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타로는 개를 봤다. 개는 해변을 거슬러 먹이를 찾아다녔다. 아주 검고 다부져 보였다. 신타로는 개의 무거운 표정을 따라지어 보았다.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개를 보다 보니 신타로는 민의 크고 맑은 눈이 떠올랐다. 슬슬 돌아가야지. 그는 며칠째 고성의 아무 해변 앞이었다. 날은 맑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포구 주위로 싸구려 음식점만 오래된 유물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엔 낯설어 좋았는데 영 운치가 없다. 떠나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쓰려던 글도 풀리지 않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민이 아직 화가 안 풀렸다는데 신경이 미쳤다. 어제 그가 잠들기 전에 전화했을 때, 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제 저녁. 홀로 떠나오기 전 신타로는 민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를 소홀히 생각해서 내뱉은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아니, 그가 한국어에 서툴러서 에둘러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어로 하는 자신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지금도 자기를 끔찍한 괴물로 생각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그녀가 성을 내며 묘사한 자신의 모습은 단 하나도 자신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잠자코 넘길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는 차에 오르기 전 몇 가지를 메모했다. 서툰 글씨로 그는 맥주, 돼지고기, 꽃이라고 적고서는 한참 메모장을 바라보았다. 철자는 맞았지만 모양이 별로였다. 하지만 그냥 두기로 신타로는 결정했다. 그는 싸구려 렌터카를 몰고 민이 있는 펜션으로 향했다.
2.
신타로가 돌아오자 민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꽤 쓸쓸했다. 민은 아직도 분이 안 풀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듯 크게 신타로의 냄새를 맡고서는 더욱 강하게 그를 껴안았다. 마치 온 힘을 다해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신타로도 두 손 가득 들린 짐을 대충 내려놓고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전화가 안돼서 걱정했어."
"어제는 받기 싫어서 안 받았어. 근데 보고 싶더라. 안 오는 줄 알고 걱정했어."
"민은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민이 정말 기쁘다는 표정으로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예의 그 해사한 얼굴. 하나하나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엔 고심을 한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무엇 하나 머물러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로지 생기만이 가득했다. 때로 신타로는 그런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낯설었다.
"일본에서 또 지진이 났대."
민은 신타로에게 가볍게 키스하고서는 침대 위로 돌아가 틀어놓은 뉴스를 가리켰다. 신타로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봉지 안에 든 과일이나 고기 같은 것들을 냉장고에 정리해 넣었다. 신타로의 덤덤한 반응을 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신타로는 적당히 물건들을 정리해두고서는 다시 차로 돌아가 아까 사둔 국화 몇 송이를 가져왔다. 어느새 채널은 음악 방송으로 돌려져 있었다.
"자."
신타로가 꽃을 건네자 민은 와아-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연신 너무 예쁘다며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민은 재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 조그만 화병에 물을 가득 채워 나왔다.
"예쁜 건 예쁜 곳에 있어야 돼."
그렇게 흥얼거리며 민은 가위로 꽃의 밑동을 잘라내 꽃병에 꽂았다. 뭐든 요령이 있는 사람이었다. 꽃병은 청나라 자기처럼 푸른색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확실히 싸구려였지만 국화를 얹어놓으니 나름 구색이 맞았다. 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신타로를 바라보며 꽃병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신타로는 민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배는 안고파?"
신타로가 다정하게 묻자 민은 침대 위에 누워서 신타로를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신타로가 그녀의 품으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민은 한쪽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갑자기 격렬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신타로가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신타로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는 또 금세, 아주 베테랑처럼, 부드럽게 그의 혀를 간지럼 태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떼고 살짝 눈을 떠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선 신타로의 고개를 떼내고 티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 앞에 신타로는 언제나 황망했다.
"어제 펜션 옆 동에 들어온 사람들이랑 친해졌어요. 저녁 같이 먹기로 약속했어요. 같이 가요."
신타로는 내키지 않았다. 민도 그가 다른 한국 사람과 어울리기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가끔 민이 자신의 의사를 강요할 때 쓰는 존댓말이 그 증거였다.
"민. 나는 그런 자리가 불편해."
신타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민은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나는 당신이 오늘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약속한 거예요. 다른 뜻은 없으니까 서운해말고. 정 불편하면 나 혼자 다녀올게."
그녀의 말소리 이면에는 단호함이 섞여있었다. 신타로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수도 있을 어떤 비릿한 냄새였다.
"일단 알겠어. 생각해볼게."
신타로는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장실로 향했다. 비릿한 냄새를 지우고 싶었다. 화장실로 도착한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에 쓰레기통에 처박힌 조화 한 무더기가 걸렸다. 싸구려 화병에 원래 담겨있던 것인 듯했다. 그 순간 신타로는 거짓말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민의 세계를 생각해보았다. 민의 세계는 비유하자면 놀이동산 같았다. 축제와 카니발이 끝을 예고하지 않고 펼쳐지는 곳. 파티가 끝난 후의 침묵을 끝없는 파티로 무마하는 위대한 별천지. 사실 신타로 같은 사람이 그곳에 있을 자리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연이은 춤으로 그녀가 지쳐있을 때, 마티니를 시켜주고 잠시 그녀의 숨을 고르게 해줄 황량한 낯섬에 가까울 다름.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신타로는 자신이 그녀의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음이 좋았다.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어쨌든 모든 것을 망각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결국 신타로는 오늘 저녁에 민이 바라는대로 다른 사람들과 불편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버려진 조화는 가엾었지만 이제는 지나간 것에 불과했다.
3.
7호실 사람들과 신타로들이 함께한 저녁은 특별할 건 없었다. 고기를 굽고 소주를 먹었다. 그리고 얼큰해져서 다른 공간으로 빠져들어가듯 묘한 대화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신타로가 한국에서 남들과의 술자리가 불편한 것은 바로 이 공간 때문이었다. 논리와 비논리의 구분이 없는 것이 정론이 되는 시간. 영민함을 죽이고 또 죽여야 목소리가 깨어나는 새벽의 난장. 아주 두꺼운 암흑에서 빛나는 건 민뿐이었다.
"어떤 말 같은 게 꽤 의미 없지 않아요?"
취기가 올라 조금 상기된 얼굴로 민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려앉는 순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말이란 게 짐승의 우는 소리랑 뭐가 다른지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사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너랑 더 있고 싶다, 너랑 자고 싶다, 너를 만지고 싶다 하는 것들이지. 사실 그거면 다잖아요. 근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대화가 재미있어서라니 너무 고루하고 이상해."
307호의 남자가 그의 연인이 어디가 좋으냐고 묻자 그가 대화가 즐겁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은 눈을 빛내며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확실히 민은 어떤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7호실의 남자는 변죽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왜 있잖아요. 말을 하기 위해 말을 하는 순간들. 근데 그런 순간마다 진짜 너무 진이 빠지고... 그러니까 나이 들수록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때로는 그냥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경향이 있죠."
스스로의 비논리를 뭉개고 7호실의 남자는 골똘히 상념에 빠져들었다. 겸연쩍은 얼굴로 소주잔을 비워냈다. 민은 그런 그가 웃기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신타로도 딱히 그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서는 민의 다리를 힐끔힐끔 보는 그의 시선이, 그가 말한 대로 7호실의 남자를 '말을 위한 말'을 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만들었다. 희극이었다. 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그의 말속의 은유는 나도 말 같은 거 집어치우고 민과 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7호실의 남자는 그를 쳐다보는 신타로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곧바로 신타로에게 물어왔다.
"신타로 상은 어떠세요? 말에 대해."
신타로 '상'이라고 부르는 그 얄팍함과 경솔함이 신타로는 싫었던 것이었다. 신타로는 그의 물음에 별로 평소에 어떤 생각이 없었지만 단순히 그가 싫었기 때문에 말을 지어냈다.
"만져보면 말보다 더 쉬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늘 만질 수는 없잖아요. 다들 각자고, 혼자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말로 만지는 거죠. 서로를. 말의 온도, 생김새, 향기가 상대에게서 그대로 전해져 온전한 그 사람의 형체를 그려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민이 빛나는 눈을 하고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로 신타로가 눈을 돌리자 민은 신타로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금 말 너무 멋있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지금 자기가 날 이렇게 만져주는 것 같았어."
민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자 7호실의 남자도 웃어왔다. 흔들. 7호실의 여자가 양쪽 팔을 감싸안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7호실의 여자는 지금까지 분위기에 편승하여 적당히 대화를 이어왔는데 이때만은 입가에 웃음기가 싹 말라보였다. 신타로는 어쩐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은 말이에요. 이런 말만 세상에 있으면 말이 의미 없다는 말 같은 게 세상에 나올 수가 없을 텐데..."
그녀의 어조에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 사람처럼 심각한 얼굴로 술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녀가 심상치않은 것을 감지한 건지, 아무 생각도 없는 건지 7호실의 남자가 여자의 말에 뒤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너무 다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거 아니에요?"
하고 남자는 넉살을 잔뜩 떨고선 다른 주제로 말을 옮겨갔다. 이번엔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두가 취기가 많이 올라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를 시간이 찾아왔다. 이 장면을 한걸음 떨어져 보고 있노라면 한편의 촌극이었다. 7호실의 남자는 아까의 반복처럼 말도 의미 없고, 죽음도 의미 없고, 삶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늘어놓았는데. 그의 말 역시 그가 말한 대로 과연 허상 같은 이야기였다. 신타로는 그가 대체 뭘 보고 살아가는 건지, 어디에 딛고 살아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모든 대화를 뭉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져버려도 민의 다리만이 그의 세계에 남아있을 수 있다면 그는 그런대로 만족할지도 모른다.
신타로는 민을 바라보았다. 민은 맑은 눈으로 마치 언제라도 웃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입가의 표정을 짓고(그녀는 사회적 지능이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 그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쨌든 꼬인 방식이지만 보다 진취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그의 태도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민 다운 호기심이었다. 한편 신타로에게는 7호실의 여자가 썩 신경쓰였다. 온갖 철학자의 이름을 대며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7호실 남자를 보며 그녀는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입가에는 단순한 질투심이라기보단 어떤 권태감이 걸려있었다. 그녀는 철저히 지루해 보였다.
"이미 태어나버린 이상 무얼 어떻게 하겠어요? 언제나 클리셰, 그저 클리셰지만. 지금의 술자리, 별, 밤공기 같은 것들을 안주로 시간을 잘 때워내야죠."
그러면서 건배 제안. 7호실의 남자는 점점 신이나 떠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하늘에 떠다니는 이야기가 아니라 땅에 붙은 그의 이야기들이 도떼기시장처럼 늘어졌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이래서 마트를 가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때 뒤에서 중년 남자 여럿이 있는 테이블에서 고함을 쳐왔다.
"거 너무 시끄럽네. 조용히 좀 마십시다!"
어떤 공기가 휘익하고 지나가고 7호실 남자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공간의 지배자가 이제는 7호실의 남자가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뭐가 그렇게 빠르게, 원통하게 지나가는 건지. 지지부진한 대화를 이기는 건 술뿐이게 되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의미가 없게 되었다.
"민, 이제 슬슬 일어날까?"
더 견디는게 고역이었던 신타로가 묻자 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소주잔을 비워냈다. 7호실의 남자도 흥이 가셨는지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타로는 먼저 양해를 구하고 민을 부축해 들어왔다. 민은 꽤 취한 듯 비틀거리며 신타로에게 기대었다. 신타로는 상냥한 손길로 졸리다는 민을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같이 눕자니 어쩐지 방 안의 공기와 바깥 술자리의 공기가 분간이 안되어 신타로는 무척 찝찝했다. 그는 간단히 차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물을 올렸다. 민은 물을 끓이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라고 힘차게 외치고서는 금방 잠이 든 듯 곤한 숨소리를 내었다. 침대로 다가가 보니 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자고 있었다.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 볼에 입을 맞추니 민은 잠결에 귀찮다는 듯 볼을 긁고서 등을 돌려 잠들었다. 신타로는 그녀를 베개에 똑바로 눕히고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7호실 여자였다.
"지갑을 두고 가셨어요. 여기."
민의 지갑이었다.
"아 고맙습니다."
신타로는 그녀에게서 지갑을 받아 들고선 잠시 해야 할 말을 잃었는데, 통상적으로 인사를 해야 할 타이밍이 놓쳐 좀 겸연쩍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짓고선 입을 열었다.
"민 씨는 좀 괜찮으세요? 그이가 술을 좋아해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사람들 먹이고... 두 분 좋은 시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민도 충분히 재미있어했으니까...."
신타로가 말을 흐리자 그녀가 장난기 있는 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신타로 씨는 재미없었죠?"
눈이 마주친 순간 더 숨길 요령이 없어져 신타로는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7호실 여자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나도 그 사람 너무 잘난 체하는 것 같아서 별로였어요. 좋은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해요. 아마 민 씨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걸 거예요. 아... 이런 말 하면 실례죠?"
물론 실례였지만 그녀가 가벼운 말투로 하니 특별할 게 없는 말이 되었다.
"네, 실례지만. 그래도 당신이 하는 거니 괜찮아요."
"네?"
당황한 말투였다. 아.
"제가 말이 서툰 데가 있어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재형 씨의 애인인 당신이 이야기하시는 거니까 그렇게 실례는 아니란 말이었어요."
"그러셨구나."
묘한 말의 공백이 둘 사이에 놓여버려 그대로 있기도 뭐하고 인사를 하기도 뭐해서 신타로는 차를 한 잔 권했다. 그러자 여자는 완곡히 거절하며, 아직 술자리를 미처 치우지 않아서 뒷정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는 너무 취해서 방에 돌아가버렸다고 하였다. 신타로는 그녀를 좀 도와주기로 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4.
7호실의 여자. 그러니까 미희씨는. 정리를 마친 후 신타로에게 해변을 좀 걷자고 말했다. 신타로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썰물이 빠져나간 해변가를 마주하고 걷기 시작했다. 신타로는 잠깐씩 그녀를 훔쳐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행선지가 드러나진 않았다. 그저 침묵만이. 그러다가도 미희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렇게 말을 꺼내붙이곤 했던 것이다.
"아까 말로 사람들이 닿을 수 있다는 말은 정말일까요?"
신타로는 골똘한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걷더니 미희에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말이 맞는 말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냥 저는..."
7호실의 남자가 입을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겸연쩍은 웃음으로 넘기는데 미희가 신타로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대로 웃어넘겼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무엇인가가.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니 아까 한 말은 정말 공연한 말들이었던 것 같았다. 말의 힘, 말의 존재, 말의...
"그래도 저는 좋은 말을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들, 재미있는 말들. 그런거요. 그런거 잘 하는 사람들 멋있잖아요. 신타로 씨처럼."
"하지만 재형 씨도..."
"그 사람은 사실 헛똑똑이에요. 이런 말 잘 모르시려나. 그냥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거에요. 그 사람이 눈치 하나는 빠르거든요."
그러면서 미소. 미희는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할까? 신타로는 헛똑똑이라는 단어는 잘 모르겠지만, 미희가 재형처럼 헛똑똑이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떤 말을 들을때 좋은 말이라고 느끼세요?"
신타로가 묻자 미희는 곰곰히 생각을 하고서는 대답했다.
"저는 좋은 말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시 읽어보거든요. 그러다보면 좋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그게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미희는 걸음을 잠시 멈춰섰다.
"아까 신타로 씨 말... 다 좋았어요. 정말 마음속에 따뜻한 게 계속계속 생겨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속에서요."
미희는 신타로는 올려다보며 자신의 가슴에 두 손을 올려쥐었다. 그리고는
"왠지 신타로 씨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라고 애닳듯 내뱉고 다시 걸음을 이어갔다. 신타로는 앞서가는 미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묵묵해졌다. 휙 하고 바람이 지나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소금 비린내. 개 짖는 소리. 철썩. 공연한 침묵이 지나간 자리. 남은 것들의 비릿한 냄새. 신타로는 미희에게 말을 걸었다. 저. 하는 소리에 미희가 뒤돌아섰다.
"제가 잘 모르지만... 그런게 정말 중요해요. 따뜻한게. 정말..! 정말이요. 예쁜 단어나 잘 정돈된 문장이나 누구의 이름같은 건... 아무리봐도 중요한 게 없어요... 다, 다 그냥. 그냥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거에요. 없는 거에요. 제 말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미희씨는 마음을 따라서 그대로 살아가면 돼요."
더듬거리며 신타로가 말을 끝내자 미희는 소매로 입가의 웃음을 가리며 정말 그럴까요? 라고 되물어왔다. 신타로는 미희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미희가 신타로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신타로는 미희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고서는 그대로 두었다.
어쩌다 돌연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이 여자의 손을 내 팔로 가져가게 두었을까? 그녀의 어리석음? 내가 그 어리석음을 꾀어 낸 것인가? 무엇으로? 말로? 말... 그럼 이제까지의 말들은 무엇이었지?
신타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걸어요."
나지막하게 미희가 말하고 신타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좀 더 이야기 해줘요."
무슨 이야기를? 그리 묻자 미희가 아무런 이야기라도 라며 길게 이어진 제방을 가르켰다. 달이 이름도 모를 구름에 슥 뒤덮였다. 두 사람은 등대 빛 하나 없는 해안가를 걸어갔다. 그곳을 걸으며 신타로는 공연한 소리를 해댔다. 왜 한국에 왔는지, 언제 다시 떠날 것인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미희는 웃기도, 안웃기도 하며 신타로의 팔에 자신의 무게를 조금 더 기댔다. 신타로는 떠드는데 정신을 쏟느라 미희가 기울어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모순적이게도 그 무게를 신타로가 알아챌 만한 사람이었다면, 미희같은 여자가 그 무게를 기대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제방의 끝까지 걸어간 두 사람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미희는 당연한듯이 신타로의 어깨에 고개를 얹었다. 미희가 오늘부터 신타로에게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느낀 것인지, 본래부터 외로움을 지닌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건마는 신타로는 급하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꼬르륵. 신타로가 미희의 머리를 내려다보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미희가 그대로 고개를 들어 신타로를 올려다보았다.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미희는 다시 신타로의 어깨로. 신타로는 더욱 더 깊은 곳으로.
"그래서 언제 떠나요?"
미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있을 이유가 없어지면 떠날 예정이에요."
"그러시구나. 저희는 모레 떠나요..."
미희의 숨소리에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신타로는 미희의 흐려진 목소리 그 끝으로부터 자신의 깊은 곳까지 무언가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타로는 어깨에 기댄 미희를 한쪽 팔로 그대로 감싸안았다. 미희의 긴 머리결이 신타로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런데 어쩐지 차가운 기운이.
"들어가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희가 나지막하게 말해왔다. 신타로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늘이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터. 오늘의 마지막에는 내일보다는 과거의 회한만이 유령처럼 걸려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신타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희가 채근하듯 미희의 어깨위에 얹어있는 신타로의 손을 잡았다. 신타로가 미희에게 되물었다.
"미희씨는요?"
그 말에 미희는 기다렸다는듯이 고개를 떼고서는 신타로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길 속에는 많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타로는 잠자코 그녀의 머리를 만지다가 어느새 복잡해지기는커녕 단호한 마음마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떤 말도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신타로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려고 하다가도 일단은 눈이 마주치니 입도 맞추고 싶어져서 그녀에게로 미끄러져갔다.
젖은 나무 위로 불길이 쏟아졌다. 한 동이 대야의 물 정도로는 불길을 이길 길이 없어보였다. 스스. 스스스. 어느새 물기를 걷어낸 마른 장작위로. 타닥. 타다닥. 두 사람은 불길 속으로.
신타로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로 향했다.
5.
깨갱.
습한 둑 멀리서 개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도화선이 절단되듯, 거친 숨을 내쉬던 신타로는 뒤를 돌아 해안가를 돌아봤다. 한 덩이의 밝은 곳이라곤 없는 칠흙. 하지만 그 무거운 어둠을 뚫고 서까래가 내려앉은 것처럼 라이트 불빛이 해안가의 한 지점을 향해 뻗어졌다. 신타로는 풀려있는 미희의 눈가를 잠시 어루만지고서는 쉬잇 하고 손가락을 올렸다. 라이트가 점점 좁혀지고 사람들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랗게 웃는 소리, 악다구니를 지르는 소리, 욕짓거리. 신타로는 바지춤을 올렸다. 웅웅 하는 소리는 한참 커져가다가 불빛들이 멀어져가면서 잦아들었다. 다시 또 칠흙. 하지만 공기의 질감은 조금 달랐다. 미희는 신타로의 손을 다시 잡았다. 신타로는 잠시 우둑 굳은 몸을 풀고 그녀에게로 그대로 몸을 실었다. 후. 후우. 꺼져가는 아궁이에 바람이 깃드는데 어쩐지 그 바람이 차고 습하다는 생각이 신타로의 머리 위에 맴돌았다. 차가워진 미희의 허벅지를 매만지고. 매만지고. 그러다보니 미희가 한 마디를 붙여온다.
"좀 더 이리와요."
미희가 신타로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신타로의 표정이 어색해서였을까. 그때 마침 위잉 하고 벗어던진 옷무더기 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다섯 번 정도 우웅우웅 지나치다가 미희가 몸을 일으켜 옷무더기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다.
"응. 자기야. 뭐 두고 온게 있어서 잠깐 나왔어. 응. 다 치웠으니까 걱정말고. 지갑도 전해드렸어. 그거 자기 가방에 없어? 알았어. 응. 금방 들어갈게. 바람 좀 쐬고. 그래. 금방 갈게."
미희의 뻣뻣한 목소리에 이제는 위화감 마저 드는 신타로였다. 전화를 끝낸 미희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가야 해요?"
신타로의 물음에 미희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뭘 좀 찾는다고 해서. 금방. 금방 올게요."
"같이 가요."
"다녀오는거에요. 걱정말구요."
"위험하니까 같이 갔다가 와요. 다시."
신타로가 힘주어 말하자 미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마저 옷을 입는다. 신타로도 바지춤을 끝까지 올리고 탁탁 먼지를 털어냈다. 제법 어색하게 펜션으로 돌아가는 길, 미희가 다시 신타로의 손을 잡았다. 신타로는 손을 또 한 번 내려다보고서는 이번에도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신타로의 각진 턱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근심이 걸려 있었다.
"다시 나올 수 있어요?"
신타로가 다시 묻자 미희는 그럼요 하고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신타로는 엉뚱하게도 아까부터 7호실의 그 남자, 재형이 가타부타 민의 허벅지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에와서야 그 남자에 대해 무어라 책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었지만. 자꾸만 그 남자를 골려주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라 미희에게 물었다.
"재형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에요?"
미희는 잠깐 놀란 눈치로 신타로를 보더니 묵묵히 자기 할 말을 해낸다. 회사에서 만났고, 입사 선배인데,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어쩌고저쩌고. 도리어 신타로를 골리듯이 조잘대며 미희가 말을 해대고 신타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듣고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재형씨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누구를 같이 만나고 그러면 답답해요. 눈치는 빠른데 너무 알은 체를 해요. 그이가 신이 나서 떠들면 속아넘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게 다 거짓인 걸 아니까... 그냥 들어도... 자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말이 없다가 말을 잇는다.
"그래도 그 사람의 존재감이 주는 든든한 게 있어요. 그와는 손길이 닿으면 그걸로 돼요. 그냥 사람답게 대화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그런... 그런게 있어서..."
신타로가 민을 유난스럽게 바라보자 민의 말꼬리가 꽁무니를 잃는다. 신타로는 어쩐지 애가 달아 물었다.
"그럼 저랑 왜 키스를 했어요?"
일순 미희는 얼어붙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옅은 숨소리를 두어번 내쉰뒤 고민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글쎄요. 글쎄... 곤란한 것을 물어온 신타로에 대해 책망하는 눈길을 한 번 내주고 미희는 대답했다.
"당신과는 대화가 즐거우니까.. 그래서.."
그러면서 수줍은 것도 같은 미소를 내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어쩐지 신타로는 뒷통수가 서늘하고 또 서늘했지만 그가 그 차가운 것의 정체를 알 길은 없었다. 다만 미희가 내짓는 그 미소의 뒤켠에는 뭐랄까 아주 무서운 어떤 것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신타로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후로 신타로는 숙소로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희가 하는 말에 대꾸는 하였지만 신타로가 느끼기에 진정 말다운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타로는 그러면서도 미희의 잡은 손을 냉큼 풀어낼 용기는 없었으며, 또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물속에서 꼬르르르르르륵 하고 숨이 막혀 허우적 대는 스스로의 모습을 드디어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금방 나올게요. 아니. 여기서 기다리면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저기 천천히 가고 있으면 제가 뒤따라갈게요. 천천히 가고 있어요!"
미희가 신타로의 손을 다시 한 번 힘주어 쥐어잡고 숙소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신타로는 다시 바닷가로 향한다. 조용히 자신의 심연에 잠겨서. 그리고 그는 자꾸 목 뒤로 흐르는 냉기의 정체를 밝히려 부단히 애를 썼다.
애당초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이 항상 지나가기 때문이었을까. 다가올 내일 때문이었을까. 속되게 그냥 신타로의 고추 탓이었을까.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어디로 향해 가는지도 모르면서 신타로는 바닷가를 거슬러 걷고 걷고 하다가 샌들 위로 축축한 모래가 흘러들어 발바닥이 기분나쁘게 끈적이는 것을 느꼈다. 너무 어두워 보이진 않았지만 신타로의 열 걸음 정도 앞에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신타로는 움츠러든 기색으로 휴대폰의 플래쉬를 켜 앞을 가리켰다.
"으아!"
신타로는 주춤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플래쉬의 맞은 편에는 검은 개가 덫에 걸려 피를 질질 흘리고 죽어 있었다. 검고 다부지고 위엄있는 얼굴이었다. 입에는 침이 줄줄 나오지만 좀처럼 죽어있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초점은 없지만 살아있는 눈망울. 죽은 것인지 살은 것인지. 멍하니 신타로가 넋을 잃고 개를 바라보는데 개의 눈에서 고여있던 핏물인지 눈물인지가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개가 죽은 개구나. 그런 생각 한편 오전에 해안가에 봤던 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민의 얼굴이. 그 큰 눈망울이 떠올랐다. 두근. 하고 심장이 조여왔다. 머리가 어지러워 신타로가 뒷걸음질을 한 발 두 발 치는데 개의 눈이 꼭 살아있는 것 같았다. 꼭 쫓아올 것처럼 초점을 잃었는데 분명 개의 시선 뒤에는 신타로가 도망칠 어딘가가 맺혀 있는 듯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월! 으. 으아아. 신타로는 핸드폰을 꽉 쥐어잡고 개에게서 꽁무니를 뺐다. 힘껏. 힘껏 달음박질을 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숙소 앞의 두 갈래가 신타로의 앞에 놓여 있었다. 미희의 방, 민의 방. 미희의 방, 미희의 방, 민의 방, 민의, 미희의...
월!
다시 한 번 등 뒤로 개울음이 들리자 신타로는 총성이라도 들은 것처럼 허겁저겁 민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쾅 하고 두어 번 확인하고 창문을 다 내리닫고 커튼을 치고 벌벌벌. 신타로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듯 앉았다.
"자기? 왔어?"
소란에 잠이 깬 민이 부스스 눈을 뜨고 신타로에게 물어왔다. 신타로는 여전히 벌벌.
"자기 왜 그래? 어디 나갔다 왔어?"
민은 신타로가 멍한 눈을 하고 떨고 있자 마치 자주 있던 일인 것처럼 침착하게 일어나서 의자에 걸터앉은 신타로를 감싸안았다.
"식은 땀까지 흘리네.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우리 예쁜 자기. 다 괜찮아. 다. 내가 여기 있어. 신타로."
민에게서는 우유 냄새가 났다. 신타로는 머리 위로 감싸안은 민의 팔을 꽉 잡고 민의 체온을 나눠받았다. 한기가 가셔간다. 신타로는 민의 풍만한 가슴 위로 파묻혀 질끈 이를 물었다. 아찔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그래. 아찔하고 무서운... 여름 날의. 그르르. 펜션 바깥으로 개가 분에 차서 그르렁 대는 소리가. 신타로는 다시 한 번 민의 품에 파고든다. 민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다시 한 번 꽉 신타로를 안아주었다. 그리고서는 신타로의 머리 위로 키스하고, 땀에 젖은 신타로의 이마를 닦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나랑 오래 같이 있자. 따뜻한 물로 같이 샤워하고 들어가서 자자. 신타로는 민의 손길에 이끌려 욕실의 뜨거운 물길 속으로 사라진다. 어푸어푸. 신타로가 물을 뱉어내는 소리가 난다. 더이상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6.
이른 아침, 신타로는 피곤해하는 민을 억지로 깨워 펜션을 떠났다. 도자기에는 여전히 예쁜 꽃이 생긋 하고 미소짓고 있었다. 생긋.
그리고 버려진 조화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누구도 행방을 알 수 없었다.