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한국

익숙한 말과 낯선 기억 사이에서

by 낮은목소리

한국에 대해 묻는 말을 들으면 잠깐 생각하게 된다.
“고향이 한국이라 좋겠다.”
“요즘 한국은 어떤지 알아?”
“한국 드라마 보면 감정이입 잘 되겠네.”
나는 그때마다 한 박자 쉬고,
그냥 이렇게 대답한다.
"잘은 몰라요."

나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그 이후로는 줄곧 캐나다에 있었다.
기억으로는 또렷할 것 같은 나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억들이 선명하지 않다.
어떤 건 흐릿하고,
어떤 건 아예 희미하게 조각만 남아 있다.
무언가를 억지로 잊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아니라 ‘기록’처럼 느껴졌다.

내 머릿속의 한국은 단편적인 장면들로 남아 있다.
좁고 가파른 골목길,
학교 앞 문방구의 유리 진열장,
어느 날 교실 뒤 창가에서 보았던 겨울 하늘.
이런 장면들은 떠오르지만,
그 속에 있었던 감정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캐나다에 정착한 뒤, 부모님은 집에서만큼은 한국어를 쓰게 하셨다.
영어를 섞으면 바로 고쳐주시고,
밥상머리에서도 항상 한국말로 이야기하게 하셨다.
그 덕분에 한국어는 잊지 않았다.
말하는 것도, 읽고 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고어가 섞인 책을 즐겨 읽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조건》 같은 무거운 글도 잘 읽는다.
생각을 정리할 때도 여전히 한국어로 생각하고, 문장을 쓴다.
하지만 ‘언어를 안다’는 것과 ‘문화에 속해 있다’는 건
서로 다른 이야기였다.

TV를 보면 자막을 켜게 된다.
말은 들리는데, 표현 방식이 낯설다.
요즘 말투는 내가 배운 한국어와 다르고,
때로는 단어의 뜻을 검색해봐야 할 때도 있다.
예능의 유머는 이해가 되지만,
같이 웃는 데엔 망설임이 생긴다.
그 감정의 간격이 나를 멀어지게 만든다.

군대 이야기 역시 그렇다.
나는 한국 군대 문화에 대해 잘 모른다.
계급, PX, 짬, 전역날 같은 개념은 익숙하지 않다.
다른 남성들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그 기억과 리듬은
나에겐 스쳐 지나간 뉴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세계에 속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 대화에서는 그냥 조용히 듣는 쪽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순간들이 쌓일수록,
나는 나 스스로에게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나는 한국어를 잘하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어떤 영역에선 확실히 ‘외부인’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캐나다인인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 나는 서 있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무겁고 단단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굉장히 유동적이고 모호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질문은 늘 복잡하다.
나는 정답이 아닌 상태로 오래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기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내게 “한국에 있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뭐예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 멈춰야 한다.
그 기억들이 너무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감정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 느낌과 비슷하다.
장면은 있지만, 숨결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기억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냥 흐릿해졌을 뿐이다.
그건 잘못이 아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단지 시간이 지나며,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남았을 뿐이다.

요즘은 그 모호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잘 몰라요”라고 말하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나는 지금도 한국어로 글을 쓰고 있고,
그 언어로 사유하고 있다.
내 삶의 중요한 질문들도,
어떤 슬픔도,
기쁨도,
결국 한국어 문장 안에서 정리되어 왔다.

그렇다면 그 언어는 나다.
그리고 그 언어가 계속 이어지는 한,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내 기억 속 한국은 희미하지만,
그 말의 리듬과 감정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는 그 한국을 가끔 그리워하고,
가끔은 낯설게 느낀다.
그 두 감정이 같이 있다는 건,
아마도 내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디서도 완전히 떠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한국에서 왔지만, 모든 걸 기억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건 괜찮아요.”

그 말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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