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면 없는 대로

쓰는 나 사용기

by 허허로이

'사무실 환경개선 사업' 안내를 받았다. 주말을 앞두고 퇴근 전까지 집기 정리를 당부하는 메시지다. 하필 일이 밀린 시기에 저걸 언제 다 싶어서 막막하다가, 다 내가 쌓아온 것들이니 내 책임이지. 그래도 역시 좋은 기회이다. 오랫동안 밀쳐 둔, 있었는지 조차 모를 것들을 '폐기 구역'에만 옮기면 남이 버려준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옮기'면 남이 '버려'준다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하지만, 역시 버리기는 사기보다 어려운 과제임이 확실하다.


폐기 구역에 옮겨두는 것 자체가 버리는 것이나, 집 책장 정리를 하며 종량제 봉투를 채울 때와는 기분이 다르다. 묘하게 죄책감이 덜 한데. '환경개선'이라는 타이틀이 한몫을 하나. 집에서도 저 어휘를 쓰면 나도 다른 기분으로 주변 생활을 정리할 수 있을까? 바닥 물걸레질, 말고 '바닥 위생 개선, ' 거실 유리창 닦이, 말고 '생활 인프라 정비.' 또는, 글쓰기 말고, '생각 아카이빙'?


뭔가 근사한 일정처럼, 다이어리에 써두면 눈에 확 뜨일 듯하다. 영어 탓일 텐데, 쓰기 의욕을 북돋고 지속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요 정도 허세는 눈감아 줘야지. 아마도 여태까지 나는 생활 속 글쓰기의 '의의'를, 내 수준에 맞지 않게, 매우 높여 둔 듯싶다. 일상의 일부로 만들기 단계를 훌쩍 건너뛰고, 무작정 각 잡고 앉아 '폼'나게 사색하며 쓰기에 도전했다. 이제는 나의 쓰기에도 '폐기 구역'을 만들어봐야겠다. 이런저런 허세를 버리고, 나중에 필요할지 모를 것들은 책장 맨 아랫 칸으로 옮겨두자. '생각 담기'만 남기고 의도 없이, 색깔 없이, 쓰기를 해보자. 쓸 거리를 쥐어 짜내느라 지치는 일을 없애 보자. 없으면 없는 대로도, 쓸 거리 없다고 써 보자. 그렇게 또 한 줄을 쓸 수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쓰기, 폰트 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