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글을 쓴다
그 여자 미소를 보니까 운명이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어. 정말 그랬어. 그렇게 말하자 친구가 웃었다. 나도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 흉보고 다니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스스로도 질리는 일이었다. 두세 마디더 보탤 것도 없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어. 이렇게말하고는 말았다. 실제로 할 말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 마음이 어떠했고 그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정말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어서, 그 날이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만 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신기루였던 것은 그 날이나 그녀가 아니라 내 마음뿐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주 허름한 식당이었다. 불륜 영화인지 프랑스 영화인지 홍상수 영화인지모를 영화 뒤의 술자리였다. 제각각 자기 이야기만 했다. 영화속 여배우가 감독과 불륜이 났다면서요? 역시 어릴 때 다 놀아 봐야. 아직도 설까요? 그 배우 너무 아름답더라. 영화는좋았지만 역시 영화 외적인 것들이. 감독이(여배우가) 안타깝네요. 말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 속에서도 그녀는 표정을 푸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영화의 주인공과 닮았다.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선이 자꾸 갔다. 그녀는 아마도 철저히 이방인이리라. 입꼬리에 걸린 곤란함들이 그녀가 생기 없이 웃을 때마다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미소(인지뭔지)를 보고 있자니 나의 황폐한 처지가 그녀로부터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정복하고 향락하고 싶은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인들이 있다. 그러나 이여자는 그 시선 아래서 천천히 죽어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후에 보들레르의 시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다. 나는 어디에다 그녀와 닮은 여배우가 꼭 이렇다고 적어두었지만, 사실은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너무나 좋아서 그냥 여배우를 빌린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시끄러운 말소리에 이끌리다 보니 같이 술집까지 걸어왔던 어떤 여자가 어떻게 거짓을 진실처럼 숨길지 방법을 내게 물어왔다(물론 그 뜻을 숨기기 위해 그녀는 거짓에 거짓을 덧대는 말을 한참 했다). 평소라면 아무 말이나 하고 마치 근사한 대화라도 한 것 마냥 두 세잔 부딪히면 좋을 이야기였는데,
"때로 진실이 거짓처럼 보이기도, 거짓이 진실처럼 둔갑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중요한 건 그 속성이 아니라······"
뒤에 더 붙일 말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지 고민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미 자격이 있지 않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그녀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것을 느끼니 더 말할 도리가 없었다. 많이 부끄러웠다. 치열하게 위선을 떠는 것만으로 면죄부 같은 거 누구도 발급해주지 않는데. 그거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나는 또다시 죄를 짓고, 그녀는 한 사람 만큼의 외로움을 더 짊어지게 되고. 나는 그만큼 그녀 입가에 걸릴 곤란함에 헛된 구원이나 기대 같은 걸 품으며 쓸쓸해 하고. 아. 나의 알량한 품이라는 게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어떤 여자는 뒷말을 자꾸 채근해왔다. 나는 완전히 질렸다.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했다. 그러다가 내가 내 말이 시끄러워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여자는 대단한 말이라도 들은 양 나를 칭찬하였다. 내가 죄를 사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술자리가 끝나고 지겹게도 공허감에 몸서리칠 거면서 내가 하는 말 같은 게 진짜 이 사람한테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신경 꺼두기로 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미 나에게서 거둬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슬퍼 진이 빠졌다. 나는 정말 시시하고 초라하였다. 진짜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말이 나를 그리로 인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실이 너무 짜증이 나 씨발저발 하면서 화라도 내고 싶은 심경이었다. 아. 그래야겠다. 술 한 모금 입에 털고 토해내듯 말했다. 근데요. 사실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하잖아요. 말 꾸미고 글 그럴듯하게 쓰고, 예쁜 단어들이나 품격 있는 어투 조미료처럼 치는 거 다 들키게 마련이잖아요. 솔직하게 살아야죠 우리. 어차피 언어 같은 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마음들, 욕망들, 아무것도 단 하나도 전달 못해요. 그렇게 만족하고 사는 거 다 가짜고 다 비겁하고 다······ 아 제가 진짜 스스로가 답답해서 하는 소리예요. 예지 씨, 아니 미주 씨였나? 어쨌든. 우리 진짜로 삽시다. 진짜! 진짜 것들만 하고 삽시다. 용서받을 짓만 하고 살아요.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정말로. 진심이에요.
속이 다 시원해서 잔도 안 부딪치고 한 잔 더 했다. 어떤 여자는 그럴듯하게 나를 칭찬하고, 자기는 쏙 빼놓고 그래야죠라며 남의 일인 양 넉살을 떨어댔다.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와 이죽대다가 그대로 한숨 한번 내쉬고 시시한 대화나 했다. 영화 얘기, 감독 얘기, 자기들 연애 얘기. 가끔 내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시들어가다가 때로 서로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벽에 붙어있던 선풍기가 떨어져 나는 머리를 부딪혔다. 정신이 없어서 술잔인지 선풍기인지 몰랐는데 금세 머리가 아프고 주변이 소란스러워 정신이 들었다. 나는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사람들 걱정을 무마시키기 바빴다.
사람들 틈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저분 다치셨어. 어떡해.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고 창피함을 감추려 지나치게 많이 웃었다. 관자놀이가 지끈했는데 아파서 그런 건지 웃느라 그런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다행인 것은 다들 술에 취해 이런 일쯤은 사람들 머리 위로 쉽게 휙휙 지나간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지끈하게 웃어대 이제 됐다 할 때쯤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좀놀랐다. 그녀가 물수건을 건넸다. 대고 있으면 좀 나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많이 다치신 거 아니에요? 아뇨, 그보다 창피해서. 그러자그녀가 미소 짓는데 나는 하나도 웃음이 안 났다. 눈이 마주쳐서였다. 내가 꾸며내서 괜찮은 척 입가를 들썩여 봐야 내 것이 아닌 거 다 알 것 같았다. 그녀는그런 눈을 가졌다. 진정 내 표정 같은 건 아무런 의미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마음이 정말 이상해져서그 정체를 알아내느라 부질없는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잠시 내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는 사라져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홀로 왔고. 가끔 영화를 보러 오고. 가끔 술자리도 오고. 안 오기도 하고. 말들이 그녀가 떠난 뒷자리에 한참을 공허히 맴돌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든 무엇으로든 채워야 했다. 남들 현혹될 소리만 한참 하고. 술을 끝없이 마시고. 광대처럼 웃겨주고. 나도 좀 웃고. 여전히 지끈대는 관자놀이. 예전 생각. 여자 생각. 그녀 생각. 내 생각.
어스름한 새벽. 버스를 타러 종로로 걷는 길에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욕을 해댔다. 실제로 했다. 그런데 진짜 하나도 안 시원했다. 욕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했다. 나는 그날 밤 나에 대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시간이 좀 지나 꿈을 꿨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사람과 마주치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동네의 작은 코인 세탁소에서 우리는 빨래를 빠는지 서로의 얼룩을 빨아내는지 모를 대화를 했다. 관념적인 건 하나도 없었다. 비가 오니까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했다. 밥을 짓고 빨래를 개고 그런 이야기. 목소리가 상냥해서 꿈에서도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빨래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시간과 장소만 정했다. 가고 싶었는데 가고 싶어만 하다가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펼쳐져 결국 못 갔다. 아쉬워하고. 꿈에서 깼다. 속상했다.
고등학교 때 시였는지 소설이었는지를 써서 상을 받고 교지에 실릴 말을 고르다가, '미소에서 펼쳐지는 우주를 그려내다 길을 잃었다'고 적었다. 꿈에서 깨 그 말이 먼저 생각났다. 그녀의 미소에서 우주는 아니고 달 정도는 본 것 같았는데,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달의 뒤편이었다. 그런데. 공전하는 세계는 마주치는 법이 없이 끝나버렸다. 나는 완전히 지구도 달도 아닌 곳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이제 잠을 자야지. 혹시 모를 일이다. 세계가 돌다 보면 마주치는 단 하루가 있을지도. 꿈에서라도. 그때에는. 정말 그때에는 눈을 마주 보고 진실한 이야기를 나눠야지. 아니. 말이 없어도 좋다. 이런 엉터리 같은 글을 쓰는 일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