 주제의식이 생경했던 기억이 난다.
<키리쿠와 마녀> <키리쿠 키리쿠>와 같은 키리쿠 시리즈로 알려지게 된 미셸 오슬로는 특유의 디테일한 터치와 섬세한 색감으로 아프리카카의 자연을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여섯살 때부터 열 두살까지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방인 기니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앞전 작품들을 살펴보면, 원시우림에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사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키리쿠와 마녀' 의 핵심 비주얼이 '앙리 루소'의 '꿈'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에서도 빛나는 샹들리제 아래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 안에 생뚱맞게 나타난 치타가 나타나기도 하고, 갑자기 밀림 속으로 장면이 전환되기도 하는데, 앙리 루소의 회화를 보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또 미셸 오슬로는 앙리루소를 직접 영화에 카메오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앙리루소는 영화 <파리의 딜릴리>에서 딜릴리와 오렐이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세탁선(건물의 모양이 센 강에 떠 있는 세탁선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에 찾아가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 때, 딜릴리가 세탁선으로 불리던 '바토 라부아르'에 가서 만났던 5명의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오렐의 맞은 편에 빨간 양복을 입고 앉은 남자가 바로 앙리루소다. 앙리루소의 뒤에 그려진 그림은 <원숭이를 조련하는 마법사>이다.
키리쿠 시리즈에 이어 미셸 오슬로는 '컷아웃기법'(종이에 그린 그림을 팔, 다리, 머리 등 부분별로 오려서 제조립한 다음 배경그림 위에 놓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연결동작을 만드는 기법)을 이용해 <피린스 앤 프린세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컷아웃기법을 실루엣 처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교함과 기교 면에서 최고의 작품이라 찬사를 받았다. 또 다른, 그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으로는 <밤의 이야기>가 있으며, 여기서는 3D기법을 처음 도입하게 된다.
이렇게 30여년 동안 작품활동을 통해 유난히 다채로운 문화와 인종을 다루며, 남다른 주제의식을 전달했던 미셸오슬로 감독이 그 다음으로 주목한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 '파리'다. 미셸 오슬로는 <파리의 딜릴리>를 통해 "이 영화는 파리를 향한 나의 사랑고백."이라고 말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유럽을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위해 미셸오슬로는 19세기 풍경을 담기 위해 보존된 하수도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파리 곳곳을 4년간 돌아다니와 찍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통해 영상을 제작하게 된다. 그렇게 사진 속에 쓰레기통 벽보 등을 지우거나 그래피티하는 등의 작업으로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완벽하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곳은 햇빛 아래에서 더 빛나고 거기서 나오는 부조화가 더 아름답다."
영화의 시작점부터 오슬로는 파리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무한히 드러냈다. 미셸 오슬로는 그만의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색체로 19세기 파리의 거리를 장식한다. 특히, 햇살처럼 붉은 빛과 그아래 깔린 푸른 그림자, 이 두가지의 색이 포개어 만들어낸 오묘한 보라빛이 더욱 황홀하게 19세기 벨에포크의 파리에 푹 젖게 만든다.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이해를 돕기위해 간략하게 간략한 설명하고자 한다. 벨 에포크는, 좋은 이라는 뜻의 '벨'과 시대라는 뜻의 '에포크'가 합쳐진 것으로. 19세기 말 프랑스 전쟁 이 후부터, 1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전쟁이 없던 유럽의 부흥기이자, 특히 프랑스의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로, 현재까지도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벨에포크 시대에 프랑스는 고급문화의 중심지로 더욱더 급부상한다. 과거부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프랑스의 상류문화는 이 시기에 더욱더 가속화되게 된다. 그 이유를 몇가지 꼽자면, 첫번째 전쟁이 없었고, 두번째,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며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시기였고, 세번째, 기술의 발전과 서민이 성장하며 중상층이 탄생했고, 마지막으로 영국, 미국과 같은 다른 강대국들이 다른 곳에 더 집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대공항을 겪으면서 식민지를 확장하는데 더욱 힘을 쏟았고,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한물자확보에 정신이 없었다.
19세기 프랑스는 오랜 전쟁이 끝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의 안정을 갖게 된다. 또한, 영국에서 넘어 온 산업혁명으로 기술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는데. 이에 서민들의 경제활동에자유를 얻고, 그렇게 계급에 상관없이 막대한 부를 쌓는 부르주아 층이 생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 기존의 기득권이 성장해서 올라오는 서민들을 은근히 통제하고 거리를 두기를 원하게 된다. 이에 그들은 교양과 매너 중시하는 엄격한 행동규범, 최고급의 화려한 외모치장을 선택하게 된다. 영화에서 딜릴리 역시, 고향인 뉴칼레도니아에서 파리로와 백작부인에게 프랑스어는 물론, 귀족으로 갖추어야 할 매너와 복장을 하게 된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에 노란 리본을 묶은 딜릴리의 모습이 깜찍하게 그려진다.
이에 당시에 돈이 많은 부자들은 자신들의 여유로운 모습들이 밝고 생생하게 남겨지길 원했다. 그래서 벨에포크 시기의 작품들이 유럽문화의 또 다른 황금기인 르네상스와 대비된다. 르네상스의 예술은 대부분 종교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벨 에포크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상류층의 모습과 부유층의 모습과 파리의 카페, 고급음식점, 거리 등을 묘사하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점들은 19세기 이 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이러한 '벨에포크 시대'의 사회상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회상과도 맞물리는 점이 많다.
벨에포크 시대의 화려한 건출물과 건축양식도 이 영화의 큰 볼거리 중 하나다. 딜릴리와 오렐이 에펠탑, 알렉상드르 3세다리, 개선문 등을 지날 때 지난 파리여행이 많이 떠올랐다. 여행을 할 당시, 거의 파리의 주요명소들은 거의 다가보았는데, 꼭 가보고 싶었는데 못갔던 곳이 있다. 그 곳은 바로 몽마르뜨 언덕이다. 파리의 딜릴리에서도 몽마르뜨 언덕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앙리루소가 있었던 세탁선도 몽마르뜨 언덕에 있는 곳이다. 바토 라부아르로 불리는 이 세탁선에 오렐과 딜릴리가 피카소를 만나러 가는데, 실제로 세탁선은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작업실(아뜰리에)였다.
뿐만 아니라, 툴루즈 로트렉이 등장했던 빨간풍차가 인상적인 댄스홀 역시 몽마르뜨의 명소 중 하나다.
영화에서 툴루즈- 로트렉은 이 곳에 프렌치 캉캉을 추는 무희들을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거울 벽으로 둘러 쌓인 몰랑루즈의 내부에서는 여자들이 치맛자락을 잡고 다리를 쭉쭉 들어 올리는 격렬한 춤을 밤마다 선보였다. 이 화려한 밤을 즐기기 위해 몰랑루즈로 모여든 사람들 중 툴루즈 로트렉은 실제로 몰랑루즈의 터주대감이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보면 어린아이인 딜릴리와도 키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듯한 툴루즈로트렉의 외형적인 균형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툴루즈 로트렉은 152cm의 신장을 가진 난쟁이 화가로 알려져 있다. 로트렉 가문의 귀족이었던 그는 당대 귀족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으로 태어났고, 그 부작용으로 불치병을 안아야 했다. 병약하고 뼈가 약했던 로트렉은 어렸을 때 넘어지며 허벅지뼈가 차례로 부러졌고, 이 후 성장이 아예 멈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리는 어릴때 신장으로 남고, 상체와 얼굴만 성인으로 자라게 된다.
로트렉 이외에도 <파리의 딜릴리>에서는 당대의 유명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부유층들은 화려한 고급의 문화를 원하고, 세계의 부자들이 파리로 몰려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에술가들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부자들을 따라 파리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흐름이 이어져 아직도 프랑스 파리가 화려한 예술과 고급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차례대로 되집어 보면, 세탁선에서 만난 화가들에 수잔 발라동(열정, 진취적 여성, 남자가 주를 이룰때), 피카소(작품의 변화 많음, 영화그림 장미빛 핑크톤으로봐서 장미빛시대, 청색시대, 장미빛시대, 큐비즘), 앙리루소(사실과 환상, 이국적 원시밀림), 앙리 마티스(따뜻하면서도 힘이 있는 붉은 톤의 그림)를 비롯한 콘스탄틴 블랑쿠시(얼굴조각, 파리 추상조각, 슬리핑 뮤즈), 블랑쿠시는 조각가 였다. 또 조각가로 로댕과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카미유끌로델도 등장했다. 몰랑루즈에 대한 정보를 주는 인상파의 거정 르누와르와 빛의 화가 모네. 과학자로는 퀴리부인, 다친 오렐를 치료해주는 파스퇴르 박사가 등장했다. 음악가로 드뷔시와 에릭사티도 나왔다.
너무 많이 나와서 기억을 다 못할 정도다. 미셸 오슬로는 자신이 직접 창작한이야기를 바탕으로 여기에 19세기 실존인물 100여명을 등장시켰다고 한다. 실제 19세기 근대화 중심에 서있던 파리에는 유럽과 미국 전역의 뛰어난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많은 21세기의 거장, 19세기의 예술가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동시대에 다 께 있을 수 있었을까? 황금시기라 할만하다. 감탄이 나왔다.
색체에 집중하는 모네와 행복에 몰두하는 르누와르
개인적으로 회화를 좋아하는 편이여서, 파리에 갔을 때 미술관을 많이 돌아다녔다. 기본적으로 오르세미술관이나 피카소 로댕미술관, 퐁피듀 다 좋았지만, 모네를 정말 좋아해서 다른 미술관에 비해 작품수나 규모는 작지만 오랑주리 미술관이 가장 좋았다. 수련연작을 오랑주리에서 보고, 확김에 계획에 없던 지베르니까지 일정에 끼워넣었는데, 아트상품도 정말 많이 사왔다. 수련이 그려진 에코백, 냉장고좌석, 다이어리 등등.
어쨌든 영화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모네의 그림과 르누와르가 나와서 반가웠다. 두사람은 잘 알려져 있듯, 빛과 색채의 무한한 다양성을 그린 인상주의의 거장이다. 영화에서 모네는 빛과 색체에 집중하고, 르누아르도 행복에 몰두한다는 말이 나온다. 딜릴리와 오렐이 몰랑루즈에 대한 정보를 얻으러 갔을 때, 모네와 르누아르는 이젤을 나란히 세워놓고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같은 시점에서 같은 대상을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인상주의 화풍 속에서도 두 거장의 스타일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모네가 물위에 반사된 빛과 색체를 표현하는데 집중을 하면, 르누아르는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그리는 등. 모네는 풍경을 강조하는 반면, 르누아르가 장면에 초점을 맞췄다.
규범을 벗어던진 사티의 그로시엔느
영화를 보면서, 오슬로 감독이 어떤 예술가를 어떤 장면에서 끼워넣는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계약하듯이 정말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이 잘 어우러져 벨 에포크 시대 속에 빨려들어가 딜릴리와 함께 걷는 기분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장면으로 '에릭사티'가 등장해서 그로시엔느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인상깊었다.
에릭사티는 오렐과 딜리리가 마스터맨 지하조직에 대한 결정적 정보를 얻어 행동을 본격적으로 게시하면서 등장하게 된다. 그는 몽마르뜨의 어떤 가난한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영화에서 에릭사티가 연주하는 곡이 그로시엔느 1번이다. 그로시엔느는 에릭사티가 자신의 피아노곡 유형을 구분하려고 만든 이름이다. 정통음악을 거부한 사티는 실제 몽마르트 바에서 연주를 하며 가난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에서 연주되는 규범을 벗어던진 사티의 음악, 그로시엔느는 집시들이 살던 몽마르트를 배경으로 쇼콜라의 느린춤,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딜릴리와 함께 연주되며 당대파리 사회의 단면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벨에포크 시대를 말하는 음악가와 그가 직접 등장해 연주하는 이 장면은 보는 이를 더 강력하게 그 시대의 파리로 이끈다.
선택 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주체로의 성장
이 외에도 파리의 딜릴리에 소개된 벨에포크 시대의 인물 중에는 모네 피카소와 같이 젠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도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벨 에포크 시대에 프랑스 문화에 한 획을 그은 콜레트나 카미유끌로델, 마리 퀴리와 사라베르나르 등의 여성 유명인들도 나온다. 그리고 여성들의 비중이 높은 것도 특징적이다.
파리의 클로딘, 단발머리의 콜레트
해리포터 작가 조엔롤링의 롤모델로 알려진 콜레트는 웨이브파마에 단발머리를 하고 영화에서 등장한다. 영화 <콜레트>에 나오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콜레트는 <파리의 클로딘>으로 유명한 문학가다. 여성의 이름으로 작품이 발표를 하기 어렵던 시절, 콜레트는 뒤에서 유령작가로 활동한다. 하지만 독보적인 여성작가로 성장하며 여성작가 최초로 사회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기도 하다.
이외 여성 유명인, 엠마칼벨, 사라, 수잔, 루이즈 미셸, 그리고 딜릴리
이 외에도 딜릴리와 오렐의 최고의 조력자였던, 엠마 칼베 역시 당대 화려한 기교를 자랑했던 소프라노 였다.사라 베르나르는 가장 인기있던 연극배우였고, 세탁선에서 등장했던 수잔 발라동 여성 역시 활동하기 어려운 당시 최초로 국립 예술원회원이 된 화가였다. 프랑스 제 5혁명의 교육자이자 혁명가였던 루이즈 미셸도 잠시 등장했던거 같다.
사랑을 조각했던 예술가, 로댕의 뮤즈, 카미유클로델
그리고 로댕과 함께 등장했던 카미유 끌로델. 단테의 신곡을 배경으로 한 지옥문을 로댕이 작업할 당시, 만났던 끌로델은 영원한 로댕의 뮤즈이자, 제자였고, 그의 모델이기도 했다. 실제로 두사람의 사랑은 서로의 작품에 많은 영감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로댕의 활기넘치는 관능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에, 그녀는 그녀만의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성향을 더했다. 작품을 통해 그녀는 사랑의 열정과 뜨거운 인상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카미유는 로댕의 예술작업에 큰 영향을 주어 오랜 전통인 누드화를 인체조각으로 표현한 이미지 발현을 함과 동시에 파격적인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댕은 로즈라는 부인을 두고 있었고, 클로델과 결국 결별한다. 이 후, 로댕은 계속적으로 작품활동을 하며 명성을 쌓지만 끌로델은 정신질환을 얻게 된다. 그리고 30년을 넘게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인 말년을 보내며 생을 마감한다. 카미유는 로댕에 버금가는 천재적인 예술가였지만, 당시 여성예술가를 위한 어떤 학교도 존재하지 않던 파리의 사회에서 주류인 남성보다 비주류로서 취급받던 여성예술가이기도 했다. 19세기 파리는 이러한 불편함이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로댕과 카미유처럼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사랑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지금 나의 현실사랑을 그림으로 형상화 한다면, 앙리루소의 원시밀림 같다고나 할까. 나는 뱀을 부리는 마법사에 조금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하니 조금 서글프다.(웃음)
사회의 약자이자, 소수자, 이방인이었던 딜릴리
영화의 주인공인 딜릴리 역시, 혼혈아이면서, 아이였고, 여성이었다. 어쩌면 파리의 이방인으로 소수자이자, 사회적 약자였던, 딜릴리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오슬로 감독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타자였던 딜릴리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벨에포크 시대를 바라보고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냈기에. 더 큰 감동과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네 발로 기지말고, 두 발로 걸어."
굴뚝을 통해 세상으로 밖으로 나온 소녀들.
네발로 기어다니며 갇혀 있는 여자아이들이, 두발로 걸어 지하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곳이 '굴뚝'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공장 등의 산업시설에 있는 굴뚝은 그 자체로 영국의 산업혁명과 산업화를 상징하는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다. 벽돌 재질 굴뚝이 시커먼 매연을 내뿜으며 무질서하게 퍼져있는 모습은 산업혁명 시기를 대표하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산업혁명에 따라 기술혁신이 자본주의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생산수단을 지배하고 있는 공장소유주 등의 사람들이 빠르게 자본을 얻었다. 이에 점점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가 분화되어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오렐과 딜릴리가 어떤 빈민가에 들어서며, 사람들을 보고 "여기도 파리야." 하는 장면에서도 보여지듯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도시는 도시슬럼화, 도시빈민 등의 문제도 안게되었다. 또한, 이전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되었다. 여성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간단한 산수나 읽기 정도의 교육만 받았다. 젊은 여성들은 어떻게 남자에게 선택받는 여자가 되고 좋은 부인과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을 배웠다. 1870년대 이 후에는 대학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기술발전이 되면서 여성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 여러종류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권익이 점점 커지는 것을 반대하는 단단한 지하조직을 벗어나 갇혀 있던 소녀들이 굴뚝 밖으로 나와 세상을 만나는 장면의 설정도 눈여겨 볼만하다.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파리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는 이런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여성차별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생각할거리가 많은 작품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파리의 딜릴리>는 화려한 미장센을 자랑하면서도, 그 이면에 가려진 정말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이다. 벨에포크를 배경으로 한 영화, <미드나잇 파리>가 그 시대의 풍요와 화려함, 예술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파리의 딜릴리>는 그 아름다움 속에 존재하는 차별과 폭력에 대한 미셸 오슬로 감독이 가진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지 않았나 싶다. 그 주제의식이 보라빛 풍경아래 깔린 푸른 그림자의 색체의 아름다움으로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이런 어둡고 충격적인 사건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와 딜릴리의 용감한 활약으로 완화되는데. 그 마지막에 엠마칼베의 아름다운 소프라노곡 이 모든 사건에서 일어난 상처를 따뜻하게 끌어안는 듯했다.
코로나19시기의 예술, 앓음다움을 말하다
모쪼록 지속되는 코로나 사태로 어둡고 힘든 시대를 지나고 있는 오늘날, 마지막에 펠탑 아래에서 펼쳐지는 엠마칼베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아름다운 ‘예술’은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화려한 미장센 뒤에 가리었던 도시의 이면과 시대의 상처를 모두 끌어안고 울려 퍼지던 엠마칼베의 아름다운 노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어두운 하늘 아래, 더욱 짙게 빛나는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으로부터 탄생한다. 그래서 예술의 아름다움도 모든 시대와 사회와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닐까. 그 상처로 남겨진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끌어안는 것. 그렇게 부러지고 다친 곳을 치유해나가는 그 모든 과정을 역동하는 삶의 무대 위에서 향유해 나가는 것. 그래서 더욱이 예술은 어떤 부와 권력, 지성을 가진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으로 나아가 모두에게서 소통되고, 공감되고, 공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딜릴리와 함께한 이번 벨에포크 파리여행도, 춥고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일상가운데 아름답게 펼쳐진 작은 향연이 되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