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샬롱 플뢰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두 손은 가지런히 모우고. 그 자태를 스케치하는 학생들의 정면에 앉아있던 여인. 여인의 맞은 편 벽면에는 바닥에 흐느러진 드레스 자락을 태우며,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 여인의 유화가 걸려있다.
그 정숙한 긴장감을 깨고, “저 그림은 무엇이죠?” 묻는 어린 학생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잊지 못하던 여인이 입을 뗀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치의 미동도 없던 그녀의 눈망울에 왠지 모를 슬픔이 여울져 흐르고. 세월을 거슬러 삐거덕 소리를 내며 거센 물결을 가로지르는 나룻배 하나만 떠있는 황량한 바다로 다시 이야기는 포커스인 된다.
물결에 떠내려가는 화판을 찾으려 용감하게 바다로 뛰어드는 마리안느. 자살을 한 언니를 대신 해 수녀원에서 끌려나와 가문을 위해 얼굴도 한 번 본적이 없는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
이 두 여인의 운명은 귀족의 결혼 관례에 따라, 신랑측에 보낼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외딴섬의 저택을 여류화가, 마리안느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딸이 모르게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노모의 부탁에 따라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산책친구가 되어, 절벽을 향해 질주하는 그녀를 붙잡고 함께 아픔을 공명하는데.
“왜 수녀가 되고 싶었나요?” 마리안느가 물음에.
수녀원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그리고 평등이 주는 평안과 안락...
더 말을 잊지 못하는 엘로이즈. 그녀는 수녀원을 떠나면서, 웃음을 잃고, 자유를 잃고, 빛을 잃었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사랑을 나누며, 잃어버린 삶을 회복시켜 나간다.
하루종일 집에 갇혀 성당만 오가며 성당음악만 듣던 그녀를 위해 낡은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아 마리안느는 클래식 음악_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들려준다. 또한 늦은 밤 함께 동네 여인들의 축제에 음악을 들으며 자유로운 분위기에 젖어들기도 하고, 하녀 소피와 한자리에 모여 앉아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고 결정적 결말을 두고 엇갈린 의견을 공유하기도 한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음유시인으로 리라 연주로 만물을 감동시키는 예술가다. 아내인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지하세계로 내려가 저승의 신인 하데스에게 리라 연주로 감동을 준 후 에우리다케를 살려달라 애원한다. 하데스는 그의 리라 연주에 감동해 "좋다, 다만 두 사람이 모두 지상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뒤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불안한 나머지 본인이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뒤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에 끌려가는 슬픈 이야기. (출처: 그리스로마신화 만화)
“That’s no reason. He was told not to do that!” 아내를 잃을까봐 겁났다는 건 이유가 안 된다 소피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을 한다. 한편,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독특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 “He chooses the memory of her. That’s why he turns. He doesn’t make the lover’s choice, but the poet’s. 마리안느 는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했다. 그래서 뒤돌아봤다. 연인이 아닌 시인을 선택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노래에 대한 염려 속에서, 법을 망각한 초조함과 무모함 속에서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것, 바로 이것이 영감이다”_블랑쇼, 문학공간
에우리디케가 마지막 인사를 하였고, 오르페우스의 귀에 닿는 순간 지옥으로 다시 떨어졌다라는 대목을 읽고 잠시 생각에 잠긴 엘로이즈는 “perhaps she was the one who said, turn around”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라고 답한다. 마리안느는 금기를 깬 오르페우스를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한 반면, 엘로이즈는 나아가 에우리디케 역시 ‘예술가, 시인의 선택’을 했다고 상상한 것이다
모든 신분과 제약을 뛰어넘어,
그들은 평등했고 사랑했다.
마치 지하세계의 어둠을 뚫고 지상의 문턱,
결정적 결말을 향해 걸어가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그렇게 초상화가 완성이 되고,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의 추억으로 봉인되어 이탈리아로 간다. 그리고 어두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마리안느를 향해 엘로이즈는 힘껏 외친다.
“Turn Around.뒤돌아봐요”
내가 사라진다할지라도,
거품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버려도.
타오르는 순간,
불이 지나간 자리에 사랑은 남아
추억이라는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제발 뒤돌아봐요.
이렇게 간절히 외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리안느가 뒤돌아보는 순간, 박제된 기억으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두 사람의 사랑은 봉인된다. 28P에 새긴 은밀한 기록과 함께.
그렇게 세월이 흘러,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고 그 곳에서 엘로이즈를 만난다. 수줍은 듯 그녀의 옷자락 뒤편에 숨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28 페이지만 언 듯 펼쳐진 책을 들고. 보다 강인한 눈빛과 자태로 앉은 새로운 그녀의 초상화.
그러나 그 꼿꼿함도 잠시. 홀로 연주회장을 찾은 엘로이즈가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 프레스토(Presto)의 격정적인 연주에 따라 눌러왔던 감정이 휘몰아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강렬한 여운으로 남는 영화.
문득,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지하세계의 문턱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해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처럼
타오르는 불이 지나간 자리에 추억만이 남는다해도,
모든 걸 태워 한 사람의 가슴에
영원한 Poet 시인으로 남겨지는
용감한 사랑을 해보고 싶어진다.
그 사랑의 끝에
새까맣게 타버린 재만 남겨진다해도
타오르는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사랑은
언제나 꽃으로, 바람으로, 시로 기억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