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찜 하나에도 행복한 사람인데
아침 7시, 평소 같았으면 통근버스를 타고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불편한 잠을 취하고 있을 시간에 침대에서 눈을 떴다. 느긋하게 바게트를 토스터기에 넣고, 냉장고에 있던 버터를 꺼내 발라 먹었다. 역시 버터는 듬뿍 발라 줘야 맛있다. 애초에 버터를 건강하려고 먹는 건 아니니까. 냉장고에 있는 천혜향도 까서 후식으로 먹고, 대충 책상정리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우리 회사의 복지리스트에는 분명 자율출퇴근제가 있건만, 통근버스를 타야지만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에 살다 보니 나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유명무실한 복지였다. 오히려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퇴근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내 근무시간만 늘리는 제도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오전에 집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나는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기회를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냉큼 기회를 잡고, 당당하게 오후출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까지 너무 MZ 같았나 싶기도 하지만, 진정한 MZ는 자신이 MZ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미래의 나에게 나머지 근무시간을 맡기고(저번달 초과근무가 20시간이었으니, 별달리 노력하지 않아도 미래의 내가 근무시간은 채워줄 것이다), 오전근무만 마친 채 오후에는 자유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날이 영 흐리더니, 오전 근무 하는 내내 창 밖으로 미친 듯이 휘날리는 나무가 보였다. 마트에서 장을 보겠다는 계획을 폐지하고 집에 있는 라면과 만두로 대충 점심을 때울까 한참 고민을 하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정성스러운 밥을 해 먹을 수 있을까 싶어 귀찮음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에 엄마가 나가기 전에 냉동실에 있는 차돌박이 하나를 꺼내 주며 오늘 점심엔 이걸 먹으라고 했었다. 엄마는 아마 차돌박이를 구워 먹으라는 의미였을 것 같지만, 나는 샤브샤브와 밀푀유나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드디어 배추찜(이라 부르고 사실 숙주찜에 가까웠던 것)을 해 먹어 보기로 했다.
비바람을 뚫고 마트에 도착해 팽이버섯과 느타리버섯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샤브샤브의 꽃 숙주도 담고, 배추를 담기 위해 야채코너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찾고 있던 알배추는 발견하지 못하고, 4000원짜리 쌈배추냐 4500원짜리 통배추냐 하는 선택권에 놓이게 되었다. '통배추를 사서 어느 세월에 다 먹지 쌈배추를 사자, 아니 그래도 500원 차이면 당연히 통배추를 사는 게 개이득 아닌가?' 그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나는 야채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길고 긴 고민 끝에 '그래 배추는 다 먹어 치우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통배추를 집으려 하였으나, 한 손으로 통배추를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쌈배추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래 숙주 한 봉지를 샀으니 배추는 조금만 넣자.
배추찜(이라 부르지만 사실 숙주찜)을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물 조금에 연두 두 스푼을 넣고, 먹기 좋게 자른 야채와 고기를 넣고 끓이면 된다. 처음엔 연두만 넣었다가, 먹어보니 조금 심심한 듯싶어 국간장도 추가했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역시 MSG도 정성이 들어가야 맛있다.
뭐 여튼 이렇게 만든 배추찜을 유자샤브샤브 소스에 찍어 먹는 순간 나는 배추찜을 해 먹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시간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고기육수와 연두의 매콤한 감칠맛이 베인 적당히 잘 익은 숙주와 배추는 너무나도 맛있었다.
겨우 몇 가지 재료를 때려 넣고 만든 배추찜을 식탁에서 냄비채로 먹고 있었는데도, 이 순간이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별로 들어간 건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요리하고, 그 누구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오직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싶은 만큼 천천히 먹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평생 이런 삶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정말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는 게 매일 고급 호텔에서 먹는 식사가 아니라 집에서 혼자 먹는 배추찜이라니.
평생 소원이 누룽지도 아니고 뭐 이리 소박하담
이런 작은 행복조차도 스스로 찾아 나서지 못하고, 기회가 주어져야지만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서글퍼졌다. 매일매일 출근하는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역시 행복이란 상대적인 거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