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notitl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명인 Jul 01. 2017

글을 쓰다.

술래잡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Q. 글을 쓴다의 반대말은 뭘까?

A. 글을 안 쓴다겠지.

Q. 글을 안 쓴다는 건 뭔데?

A. 뭐긴 뭐야 그냥 안쓰는거지.

Q. 그럼 글을 쓴다는 건?

A. 글쎄... 그냥 쓰는거지.

Q. 이건 지금 왜 쓰는 거야?

A. 정말 모르겠다.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건지...

Q. 안 쓰면 안돼?

A. 쓰면의 ㅆ가 이제 눈웃음으로 보여...ㅋㅋㅋㅋ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래 바로 너, 글이란 녀석.

속에서 말캉거리는 무언가를 언어로 포착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잡았다 싶으면 놓친다. 잡았는지를 아는 방법도 분명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포착은 단어다. 

단어로 안잡히면 문장으로, 

문장으로 안잡히면 문단이다. 


그런데 잡으려는 것은 잡지 않으려는 것과 분명히 구분되는 하나의 무언가가 아니다. 아마도 아니다.

한 글,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는 그저 그 무언가를 부분 부분 잡아내 드러낼 뿐이다.

불순물이라 여겨지는 것을 최대한 걸러내고 걸러내면

무언가 그럴싸한 것이 나타난다.


한 번 읽어보고,

두 번 읽어보고,

조금 있다 읽어보고,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서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이걸 봐요! 이게 내가 느끼고 있고 말하고 싶은 거야!"


확신이라고도 말하기 부끄러운 확신이 글에서 조금씩 피어나면

단지 내 안의 말캉거림을 꺼냈다가 도로 나에게로 넣었을 뿐인데도

알수없는 흐뭇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글을 보고


"이 글이 분명 네 안에 있는 그 무엇이렸다!" 


라고 한다면,

금세 겁에 질려 글 곳곳에 숨어있는 여백으로 도망쳐버릴 것이다.


"그건 나이기도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를 이해해주세요! 하지만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글을 통해 나와 너가 만나지만

어쩐지 내가 언어에, 너에게 완전히 포착되어버릴 수 있다는 상상은 끔찍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여백을 남긴다. 

단어로 시작되는 흐뭇한 기분은 그 여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언어가 포착하려는 것은 정확히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

그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이 딱 적당하다.


가장 큰 여백은 침묵하는 것이다.

침묵은 모든 언어를 포괄한다.

무한한 나를 무한함으로 곧장 던진다.

이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래서 글을 쓴다.


EX)

카카오톡의 프로필 상태 메세지를 자주 바꾸는 것은

그 글이 사진만큼이나 나의 내면을 드러내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얼마 안되는 분량은 무한한 나를 드러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어차피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의도치 않게 발가벗겨지고 뒤섞일 것만 같아서

최대한 그럴싸하게 최대한 압축된 언어를 사용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허파에 공기가 가득 들어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너 그 상태명 무슨 뜻이야?"


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물어라도 봐주는 날이면...

그 기분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ㅋㅋㅋ

반면에 이것저것 끄적여도 영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 언어가 말캉거리는 무언가 언저리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충분치 않은 것이다.

 혹은 도망칠 여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 저것 적어보다가 다 지워버리면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이제 뒤에 숨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으면 궁금할 것도 없다.

침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쓴다.


너가 들어올 수 있도록 적절한 유혹과 너가 나를 붙잡을 때 도망칠 수 있는 적절한 여백...

우리는 술래잡기 중이다. 잡힐 듯 말듯 한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과 느낌!

조금 과격하게 말해볼까.

우린 모두 노출증 환자들이고 관음증 환자들이다.

이 세계는 나를 봐달라 외치는 절규의 각축장. 아니, 자위공간.

이런, 핵심을 찔렀다. 너무 심했나.

그런데 그럼 어때? 어차피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다.

존재 자체가 언제나 여백을 충분하게 해준다.

그러니 실패는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과정이 참 아름답다.


 글이 하도 안써지니 이제는 글에 대한 글도 쓴다.

그럴싸해 보이려다가 부족한 여백으로 인해 이번엔 좀 별로였어 라며 본질이 붙잡힐 바에야 

한 번쯤은 이런 식으로 글을 가지고 노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실험인 것 같다.

통찰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반복된 말이지만, 말캉한 무언가를

최대한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드러내려고 발버둥치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것은 때때로 자신 뿐이더라도.

그것을 통해 고독한 인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싶으니까.

물론 결국 언어로 드러나는 나는 언제나 나의 일부분.

그러나 절망뿐 아니라 위안을 함께 가져다준다.

그래서 이 재미있는 놀이를 멈출 수가 없다.

도무지 시시하지가 않다.


앞서 고통과 번민을 주고 증발해버린 글과 다르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지만

색칠공부와 여러가지 재미있는 요소 덕분인지 

피곤한 이 새벽,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글을 썼다.

즐거웠다.


다음에는 증발해버린 글을 제대로 다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괜찮은 거였는데!


그럼,

감동도 없는 이런 글이라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적 감상의 태도에 대하여 外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