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묻는 이름

불리지 않아도 남아 있는 이름

by 낮은목소리

이름을 말하고, 또 말해야 했던 순간들이 있다.

"Can you say that again?"

"Sorry—how do you spell that?"

"Wait, like… dung?"


그 질문과 웃음, 다시 묻는 얼굴 앞에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을 삼키는 쪽을 택했다.


내 한국 이름에는 ‘동’이라는 음절이 들어간다.

한국에선 흔한 이름이다.

그 소리 안에는 특별한 의미는 없었지만

친구들도, 선생님도, 가족도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불러주던,

‘내가 나일 수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영어권에선 달랐다.

‘동’이라는 소리는 ‘덩’처럼 들렸고,

그건 아이들 사이에서 너무 빨리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처음 내 이름을 듣고 킥킥 웃었고,

다음엔 일부러 반복해서 불렀다.

"Your name is poop!"

"That’s hilarious!"

그 웃음 속엔 가벼움보다 무시가 묻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이름을

되도록 짧게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 쪽으로 옮겨갔다.

카페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나는 스스로 Jay라고 말했다.

질문도, 실수도, 당혹스러운 웃음도 없는

안전한 선택이었다.


Jay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다.

누가 대신 정해준 것도 아니고,

가족이 건네준 것도 아니었다.

그건 내가 지치고 피곤해서 스스로 마련한 방어막이었다.


내 이름을 다시 말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왜 사람들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그 질문은 내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그냥 불편하지 않은 이름 하나 있으면 되지’ 하고

자조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민자는 서류 속에서 이름을 살아간다.


내 이름은 항상 서류 맨 위에 있다.

운전면허증, 여권, 학교 성적표, 병원 접수증,

은행 계좌 개설서, 세금 신고서, 시민권 카드...

그 모든 종이마다 이름은 빠짐없이 존재했다.

그 이름이 빠지면,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되었다.

서류는 이름을 정확히 요구했다.

띄어쓰기, 철자, 순서 모두 틀리지 않도록.


나는 수없이 이름을 적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이름은 늘 문서 속에만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점점 사라졌다.

정확한 발음을 기대하지 않았고,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대신, 다시 묻는 표정을 보기 전에

스스로 "Just call me Jay"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서류 속 이름은 늘 공식적이고 완전하지만,

그 이름이 소리로 불릴 때만 진짜 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소리로 불릴 일은 점점 줄어들었고,

나는 이름을 ‘기입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름은 더 이상 ‘호명’이 아니라

‘증명’이 되었다.


때때로 누군가 내 진짜 이름을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불러주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몸이 순간 멈춘다.

숨을 고르게 되고,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

그 사람은 단지 내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려고 애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은 드물다.

그래서 더욱 깊이 남는다.


나는 지금도 Jay라고 불린다.

이제는 익숙해졌고,

때론 편하기도 하다.

병원 예약, 서류 작성, 업무 메일,

모든 것이 Jay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다.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가끔은 그게 내 진짜 이름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던 거 아닐까.”

지금의 나였다면,

누가 웃더라도 그냥 넘어갔을 거다.

발음이 틀렸다고 해도

"그렇게 안 불러요"라고 말했을 거고,

"이름 예쁘다"는 말에

"그렇죠, 저도 좋아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거다.

지금의 나는

그 정도의 자신감과 거리두기를 배웠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다.

너무 여리고,


이곳이 낯설었고,

너무 눈치를 봤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자꾸 스스로를 맞추려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감추는 편을 택했다.

Jay라고 하면 웃음도, 다시 묻는 일도,

어색한 침묵도 없었으니까.

그 선택은 이해할 수 있고,

그 시절의 나를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선택이

너무 오래 지속됐다는 사실은

가끔 마음 한쪽을 아리게 한다.


가끔씩 자신의 한국 이름을 영어로 직역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Jay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처음엔 그냥 편의였다.

습관이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이름이 없으면 내가 조금 비어 보이기도 했다.

서류를 쓸 때 외엔 그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는다.


나는 마음속 어딘가에 접어두었던 이름을

조금씩 펴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말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도 길다.

그건 회복의 시간이고,

나를 다시 내 쪽으로 되돌리는 연습이다.


이름을 두 번 말하는 일.

그건 단지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 존중, 거리, 그리고 당시 내가 나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는지의 문제였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다.

이해받고 싶어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서,

나를 조금 감추는 게 더 쉬워 보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이름 하나를 이렇게 오래 품고 돌아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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