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바르다, 영화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영화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는 1962년에서 77년에 이르기까지 15년에 걸쳐 두 여성의 우정이 68혁명 이후, 여성운동의 발전과 맞물리며 묘사된다. 수잔과 폴린은 낙태, 피임, 사랑, 임신, 가족제도의 억압 등과 같은 경험을 거치며 연대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여성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하다.
프랑스에 등장한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는 1950년대 후반,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의 권위에 도전했던 젊은 이들은 누벨바그를 주도했다. 이에 기성세대의 관습적인 영화를 비판하던 젊은 평론가들은 서른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영화를 찍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영화 제작방식을 비판하며, 강요된 도덕관념을 거부하고 형식의 자유분방함을 추구 했다. 이들을 대표하는 누벨바그의 감독으로는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뤼크 고다르 등의 사이에 아녜스 바르다가 있었다. 아녜스 바르다는 '누벨바그의 어머니'라 불리는 유일한 여성감독이었다.
그녀는 영화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로(1962)로 국제적인 이름을 얻었는데 이 영화는 암선고를 받은 클레오 라는 가수가 5시에서 7시까지 파리 주위를 배회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달랜다는 이야기를 바르다만의 화법과 표현을 통해 90분 동안 아주 농밀한 흥분을 안겨주는 시간을 만들어내 찬사를 받았다.
이 후, 72년부터 바르다는 여성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여성의 대답>이라는 8mm영화를 비롯한 한 편의 장편영화만을 찍었다. 그 영화가 바로,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이다. 이 영화는 누벨바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느슨하고 사실적인 구성 안에 부조리함에 대한 그녀의 실존주의적인 감각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바르다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하다. 바르다는 여성과 결혼, 임신중절과 피임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이 영화에서 당돌하고, 비전통적이며 혁신적인 인물로 폴린과 슬프지만 강인한 수잔을 등장시켜, 두 여성이 연대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따뜻하게 그려냈다.
영화에서 폴린은 뽀글머리에 보라색 톤을 자주입고, 시위 현장에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등 수잔에 비해 투쟁적이고 자유로운 인물로 표현된다. 폴린을 모습을 보면서, 투톤 칼라의 숏헤어를 하고, 보라색 톤온톤 칼라로 옷을 매치하여 즐겨 입는 등, 오스카상 수상 당시, 안젤리나 졸리와 손을 잡고 재즈음악에 흥겹게 춤을 추는 아녜스 바르다의 모습이 함께 연상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폴린은 보비니 재판의 시위 현장에서 "내 몸은 내것이야. 낳고 싶은지 아닌지는 내가 선택해."라는 노랫말로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며, 화제가 되었는데. 영화의 메세지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사람들도 많았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화자가 되는 이 작품은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배우 손수현이 "1976년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의 목소리는 오늘까지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유효했다."고 언급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땐 프랑스의 피임과 낙태관련법을 빼놓을 수 없는데, 폴린이 처음 시위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는 '보비니 재판'은 이 영화의 가장 커다란 사건임과 동시에 10여년 간 서로의 소식을 모른채 살았던 수잔과 폴린을 이어주는 사건이된다. 보비니 재판 혹은 보비니 소송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5세 소녀 끌레르가 불법 낙태 시술을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 사건이다.2019년 공론화 되어,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21년 올 해에 와서야 개정안 만료로 국회에서 통과가 된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영화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때가 1976년이니 왠지 씁쓸한 마음이든다
출산을 하는 여성과 미혼모들을 위한 충분한 사회적 지원과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고, 성교육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 없이 낙태죄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처음에는 들었다. 또한,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두고 말하는 것이 다소 무겁고 예민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대체 대안이나 개정안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적으로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것에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걱정도 많은 입장이다. 하지만 이 복합적이고 무거운 주제가 다소 예민할지라도 사회적인 공익과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 공론화되어 나오고, 공공의 합일에 의해 최선의 방향을 함께 찾아나가야 하는 문제임에 있어 이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늦게라도 거론되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라고 본다.
하지만 영화,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에서 바르다는 낙태와 피임을 두고 다투어논하기 보다, 이 역사적인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마난 두 여성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연대해 나가는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조금 더 눈여겨 볼 수 있다. 그래서 무겁고 예민한 이 주제를 가지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 좋았던 영화다.
영화는 제롬의 갤러리 안에 있는 사진작품들을 비추면서 시작하는데, 천천히 카메라가 비추는 피사체는 모두 여성이다. 무심결에 들어간 사진관에서 폴린은 그 사진들을 보고 말한다. "슬퍼 보여요. 버림받은 여자 같아요. 과부나 미혼모."사진에 담긴 여자들의 표정은 아이와 함께 있는 여성도, 생명을 품고 있는 여성도 모두 어둡고 슬퍼 보였다. 이 사진을 찍은 제롬은 그런 모습을 보고, "여성의 그런 모습들은 가장 진실된 모습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영화의 시작점인 제롬의 사진갤러리에서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방향을 느낄 수 있다.
유부남인 제롬은 이혼을 기다리고, 수잔과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제롬이 찍은 여자들의 사진은 잘 팔리지 않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되는데. 폴린의 도움으로 제롬과의 사이에서 생긴 세번째 아니를 낙태하게 된 수잔은 제롬이 죽고 난 이 후,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내려가면서 잠시 폴린과 이별하게 된다. 제롬이 죽기 전, 폴린의 사진을 찍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는 그가 여성들의 얼굴과 누드를 찍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추구하는 건 벌거벗은 진실이야. 여자는 그 안에 비밀을 품고 있어." 또한 그는 사진 속 폴린의 얼굴과 누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갈등과 우아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강하지만, 슬퍼보이는 수잔과는 달리 폴린은 당당하고 강렬한 눈빛을 하고, 뻣뻣한 포즈를 취해 보였다. 나는 이 장면이 제롬이라는 남성 캐릭터를 통해, 남성이 보는 여성,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상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피그말리온과 같은 남성이 만든 여성들의 편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잔과 폴린이 재회한 후에도 그들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여성으로 부딪치는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을 나누며 성장한다. 영화는 사실적으로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 임신과 피임 등을 통해 처해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폴린과 수잔은 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편지로 소통하며 의지하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데. 동시대의 여성들을 돕고, 희망을 전하는 일을 한다. 폴린은 노래를 부르고, 수잔은 사회복지사로서 여성들의 피임을 도우며 말이다.
영화의 제목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서와 같이 폴린과 수잔은 성격, 취향, 사회 배경과 삶의 경험이 다르다. 정상적으로 졸업장을 따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정상적이 되느니, 차라리 거리에 나가 노래를 할 거예요." 외치고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가는 폴린. 그녀는 망설이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폴린은 전국을 다니며 노래하고, 노래하고, 계속 노래한다. 그러다 한 이란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살기위해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수잔은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며 꿋꿋이 아이들을 혼자 키워낸다. 그녀는 인생이 장밋빛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물가에서 수잔은 폴린을 바라보며 행복함을 느낀다.
서로를 바라보는 폴린과 수잔의 표정과 이를 둘러싼 배경은 언제그랬냐는 듯 다사다난했던 지난 시간을 위로하며, 더 없이 평화롭고 따뜻하기만 하다. 무거운 과제를 남기고, 목가적인 풍경아래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엔딩이 다소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으나 이 마지막 장면은 그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함께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밝은 미래와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노래하고, 노래하지 않고,
그들은 다르지만,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더 정확히 여성을 향한 여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허락하고 상대의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은 용기와 힘을 주고, 너머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폴린과 수잔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간다. 이는 삶이 무수한 사건과 선택으로 꾸려지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너무도 다른 두여성의 삶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와 생각들을 곱씹게 만든다. 어쩌면 누벨바그라는 영화의 새로운 역사 아래, 여성감독으로 아녜스 바르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시회운동이자 연대도 이 영화 였지 않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