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양
아뉴스 데이(Agnus Dei)는,
그리스도교 미술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은 예수그리스도를 그리스도교는 ‘어린 양’에 비유해왔다. 이에 아뉴스 데이는 ‘신의 어린 양’이라는 뜻으로, 미사에서는 주의 기도에 이어 부르는 통상문 중 최후의 노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아뉴스 데이>는 2차 세계 대전 중, 방치된 수녀들을 치료하고, 회복을 위해 힘쓴 프랑스인 의사 ‘마들렌 폴리악’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의사가 아닌, 여성으로 만난 참혹한 단상
1945년, 폴란드. 부상당한 자국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프랑스 적십자 소속으로 발령받은 마틸드. 병원에는 전쟁과 부상으로 실려 온 군인들로 넘쳐나고. 수녀원은 어둠 속에도 수녀들의 경건한 기도 소리만 조용히 흐른다. 그런데 이 경건한 수녀원의 정적을 깨는 소리.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기도에 매진하는 수녀들. 다만, 한 젊은 수녀만이 수녀원 밖을 나선다. 그리고 폴란드인도 소련인도 아닌 의사, ‘마틸드’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수녀를 따라, 수녀원에 온 마틸드는 참혹한 현실과 만난다. 바르샤바 지역에 침투한 소련군과 독일군은 신의 성역까지 침범했고, 연이어 수녀들을 강간한다. 이 후, 일곱 명의 수녀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그 날부터 마틸드는 비밀리에 수녀원을 오가며, 수녀들을 돌보는데.
철저한 ‘유물론’으로 ‘무신론자’이기도 했던 마틸드는 출산을 앞두고, 자책감에 시달리며 신앙의 제도와 율법에 따라 옷을 벗지도, 몸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긴급한 순간에도 기도를 올리는 수녀들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들을 치료하며 의사가 아닌 여성으로서. 전쟁의 사회적 약자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깊은 상처를 교감한다.
여기서 일어난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다른 수녀들 각각 다른 태도와 마틸다를 통해 달라지는 분위기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틸다와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였던 것은 원장 수녀는 이 모든 상황의 발자국을 새하얀 눈 속에 차갑게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자신도 같은 일을 겪고, 이로 인해 성병이 걸렸음에도 검은 옷과 두건 속에 이 모든 진실을 감추고 싶어 하며, 수녀원의 규율과 종교가 가진 율법을 더 엄격히 한다. 또한, 갓 태어난 아이를 추운 겨울 날, 숲 속에 버리는 일 까지도 감행한다. 아이를 잃은 수녀는 울부짖으며, 목숨을 스스로 끊기도 한다. 반면, 마틸다는 상황의 전면에 뛰어들어 그녀들을 치료한다. 또한, 부원장 수녀는 그런 마틸다를 도우며, 새로운 시선으로 그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형성되고 깊어져가는 ‘라포’와 상황을 극복하려는 그녀들의 ‘의지’를 통해 사건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봄을 맞는다. 더 이상 수녀원은 은폐되고 외부로부터 고립된 곳이 아니다. 축복받지 못하는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졌던 아이들은 수녀원 뜰을 뛰어다니고. 그들을 입양하려는 외부 손님들로 수녀원은 북적거린다. 그리고 보이는 풍경의 여백 속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공존한다. 이와 함께 영화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라도 우리의 의지만 있다면. 또한 그 의지가 미미할지라도 서로 연대하여 나간다면, 차가운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선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유신론을 믿는 나에게는 “진짜 신의 사랑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 그 누구도 인류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각자 다른 의지와 방법으로 그 인류애를 실현해 나갈 뿐이었다. 영화에서 원장 수녀는 신의 자비와 사랑을 구하며, 수녀원의 참상을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해, 율법과 제도를 엄격히 한다. 반면, 마틸다와 다른 수녀들은 수녀원과 병원의 규율의 벽을 넘는다. 또한, 어떤 수녀는 수녀원을 나와, 아이의 엄마로 용감하게 새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에 세상이 가진 제도와 율법이 때론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모든 제도와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은 화해와 용서와 사랑이 아닐까?”생각해본다. 또한 어떤 빛 한 줄기 없는 인생의 감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구름 위를 떠도는 신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통해 사랑을 실현해 가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영화와 관련지어, 생사가 엇갈리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그 체험수기로 썼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빅터 프랭클 박사의 부분의 글을 빌려와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ㅔ는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_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 중에서>
당신이 가진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자유는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