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notitl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퀼티 Dec 31. 2016

행주산성에서, 걷다가.

소회 같은 것

행주산성을 걸었다. 높지 않은 토산이었다. 볼품은 없었지만 한강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좋았다. 정말 하릴없이 주변을 걸었다. 사람도 없었다. 코에 찬 바람을 가득 머금었다. 정신이 좀 든다.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그래서인지 눈이 떠졌다. 며칠전 출근을 하면서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무엇을 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참 곤란했다. 소재는 많았지만 그것들을 차분히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좀 많이 부끄럽다.


한 해를 돌아보고 촌평을 하자면, 나는 뭐든 직면하는 것이 두려우니 농담으로 한 해를 채웠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웃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그런 농담들로. 뭐 진짜 말은 없고 농담만 하다보니 언어가 무너졌고, 그로인해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진중하게 나아가는 이보다 어느 면에서든 앞서지 못하였다. 커다란 낫을 가지고 슥슥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양 옆을 바라보니 그들은 저만치 앞서서 영화배우처럼 담배 한 대 맛있게 물고 쉬고 있었다. 세상사가 참으로 공평도 하다 싶었다.


이쯤 읽었으면 눈치챘겠지만 나는 사실 올해에 대해 별달리 쓸 말이 없다. 크고작은 사건들과 재밌고 비참한 일들도 많았지만, 그것들을 차분히 들여보고 평가를 내려 자기화시킬 시간들이 내게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뭐라도 생각이란걸 하게 되어 감사하는 마음 반, 성가신 마음 반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단어는 '유보'가 아니었나 한다. 올 해는 일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대해서도 나는 대체로 유보하였다. 원래 본성이 그래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고 달리 입장을 정하는 것에 확신이 들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내 선택에 온전히 책임을 지는게 죽기보다 싫기도 했지만, 흔들리는 나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정도는 취한 와중에 들었던 것 같다. 취한다는 표현을 보니 술도 많이 마셨던 한 해였던 것 같다.


행주 산성 오르는 길이 추워서 술이 좀 깨니 건강한 생각들을 많이 했다. 가령 방금전 보리 굴비를 먹었는데 저녁이 되기 전 다른 메뉴로 밥을 한 번 더 먹고 싶다는 생각같은. 근데 정말로 멋있고 쿨해보이려 쓰는 말이 아니라(그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요즘 저 생각 이외의 모든 생각들은 다 쓰레기 같다. 옛날에 <존재와 무>를 봤던 것도 같은데(확실치도 않지만) 그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저자가 딱해보인다. 인간이란 목적이 없이 존재하니까, 그 자체로도 충만한 존재, 모든 삶의 의미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창조자.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은데(오독일지도) 말 그대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게서 나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예전의 나보다는 조금 있다 콩비지감자탕을 먹을 생각만 하는 지금의 내가 더 좋다. 이유야어쨌든 그게 더 내 진실된 모습을 발견하기 쉬우니까. 근데 자꾸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허울이나 멍에가 뒤집어씌워지는 것 같아 좀 무섭고 답답하다고 어디가서 성토하고 싶고. 실로 그러한 기분이 드는 한 해였다.

*이 단락 다 쓰고나니 굳이 샤르트르 이야기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근데 난 플라톤보다 샤르트르가 더 내게 많은 숙제를 안겨준다고 생각해왔었다. 플라톤은 덕성이라고 함축할 단어라도 있지. 샤르트르는 주체성이라는 이유로 내게 뭔가 쓸모가 있기를 닦달하는 것 같다. 가령 플라톤이 넌 공부(덕성)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한다면, 샤르트르는 공부는 안해도 돼. 넌 그 자체로 충분해. 하지만 너가 몰입할 수 있는걸 잘 찾아보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식. 뉘앙스만 다른 것 같다. 뭐 거두절미하고 어쨌든 둘 다 숙제 내주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지만 어차피 나의 오독같은건 그다지 세상사에 중요한 건 아니니까.


토성을 내려오고 있자니 나를 떠나간 것들이 생각났다. 뭐 많다. 중요한 것들도 있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래도 떠나간 것들 중 내 인생에 점 하나 찍을 사람 정도야 있지만 그것은 글로 다루기에 부적절하다는 기분이 자꾸 든다.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글이 멈칫멈칫 쳇바퀴를 돈다. 아마도 방향이 없어서이리라.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는 일들은 주저앉거나 일단 가보거나 하는 택일의 문제지만 앉아서 엉엉 울어도 뭐가 시원한 구석이 없으므로. 따로 할 말이 없다. 정리를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조차 아무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이러한 상태이다보니 밥은 정말 맛나게 먹었다. 더 생각할 나위없이 녹차에 밥을 말아서 보리굴비를 올려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공기밥을 두 그릇 먹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러고도 배가 고파서 콩비지감자탕을 먹으러 갔다. 콩비지가 없어도 충분히 맛있게 푹 익은 고기가 식감이 좋았다. 하지만 콩비지 하나 넣었다고 특별해질 명분을 얻은 것 같았다. 어쩐지 부럽기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0000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