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2] 가치관 차이

친애하는 아주 잠시동안의 연인에게

by quietrebel

나는 맷집이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 상처를 묵묵히 견디기보다는,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날카롭게 되받아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약한 방어기제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순간, 나는 기어이 '급발진'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악담을 하냐"며 당황해하던 당신의 그 얼빠진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역설적이게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답니다.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더군요. 들뜬 설렘 뒤편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기시감과 불안감. 앞으로 펼쳐질 뻔한 삼류 드라마의 결말을 알면서도, 나는 애써 눈을 감았습니다. 유튜브 속 '망한 연애'의 클리셰가 내 현실이 될 리 없다고 믿고 싶었거든요. 행복해야 할 순간에 찾아오는 우울감은 온몸이 보내는 경고였는데, 나는 그 신호를 무시했습니다.


당신은 끝까지 비겁했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내 눈이 삐었었다"거나 "넌 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해주지 그랬나요. 그랬다면 나도 알았을 텐데. 전화기 너머로 뱉은 사유는 거창하게도 '가치관의 차이'였습니다. 재미가 없다, 시간이 아깝다, 네가 변하지 않으면 모르겠다... 그 장황한 혀 놀림 끝에 도달한 결론이 고작 당신의 그 빌어먹을 '가치관'이라니요.


잠깐이었지만 내가 목격한 당신의 가치관은 온통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껍질을 까보면 남는 건 부모의 부동산, 주식 수익률, 허황된 사업 계획, 그리고 게임 머니뿐이지 않았습니까. 수컷이 되어 내세울 것이라고는 운 좋게 얻어걸린 숫자들뿐이라는 게 얼마나 애처로운지. 그 따위 천박함을 '가치관'이라는 단어로 위장하는 당신의 뻔뻔함과 낮은 수준에, 나는 비소를 터트릴 뿐입니다.


하지만 나라고 속물근성이 없었겠습니까. 온 신경이 "이건 아니야"라고 비명을 지를 때, 나의 속물근성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습니다.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며 대단한 사람인 척 거드름을 피우는 당신의 달콤한 허세에, 봄바람과 같은 설렘에 휩싸여 스스로를 기만했습니다. 당신이 뒤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수지 타산을 맞춰 보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무슨 올림픽 슬로건 마냥 "더 빨리, 더 많이!" 마음을 다했던 내가 너무 싫군요. 약간의 순수함과 세속적 욕망의 콜라보레이션. 그것은 그간 지켜온 나만의 소신을 등지고 "이 정도 남자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어설픈 타협으로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누군가는 똥차 가고 벤츠 온다며, 액땜 삼아 '길 가다 똥 밟은 셈' 치라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나는 정정하고 싶습니다. 똥을 밟으면 신발 밑창을 빠는 데 힘이 들고, 그 냄새는 지독하게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나는 그냥, '달리던 차창에 새똥을 맞은 것'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재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내 차의 와이퍼는 튼튼하고 워셔액은 가득 차 있습니다. 그저 레버 한 번 올리고, '쓱' 닦아내면 그만입니다.

새똥 같은 당신은, 이제 내 인생에 흔적조차 없습니다.


영원토록 그 하찮은 숫자를 세어보길 바라며.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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