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론다에서
식탁 위에 커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분은 그 위를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도시 이름 사이사이, 내 눈에는 띄지 않던 작은 표시들.
"여기, 그리고 여기도. 이 P가 파라도르예요."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스페인을 여러 번 다녀온 보드 멤버 한 분을 찾아갔다. 사립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는 분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여행 책자들과 예전에 다녔던 일정들을 정리해 둔 바인더, 그리고 큰 지도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요즘처럼 모든 예약을 휴대폰으로 하고, 이메일로 컨펌만 받아두면 그저 거기 가서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여행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분들은 여전히 책을 넘기고 지도를 펼쳐 보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풍경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파라도르는 스페인 정부가 운영하는 숙박 시설로, 성이나 수도원, 궁전이나 옛 요새 같은 건물들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라고 했다.
"대부분 위치가 정말 좋아요. 그리고 꼭 아미고 신청을 먼저 하세요."
그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검색을 해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은 아니라서, 그날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나쳤을 이름이었다. 공식 홈페이지를 뒤져 우리 동선에 맞는 곳을 찾다, 론다의 파라도르를 예약했다.
론다에 도착했을 때, 파라도르는 푸엔테 누에보 바로 옆 절벽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시가지의 상점들을 지나, 다리 앞에서 딱 멈춘 느낌이었다. 파라도르 직원들의 따뜻함과 친절함은 체크인 과정에서부터 느껴졌다.
테라스에 서서보니 다리 아래로 협곡이 깊게 내려다보였다.
다리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파라도르는 옛 시청과 시장 부지를 개조해 만든 건물이라고 했다.
방은 넉넉했고 편안했다.
여행지의 호텔 같은 숙소라기보다는, 하루를 정리하기 좋은 집 같은 공간이었다.
짐을 풀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를 걸었다.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엔 이미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런 고생은 다행히, 협곡의 파노라마뷰가 있는 테라스가 있는 식당에서 최고의 스페인 요리를 먹게 되면서 모두의 만족으로 끝났다.
론다의 협곡 경치는 "와, 예쁘다"로 표현하기보다, 자꾸 다시 보게 되는 풍경을 가진 곳이었다.
석양이 질 때쯤엔, 숙소로 돌아와 파라도르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한잔 마셨다.
하루 동안 본 장면들이 그제야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서두를 필요도, 더 채울 필요도 없었다.
방에서 2만보로 지친 다리를 위로하며, 스페인산 와인을 마시고
밤이 더 늦어지기 전에 우리 일행은 파자마 차림에 재킷만 걸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낮에 건넜던 푸엔테 누에보의 야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불이 켜진 다리는 낮보다 차분했고, 협곡은 어둠 속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낮에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찔한 어둠이었다.
사람도 많지 않았고, 소리도 거의 없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기억에 남았던 도시, 론다.
스페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파라도르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협곡을 따라 걸으며,
오랜 스페인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