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notitl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퀼티 Jan 24. 2017

혜성을 보고 참담함을 떠올리는 날

어떤 어른이 된다는 것. 영화 <너의 이름은.>


1.

그 날. 그녀의 장난기 넘치는 눈매를 떠올리며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기분이 좋으면 달리고 싶어 진다. 여자 친구를 만나려는데 왜인지 가슴이 간지러워 몇 키로를 뛰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참을 달려 여자 친구 집 앞에서 그녀를 보니 너무 기뻐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뭐가 그렇게 특별했을까.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단 하나의 회의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어느 날엔 여자 친구가 떠나는 길에 보고 싶다고 했다. 아주 잠깐 허락된 시간이었다. 그 찰나를 위해 두 시간을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그 결심엔 단 하나의 때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까지 또 뛰었다. 이십 분 정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손 한 번 잡고 얼굴 한 번 보고 그랬다.


그때의 나는 생각이 맑았다. 반짝이는 구석이 있었다. 어떤 직관에 따라 움직여야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2.

영화를 보면서 상심이 컸다. 그때의 내가 보였다. 근데 보이긴 했는데 영화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짝이던 마음엔 생채기가 많이 나 있었다. 이제 찬란한 혜성을 보아도 저게 내 집 마당에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먼저 되었다. 그래도 집에 오는 길에 오랜만에 뛰어보았다. 상쾌하고 맑으니 좋았다. 지금까지 좋아서 뜀박질을 했던 건지, 뜀박질을 하니 좋았던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영화에서 타키와 미츠하도 달린다.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세계는 여러 개의 평행이 펼쳐있는 것처럼 서로 닿지 않는 세계이다. 세계가 교차하는 건 황혼 무렵뿐이다. 낮동안 서로를 찾기 위해 내내 달리다가 짧은 만남의 시간이 지나고 어두움이 찾아오면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둘은 내달리고 만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온몸을 간지럽히는 무언가 때문이다. 운명이라거나 인연으로 또는 무스비로도 불리는 이 심상찮은 동요는 소년과 소녀의 마음을 삼켜버린다.


그 떨림, 주체할 수 없음, 순결함은 무엇에 비추어도 무고하다. 내게도 그것이 깃든 적이 있었다. 나 역시 언젠가의 타키였고 미츠하였다. 꿈에서 깨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내달렸다. 그러나 너무 오래 달려 지친 나는 엉킨 실은 푸는 것보다 잘라내는 게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려서 이름을 알고 싶던 사람들은 짧은 황혼이 지나가자 사라져 버렸고 너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바라보던 혜성은 이곳저곳 갈라져 나의 세계를 파괴했다. 결국 그들의 이름은 별 무덤 속에 잊혀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영화와는 다르게 현실에선 이들의 이름은 잊혀졌는데 그들을 잃어버린 내 기억은 하나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영화 속 세계와 현실은 타키와 미츠하의 평행 세계만큼이나 동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제 종소리가 귀에 들려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는 달릴 수 없게 두 다리를 잃을지라도, 내가 지은 이름으로 별이며 꽃이며 피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원래 그 이름이 아니었을지라도, 온 영혼을 뒤흔드는 몸짓을 외면하고 이름만 불러 주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들로 내 역사의 주머니를 채워나가는 건 꽤 참담한 일이었다. 불쑥불쑥 기억도 안나는 누군가의 이름이 알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3.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예쁘고 좋은 것들에 초치는 사람. 내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도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초속 5센티>나 <별의 목소리> 등.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세계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낄 새도 없이 씁 하고 혀를 차게 만들었다. 아련함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씁쓸함. 영화로 하여금 세상에 없는 경이로운 별천지를 보여주고선 그 별천지로 하여금 불바다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영화의 중반부. 미츠하의 눈으로 혜성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감독의 그 고약한 악취미가 마침내 발휘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조된 위기를 지나 미츠하와 타키의 세계가 연결되고 에필로그로 접어들어 두 사람이 교차하게 되는 그 순간. 아주 불온한 균열감이 내 세계에 나타났다.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시공간을 넘어 어디까지 전달될 수 있을까. 실체가 사라진 존재에 대한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가. 내 직관이란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아 무수한 착각을 일으키는 착란일 뿐일까, 아니면 무스비로 연결된 거대한 세계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운명 같은 것일까. 신카이 마코토가 <별의 목소리>부터 천착해 온 질문들은 결국 상대의 존재가 거대한 공백이 되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결핍이 된 다음에야 답이 되곤 했다.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갈증, 그 해소할 수 없음이 그의 영화가 다루는 주된 테마였으며 언제나 주인공들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아가기에 쉼 없이 반짝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인처럼 새겨져 있는 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키가 미츠하의 손에 이름 대신 좋아한다고 적었던 것처럼.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 영화가 다루던 거대한 결핍이 거듭된 기적 속에 해소되었을 때. 그 마음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닿게 된 순간 나는 왜 마음이 시큼하였는가. 딸랑. 울리는 종소리가 왜 불길하게 느껴졌는가. 그것은 내가 너무 많은 이름을 은하계 속에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어서 달려버리고마는 반짝거림의 상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내 반짝임은 먼지가 너무 많이 덮여 색이 바래버린 것이다. 벅차게 뛰어 그녀의 손을 잡으러 갔던 내 기억들은 아주 찬란했지만 동시에 그 찬란함이 불시착하진 않을까 하는 불안이 마음 한편에 이미 강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었던 나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났다. 지금의 내게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다소 평면적이고 유치하며, 디테일하게 살펴보면 감독이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시각이 여러모로 크리피하여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나고 집까지 한 번 힘껏 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중한 사람,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


속절없이 오그라드는 이 대사가 내게 어떤 짐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가 기억하고 싶은 이름은 미츠하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눈매에 나의 모든 이유를 허락했던 그때 나의 이름이다. 그때의 나를 기억해주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있다면. 하고 기적을 바라보지만 어떤 어른인 지금의 나는 이렇게 영화에 대한 심심한 리뷰로 그 누군가를 찾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 운동장에서 혜성을 바라보며,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단어는 우리 곁에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매거진의 이전글 강박에 시달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