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벨베데레, 클림트 <키스> 앞에서
비엔나에서의 3박 4일을 계획하면서도, 사실 일정을 촘촘히 짜두지는 않았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를 보고, 골든홀에서 콘서트를 듣는 것. 비엔나는 음악적인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시간은 공연을 즐기기에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둘러보면 되겠다고 여겼다.
뮤지엄 콰르티어에 가서 몇 군데 미술관을 보고,
쇤브룬 궁전과 벨베데레 궁전을 구경하고,
그리고 자허토르테는 꼭 먹어보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벨베데레 궁전은 비엔나 둘째 날, 히스토리 뮤지엄을 오전에 본 뒤 오후에 방문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매표소로 향했다가, 우리는 바로 현실을 마주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
차례가 오기까지 몇 시간을 서성여야 할 것처럼 보였다.
남편도 나도 평소엔 이렇게 무작정 오는 사람들이 아닌데, 그동안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에서 미리 예약이 필요 없었던 탓에 비엔나가 '대도시'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줄에 서 있고, 남편은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오프닝 시간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다음 날 아침 표를 끊은 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입장 시간대가 정해져 있음에도 단체 투어와 개인 방문객들이 섞여 입구는 분주했다.
줄에 서 있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클림트의 <키스>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입장하자마자 그 방으로 가야겠다고.
문이 열리고 우리는 곧장 안내 직원에게 작품 위치를 물었다.
그리고 바로 그 방으로 향했다. 지나가며 보는 작품들이 발목을 잡는 와중에도 말이다.
아직 단체 투어가 그 방에 도달하기 전이어서, 방 안에는 우리를 포함해 몇 사람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교과서에서 보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아니 같았지만, 이런 느낌이 들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감정.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을까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
그 작품을 바로 눈앞에서, 방해받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몇 분이 허용되었음에 대한 황홀함.
몇 분이 흘렀을까.
뒤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고, 방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조용히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 후에야 비로소 궁전을 천천히 둘러볼 시간을 가졌다.
화려한 연회장, 원근법을 활용해 하늘이 열리는 듯한 착시를 주는 천장화, 그리고 클림트의 다른 작품들.
그리고 에곤 쉴레와 다른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도 많이 전시가 되어 있었다.
사전지식 없이 간 벨베데레에서 알게 된 건, 그곳이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점.
상궁전의 마블홀 발코니가 특히 인상 깊었다. 왜냐면 그곳에서 1955년,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영세 중립을 선언하는 국가조약이 발표되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기 때문.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 상태에 있던 오스트리아가 주권을 회복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당시 외무장관이 그 발코니에서 "오스트리아는 자유다!"를 외쳤다고 한다.
그냥 아름다운 발코니에 아름다운 정원을 내려다보는 그런 장소라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를 알고 보니 예술적 화려함보다 역사적 무게감이 더 다가왔다.
투어나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전시 공간 곳곳에 영문 설명이 잘 되어 있어 건물의 역사와 작품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점도 인상적이었다. 다시 한번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벨베데레 궁전을 거의 다 둘러보고 나서, 나는 남편에게 슬쩍 물었다.
"우리, 클림트 키스 방에 다시 한번 가볼래요?"
사실은 조금 다른 마음도 있었다.
입장하자마자 그 방으로 직행하자고 했던 나의 결정이 얼마나 잘한 선택이었는지, 은근히 확인받고 싶은 마음. 평소 내 급한 성격을 탐탁지 않아 하는 그에게, 때로는 그런 성향 덕분에 가능한 경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그 방으로 향했고, 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침 9시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게 되었다.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한 사람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여러 언어의 설명,
단체 투어 가이드들의 오디오가 겹쳐 만들어내는 웅성거림.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작품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여러 각도에서 찬찬히 바라보는 호강 따위는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그 순간 남편이랑 눈이 마주쳤다.
"거봐. 내 말 듣길 잘했지! 얼른 빨리 벗어나자."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을 것 같다.
아침의 그 고요한 몇 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작품 앞에 서서, 빛의 결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두 인물의 얼굴과 손발 끝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었던 그 경험.
그건 단순히 '일찍 들어간 것' 이상의 행운이었다.
전날 허탕을 치지 않았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였다.
어쩌면 여행이란,
이렇게 작은 선택 하나가 하루의 기억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빡빡하게 계획된 일정을 따르는 것도 좋지만
실수와 우연 속에 발견되는 값진 경험도 맞아들일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벨베데레에서의 클림트의 여운이 남아,
다음 날 비엔나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클림트 관련 상품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상점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기념품은 물론이고, 화집과 포스터, 작품 해설서까지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미술에 문외한이던 남편과 내가,
무려 한 시간을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그 공간을 구경하며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뮤지엄 숍과는 또 다른 밀도의 공간.
기념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비엔나의 한복판에서 그런 전문 상점에 한 번쯤 들러보길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