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이었다. 창문을 보다가 마티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애의 표정에 냉기가 돋아났다. 퉁명스럽게 이유를 물어왔다. 아이스티의 얼음을 세 번 정도 휘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이 아름다워서라고 답했다. 서릿발. 그애가 나의 손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품고 있던게 따로 있던 모양이다. 마치 앙드레 브루통같은 말을 했다.
"예술은 우리에게 뜨거운 불똥을 떨어뜨리고, 충격을 주고, 우리를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화나게 해야 해."
"나는 나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 때때로 내 속에서 좀 더 확실해지고 명료해지는 것이 떠오를 뿐이야."
"잘 생각해봐. 마티스는 아무 의미도 없는, 도전받아야 할 것들을 만족시키고 강화시키는 데만 공헌하지. 길들이는 자들에 대한 감사만이 그가 쌓아올린 첨탑이야.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피'로 상징되는 죄의 지적인 버전인 셈이야. 나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어."
우리의 이야기는 더 이어갈 여지가 없었다. 붓의 궤적, 색의 배열, 흔들림의 정도. 이것들은 그애에게는 부역자의 징표에 불과하였다. 어쩌면 내가 아껴하던 우리의 선문답도.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서는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진정 그애에게서 바랐던 것은 그애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위에 그리는 수신호였을 뿐일텐데. 눈을 감는다. 꿈을 꾼다.
어느날 일어나보니 눈과 귀가 멀고, 때마침 그애가 옆에 있어서, 그애가 그애인 이유를 찾다가, 음뿍 패인 그애의 보조개에 안도하고, 이곳에 운명만 담아넣겠노라고, 그렇게 그애의 손바닥에 기호를 영원히 새겼다. 이 세계에서 내가 그애를 애정하는 방식은 그것 뿐일 터.
어느새 아이스티의 얼음이 다 녹았다. 나는 그애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서는,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마음 속 갈증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Henri Matisse, Open window
*Matthew Kieran, Revealing Art, 2010
빵집에 줄이 너무 길었다. 외면하고 신호등을 건너 한참을 가다 다시 돌아왔다.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힘이 붙어 스스로도 놀랐다. 좋아하던 까놀레 몇 개랑 못 먹어봤을 것 같은 빵을 샀다. 아무래도 그 애의 얇은 입술이 아른거려서였다. 그곳에 미소가 피면 복사꽃인듯, 웃음인듯, 어쩌면 이야기인듯. 밝고 맑고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머나먼 나라로 떠나갈 사람의 자리인데도 좋은 것만 보고자하였다.
오래 만난 애인과 헤어지고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한 것이라고는 알량한 글 몇 개와 회환 몇 웅큼, 부끄러움 여럿. 그 정도 남았다. 방을 정리하다가, 끝도 시작도 아닌 글들을 보다가 꽤 많은 그 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학적 수사를 덧붙일 것도 없이 "눈치를 많이 보던 사람들은 알 수 있어요"라던 그 애의 말이 그 애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타자화시키면서 깊고 어두워지는 고독과 소외. 그것에 맞서는 강인함과 위태로움. 나는 그것을 좇아 덧없는 시간들을 유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을 넘어 그 아이에게 뛰어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오늘 회한과 부끄러움을 하나 더 남겼다. 이 소용없는 문장들도.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도저히 왔던 길로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문> 물론 나는 나의 본성이 다이스케가 될 수는 없는 법이요, 윤희중에 더 걸맞은 점을 인정한다. 어차피 오늘만 슬프다. 그러는 김에 한 단락만 더.
광야를 찾아 떠난 이의 등을 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이를 찾아 머나먼 이국으로 표류하다 일렁이는 바다에 모든 숨을 빼앗기고, 때로는 빼앗기도 하였다. 나는 다리를 사시나무처럼 떨다가도 떠나온 곳과 떠나갈 곳을 생각하며 마음에 추를 두어개 더 얹고 버티었다. 그것이 탈이 났는지 드디어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온몸이 소란스러웠다. 거대한 광장위에서 나는 바다 아래 두고 온 것들을 생각했다. 거대한 나찰과 복사꽃, 오이향 나는 핸드릭스, 무거운 안경. 나는 어디로 가고자하는가. 탕. 오발로 총성이 울리고 나는 광장에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쿵. 공포에 질려 다이빙 하듯 대리석에 머리를 쿵. 쿵.
이국으로 떠나는 그 애에게 일기장을 사주었다. 그곳에는 거짓된 문장이 없기를 바라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 세 통의 전화를 하였다. 모두 원하던 곳에서 걸려온 것은 아니었다. 괜히 골목 모서리를 걷다가 맥주 여러 캔을 사서 들어왔다. 어쩐지 머리가 찧은듯 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