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그늘 (1)

1996년 어느 봄날, 우리 집에 병이 찾아왔다

by 조용한 생존자

시간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6살 때의 일이다.


1995년 가을, 셋째가 태어났다. 둘만 있었던 우리 집에 아들이 태어나자 가족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주 기뻐하셨다.

나는 갓난아기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너무 신기하고 귀여워서, 동생을 보며 어린이집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엄마, 아빠는 그런 나와 동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셨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 해의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해가 바뀌고 나는 7살, 여동생은 5살, 그리고 남동생은 생후 6개월이 됐던 어느 봄날, 남동생이 갑자기 열이 심하게 나고 아프기 시작했다. 흔히 그 월령의 아기가 열이 나면 단순 감기나 잠깐 앓고 지나가는 증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처음에는 동생을 작은 동네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고 감기약을 받아왔다.

"으앙! 으앙!"

하지만 약을 아무리 먹어도 동생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다시 방문한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아주 선명히 기억나는 한 가지 장면이 있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말에 엄마는 남동생을 둘러업고,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급하게 대학병원으로 갔다. 의사선생님과 심각하게 면담을 하고 나온 엄마는, 엉엉 우시면서 병원 밖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 아빠한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하던 엄마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떡해... 우리 아기가 암 이래..."


듣기만 해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지만, 그때는 그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몰랐다. 내가 느낀 건 '동생이 많이 아프구나.'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생은 생후 6개월 만에 소아암, 그중에서도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겐 큰 변화가 생겼다. 엄마는 남동생과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병원에서 먹고 자며 간병생활을 시작했고, 아빠는 경제적 부담감이 더 커진 탓에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나와 여동생은 하루아침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나와 여동생은 당분간 작은 아빠들과 고모들 댁을 전전하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가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미 우리 말고도 어린 자식이 두 명씩 있었던 작은 엄마들과 고모들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예기치 않게 네 명의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친척 어른들이 잘 돌봐주셨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눈치가 보였다. 나와 동생을 혼내지 않더라도, 사촌동생들이 혼날 때나 친척 어른들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 괜히 주눅이 들고 실수 하나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특히 막내고모는 당시 3~4살 된 연년생 남매를 키우고 계셨다. 평소에는 살갑고 좋은 분이셨지만, 어쩔 수 없이 지치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방울토마토를 먹고 누워있다가 바닥에 토를 했다.


"아휴 내가 진짜 못살아! 먹고 바로 누우면 어떡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힘들어야 되냐!"


고모가 버럭 화를 내셨다. 날이 갈수록 고모의 짜증과 한숨이 늘어갔다. 그럴수록 나는 더 쪼그라들고 동생이 말썽을 부릴까 늘 노심초사했다.


어느 날, 아빠는 나와 여동생을 불렀다.

"갈 데가 있어. 거기서 한동안 지내야 되니까 옷이랑 짐들 좀 챙기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게 아빠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나는 진도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 방 한가운데에 누워있었고, 고모부, 작은 아빠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울면서 마루로 뛰쳐나갔다.


"으앙, 엄마~! 엄마랑 같이 살 거야!!"


고모부와 작은 아빠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피우거나 먼산만 바라보셨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을 때, 할머니가 웃으며 '맛동산' 한 봉지를 내미셨다. 그때 할머니의 마음이 어떠셨을지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지만, 과자 한 봉지가 내 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진도 할아버지 댁은 양철지붕에 문에는 문풍지가 발라져 있고, 부엌에는 아궁이가 있고, 마당 한구석에는 지게와 장독대들이 있고, 백구와 소가 있는 짚더미 옆에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고 밤에는 요강을 쓰는 전형적인 70~80년대 시골집이었다. 엄마와 헤어져 지내는 것도 서러웠지만, 당장 용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였다. '끼익' 소리가 나게 녹슨 문을 열고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공간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뚫려 있던 구덩이 하나, 그 안에 언제부터 쌓여있었는지 모르는, 한가득 쌓인 배설물과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 귀가 따가울 정도로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수많은 날파리들, 그리고 구석구석 쳐져 있는 거미줄들.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 특히 시골의 밤은 불빛 하나 없이 암흑처럼 깜깜해서 화장실 가기 무서워 요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놀거리도 또래친구들도 없는, 슈퍼마켓도 20분을 걸어야 나오는 그곳에서 살 생각을 하니 막막함 그 자체였다. 5살 여동생은 징징거리고 나는 또 나름대로 언니 역할을 해야 하고... 태어나서 처음 맞닥뜨린 큰 고난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 시간이 가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지고 그곳에서만의 재미를 찾아갔다. 할아버지 댁 앞쪽에는 산이, 뒤쪽에는 바다가 있었다. 할아버지 댁에서 5분만 걸어가면 바로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동생 손을 꼬옥 잡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며 대파 농사를 짓는 할머니를 따라가거나 뻘에 있는 방게를 잡으러 다녔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던 시골반찬도 점차 입맛에 잘 맞아갔다. 하루는 TV 코미디 프로에서 신랑신부의 첫날밤에 마을 사람들이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훔쳐보는 장면을 보고는 '저거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동생과 문풍지에 구멍을 여기저기 뚫고 구멍 사이를 들여다보며 장난을 쳤다. 그걸 본 할머니는 깜짝 놀라셨지만 혼내시기는커녕,

"허허, 이 녀석들, TV에 나온다고 다 따라 하는구먼."

하며 귀엽다는 듯 웃어넘기셨다. 동네 할머니들이랑 농사일 중간중간 새참도 먹고 마을잔치에 놀러 갔던 기억, 꼬막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었던 기억, 키우던 개를 잡아먹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심심할 때는 동생이랑 둘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 '바보, 똥개'라고 놀리거나 종이접기를 하고 놀았다. 둘이 손을 맞잡고 동네를 거닐 때면 마을 할머니들은 우리를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셨다.

"지도 어린 게 동생을 저렇게 챙기고... 어른이 다 됐구먼. 딱해라 쯧쯧."

비록 불편한 게 많은 시골 중에서도 깡시골이었지만, 마음만큼은 그나마 편안했다.


그렇게 진도에서 몇 달을 지내다가 새롭게 이사한 군포 집에서 아빠와 나 여동생 이렇게 세 식구가 지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와 동생은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갔다가 5시쯤 집에 오고, 아빠가 8시 이후에 집에 올 때까지 단둘이 집에서 기다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 가고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맨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가곤 했다. 아니면 집에서 영어로 된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거나 그때 한참 인기였던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남동생과 엄마가 있는 병원에 처음 가본 건 그 무렵이었다. 병원에서 본 남동생과 엄마는 몇 달 전까지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모습이었다. 머리를 빡빡 밀고, 병원복을 입고, 주삿바늘을 여기저기 꽂은 채 배 한쪽엔 인공항문을 달고 있었던, 작고 빼빼 마른 몸으로 누워있던 남동생의 모습. 주사 하나만 맞아도 무섭고 아픈데 그 많은 항암제와 주사를 맞으며 버티고 있는, 고작 돌이 갓 지난 동생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 옆에 앉아있던 엄마는 화장기 없이 피곤에 쩔은 듯한 얼굴에 눈에 띄게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예전의 엄마 모습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남동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면 좋으련만..."


동생의 병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병이라는 걸 그때 어른들끼리 하는 대화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웃음이 많았던 엄마는,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매일 지켜보며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날 이후, 엄마는 더 이상 예전의 엄마가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